[크로노 트리거 소설 33화] 검은 홀의 결투
카에루는 사이러스가 없는 쪽으로 먼저 걸었다.
서쪽 회랑은 조금 전보다 좁아져 있었다.
벽이 실제로 움직였는지, 보랏빛 그림자가 통로를 안쪽으로 밀어 넣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세 사람이 나란히 서기에는 어깨 사이의 간격이 부족했다.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비스듬히 세워 앞을 막고, 크로노와 마르가 뒤따를 공간을 남겼다.
바닥에는 조금 전까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서 있던 것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밀랍처럼 희던 피부는 사라지고, 대신 검은 재와 부러진 손가락뼈가 융단 위에 흩어져 있었다. 벽에 기대 있던 가르디아 병사의 갑옷도 비어 있었다. 안쪽에서 누군가 몸을 빠져나간 것처럼 흉갑만 찌그러져 있었다.
갑자기 천장에서 쇠사슬이 울렸다.
카에루가 멈췄다.
앞쪽 어둠에서 창끝 둘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첫 번째 창은 그랜드리온으로 흘렸고, 두 번째는 몸을 낮춰 피했다. 뒤에서 마르의 화살이 날아와 창을 쥔 해골의 팔꿈치를 얼렸다.
크로노가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짧은 검이 뼈를 자르기보다 관절 사이를 밀어 냈다. 해골의 상체가 기울자 카에루는 물을 바닥 가까이 흘려 발을 묶었다. 마르가 냉기를 더했고, 크로노의 칼끝에서 번개가 한 번 번쩍였다.
검은 불이 꺼졌다.
뒤이어 네 마리가 더 나왔다.
카에루는 수를 세지 않았다. 비네가 말한 백 마리를 진지하게 헤아려 줄 이유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통로의 폭과 뒤에 있는 두 사람의 위치였다.
“마르, 왼쪽 벽.”
그녀가 즉시 몸을 붙였다.
“크로노,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게.”
크로노는 이미 한 걸음 들어간 뒤였지만 두 번째 걸음은 멈췄다.
해골들이 길게 늘어서자 카에루는 손바닥을 바닥으로 향했다. 돌 틈의 습기가 모여 얇은 물막이가 되었다. 물은 적의 발목까지만 번졌다.
“지금.”
마르가 얼렸다.
앞선 둘의 발이 바닥에 붙었다. 뒤의 놈들이 멈추지 못하고 부딪쳤다. 크로노가 그 틈을 가로질러 지나가며 검자루로 턱뼈를 부수고, 돌아오는 길에 번개를 흘렸다.
카에루는 마지막 놈의 검을 그랜드리온으로 받아 냈다.
칼날끼리 맞닿은 순간, 오래된 붉은 이음선에서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상대의 검에 붙은 검은 불이 흔들렸다.
그는 힘으로 밀지 않았다.
손목을 한 번 틀어 칼끝의 방향을 바꾸고, 비어 버린 가슴뼈 사이로 그랜드리온을 밀어 넣었다. 푸른 빛이 안쪽에서 터졌다.
해골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통로 끝에 문이 나타났다.
조금 전에는 없던 문이었다.
검은 나무에 가르디아 기사단의 방패들이 박혀 있었다. 오래된 방패부터 최근의 것까지 시대가 섞여 있었다. 긁힌 사자 문장, 남부 수비대의 푸른 칠, 이름을 알아볼 수 없는 기사들의 금속패까지 한 문에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마르가 가까이 다가갔다.
“전리품이네.”
카에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중 하나를 알고 있었다.
열 해 전 사이러스가 쓰던 방패는 아니었다. 사이러스는 방패보다 검을 선호했다. 그러나 같은 부대의 물건이었다. 왼쪽 아래에 세 줄로 난 흠집은 훈련장에서 서로 방패를 빌려 쓰던 시절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문을 밀었다.
안쪽은 왕좌실을 흉내 낸 방이었다.
천장은 높았고, 검은 기둥 여섯 개가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맨 끝에는 붉은 천이 드리운 높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 뒤 벽에는 검 한 자루가 가로로 걸려 있었다.
사람 하나가 왕좌 앞에 서 있었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소매가 없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였다. 허리에는 아무 무기도 없었다. 두 손은 빈 채였고, 손등과 손목에는 오래된 상처가 겹쳐 있었다.
“늦었군.”
남자가 말했다.
카에루는 그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세는 알아볼 수 있었다.
무기를 들지 않았는데도 양발의 간격이 검을 쥔 사람의 것이었다. 어깨는 힘이 빠져 있었고, 시선은 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손과 발을 보고 있었다.
