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68화] 대답이 돌아오는 자리

천을 펼치자 손가락 자국이 알 표면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마르는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올라오는 동안 옷 안에서만 만졌던 것이 맑은 하늘 아래 드러났다. 무늬는 그대로였다. 금이 간 곳도, 열어야 할 이음매도 없었다. 그녀는 한 바퀴 돌려 보고 다시 처음 쥐었던 방향으로 놓았다.

루카가 나무 옆에 인형을 내려놓았다. 마왕은 등에 걸렸던 끈을 풀어 돌 위에 두었다. 셋의 숨소리가 따로 들렸다. 여기에는 그 소리를 지울 만큼 큰 바람이 없었다.

마르는 산 아래를 보았다. 구름 사이로 지나온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어볼 푸른 인형도 없었다.

“여기가 끝이야.”

루카가 말했다. 정상이라는 뜻이었겠지만 마르는 알을 더 단단히 받쳤다.

누는 닮은 인형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스파는 가능성을 준다고 했다. 쓰여 있는 순서대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되는 배와는 달랐다. 알을 들어 올리면 될까. 어디를 향해야 할까. 마르는 묻다가 대답이 없을 것을 두려워해 입을 다물었다.

루카가 가까이 왔다.

“목걸이, 꺼내 봐.”

마르는 알을 한 손으로 받치고 사슬을 찾았다. 장갑에 걸린 고리가 잘 풀리지 않았다. 루카가 손을 빌려주었다. 옷 안에서 나온 보석에 흐린 빛이 어렸다. 이 산에 오기 전에는 없던 빛이었다.

마르는 목걸이를 벗어 루카에게 건넸다. 루카는 그것을 손바닥에 펴 놓았다.

“내가 들고 있을게.”

마왕이 나무 옆의 인형을 집어 들었다. 풀어 놓은 천을 다시 감아 어깨에 걸쳤다. 마르는 그쪽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열리든 함께 데려가야 했다.

마르는 나무 앞으로 갔다. 뿌리 가까이에는 눈이 엷었다. 신발 밑창이 단단한 땅에 닿았다. 알을 들고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오래 생각하면 돌아서고 싶어질 것 같았다.

“밤이 무서워도 버티는 모든 마음들.”

자기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그래도 계속했다.

“어둠에 맞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제게 힘을 빌려주세요.”

알을 높이 들었다. 팔에 난 상처가 당겼다. 조금 더 올리자 꾸러미를 감쌌던 천이 손목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줍지 않았다.

루카가 크로노의 이름을 불렀다.

펜던트의 빛이 밝아졌다. 마르는 옆을 보지 못했다. 알 안쪽에서 같은 빛이 비쳤다. 손바닥을 누르던 무게가 가벼워졌다. 손가락을 조금 펴자 알이 떠올랐다.

그녀의 손이 저절로 따라 올라갔다.

가는 금이 표면을 가로질렀다. 마르는 숨을 들이켰다. 금은 더 길어졌다. 그 사이로 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알이 깨졌다.

조각들이 흩어졌다.

마르는 손을 모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무릎을 굽혀 눈 위를 더듬었다. 작은 조각