“소이소인가.”
“그 이름을 기억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소이소는 카에루의 검을 보았다.
“그랜드리온만 기억하면 됐지.”
그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사이러스가 들었던 검.”
카에루의 손가락이 굳었다.
소이소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날 산에서 넌 뒤에 있었지.”
마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또 그 이야기야?”
소이소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검사끼리 말하는 중이다.”
“그럼 검부터 들어.”
마르가 벽의 검을 턱으로 가리켰다.
소이소는 웃었다.
“저건 나중이다.”
그가 발을 움직인 것은 그다음 순간이었다.
카에루는 검을 세우기도 전에 거리를 내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바닥이 손목 안쪽을 쳤다. 그랜드리온의 칼끝이 옆으로 밀렸다. 이어진 팔꿈치가 가슴을 노렸다.
카에루는 몸을 비틀어 피했으나 어깨가 스쳤다.
소이소는 멈추지 않았다.
크로노가 옆에서 검을 넣었다. 소이소는 칼날을 피하는 대신 크로노의 손목 가까이 붙었다. 베일 수 있는 거리가 사라졌다. 손등이 검자루를 치고, 무릎이 크로노의 허벅지를 밀었다.
크로노가 두 걸음 물러났다.
옆구리를 감싼 붕대가 당겨졌다.
카에루가 들어갔다.
이번에는 검을 크게 휘두르지 않았다. 짧게 찌르고 바로 거둬 상대가 손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을 막았다.
소이소가 고개를 기울였다.
“예전보다 겁이 줄었군.”
“아니.”
카에루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겁을 숨기는 데 덜 힘을 쓰게 되었지.”
소이소의 손이 다시 들어왔다.
카에루는 피하지 않고 손목을 내줬다.
그랜드리온이 한순간 아래로 떨어졌다.
소이소가 칼자루를 걷어 내려고 발을 옮겼을 때, 마르의 화살이 그의 발앞에 박혔다. 얼음이 바닥을 얇게 덮었다.
소이소의 중심이 아주 조금 흐트러졌다.
크로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베지 않았다. 짧은 검의 옆면으로 소이소의 팔을 밀어 냈다.
카에루가 다시 검을 잡았다.
세 사람의 거리가 한꺼번에 좁아졌다.
소이소는 뒤로 뛰었다.
처음으로 왕좌 앞의 자리에서 벗어났다.
“셋이서 한 사람을 상대하는군.”
“전쟁에 결투 규칙이 있었나?”
마르가 물었다.
소이소는 대답 대신 카에루를 보았다.
“사이러스라면 혼자 나왔을 텐데.”
그 말은 정확한 곳을 찔렀다.
사이러스라면 그랬을지도 몰랐다.
친구들을 뒤로 물리고, 위험을 자기 앞에 모으고, 돌아오겠다는 약속까지 웃으며 했을 것이다.
열 해 동안 카에루가 영웅이라 부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죽었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에도 그는 죄책감보다 먼저 소이소의 오른발을 보았다. 체중이 뒤꿈치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자세였다.
카에루가 말했다.
“나는 사이러스가 아니네.”
소이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야 인정하는군.”
“진작 인정했어야 했지.”
카에루는 검끝을 낮췄다.
“그러니 그 사람처럼 싸울 이유도 없네.”
소이소가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크로노가 먼저 움직였다.
그의 검이 위에서 내려오고, 카에루의 그랜드리온이 아래에서 올라갔다. 두 칼날은 소이소를 베기 직전에 교차했다. 소이소가 뒤로 피하자 마르가 얼음 화살을 바닥에 쏘았다.
피할 자리가 좁아졌다.
카에루의 검등이 소이소의 어깨를 쳤다.
크로노의 칼자루가 갈비뼈 아래에 들어갔다.
소이소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방이 조용해졌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좋다.”
소이소가 일어났다.
피가 입가에서 한 줄 흘렀지만 웃고 있었다.
“그럼 이제 검을 든 나를 상대해 봐라.”
그가 왕좌 뒤로 손을 뻗었다.
벽에 걸려 있던 검이 스스로 떨어졌다.
손잡이가 소이소의 손에 닿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긴 칼날에는 검은 빛도 불꽃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칼을 뽑는 작은 소리만으로 기둥 사이의 먼지가 한 방향으로 밀렸다.
카에루는 자세를 낮췄다.
소이소의 첫 베기는 보이지 않았다.
쇳소리가 먼저 났다.
그랜드리온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카에루의 손바닥이 저렸다. 다음 칼이 허리를 향해 들어왔다.
크로노가 막았다.
짧은 검과 소이소의 칼이 부딪치자 크로노의 몸이 그대로 밀렸다. 신발 바닥이 돌을 긁었다.
마르가 화살을 쐈다.
소이소는 칼끝으로 화살을 쳤다.
얼음이 공중에서 부서졌다.
“마법으로 검을 늦출 수 있을 것 같나?”
마르가 두 번째 화살을 걸었다.
“검 말고 바닥을 노린 건데.”
첫 화살에서 떨어진 얼음 조각들이 소이소의 발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마르가 손을 움켜쥐자 조각 사이의 습기가 한꺼번에 얼었다.
소이소의 장화가 반 박자 늦게 떨어졌다.
그 반 박자로 충분했다.
카에루가 옆으로 들어갔다.
소이소는 그랜드리온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흘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크로노의 검이 반대편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세 칼이 한 점에서 부딪쳤다.
붉은 이음선이 빛났다.
카에루는 손바닥 아래에서 그랜드리온의 두 기척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검이 먼저 나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크로노의 칼이 들어오는 각도와 맞추려는 듯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힘을 빼지 않았다.
크로노도 물러서지 않았다.
교차한 두 검이 소이소의 칼을 아래로 눌렀다.
소이소가 몸을 돌려 빠져나왔다.
그 순간 그의 칼끝이 카에루가 아니라 크로노의 옆구리를 향했다.
“크로노!”
마르가 외쳤다.
크로노는 큰 동작으로 피할 수 없었다.
그는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섰다.
칼끝이 붕대 위를 스쳤다. 천이 찢어졌지만 살은 깊게 베이지 않았다.
카에루가 물을 끌어올렸다.
치유하려는 물이 아니었다.
소이소의 칼날 위에 얇은 막을 만들었다.
강한 물이 아니라 미끄러운 물이었다.
소이소가 다시 베려 손목을 돌리는 순간 손잡이가 아주 조금 어긋났다.
마르의 화살이 손등을 스쳤다.
칼이 흔들렸다.
크로노가 들어갔다.
카에루도 동시에 움직였다.
이번에는 누가 먼저였는지 알 수 없었다.
짧은 검과 그랜드리온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교차했다. 하나는 소이소의 칼을 밀어 올리고, 다른 하나는 가슴 앞을 멈춰 세웠다.
소이소의 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금속이 바닥을 세 번 튕긴 뒤 멈췄다.
카에루의 검끝은 그의 목 바로 앞에 있었다.
소이소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동안 거친 숨소리만 왕좌실에 남았다.
“왜 멈추지?”
그가 물었다.
카에루는 칼을 내렸다.
“이기기 위해 죽일 필요가 없는 순간이 있으니까.”
“그게 네가 기사가 되지 않은 이유였나?”
카에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의 답은 열 해 전과 달라져 있었다.
소이소는 웃지 않았다.
“마왕 님 앞에서도 그렇게 멈출 수 있을지 보겠다.”
그의 몸이 검은 안개처럼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르가 활을 들었지만 카에루가 막았다.
안개는 왕좌 뒤의 벽으로 스며들었다. 소이소가 떨어뜨린 검만 바닥에 남았다. 죽었는지, 다른 곳으로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크로노가 옆구리를 눌렀다.
찢어진 붕대 아래로 피가 조금 배어 나왔다.
마르가 바로 다가왔다.
“앉아.”
“괜찮아.”
“그 말은 이제 금지야.”
그녀는 루카가 준 주머니에서 새 붕대를 꺼냈다.
카에루가 손을 올리려 하자 마르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물은 아껴. 다음에는 마법사라며.”
그 말에 카에루는 손을 내렸다.
마르는 크로노의 허리에 붕대를 다시 감았다. 크로노는 불평하지 않았지만 매듭을 조일 때 한 번 숨을 멈췄다.
왕좌실 뒤편의 작은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중앙 홀의 보랏빛이 보였다.
세 사람이 돌아가려는 순간, 카에루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둥 위 가장 어두운 곳에 붉은 점 두 개가 떠 있었다.
작은 박쥐가 거꾸로 매달린 채 그들을 보고 있었다.
카에루와 눈이 마주치자 놈은 날개를 폈다.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날아갔다.
마르가 활을 들었다.
이번에는 카에루가 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화살이 날기 전에 박쥐는 문 너머로 사라졌다.
크로노가 바닥의 소이소 검을 보았다가 자신의 짧은 검을 고쳐 쥐었다.
그는 남의 검을 집지 않았다.
카에루는 그 선택을 보고 먼저 문을 나섰다.
중앙 홀 반대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 번은 아이처럼 높았고, 다음 한 번은 성인처럼 낮았다.
붉은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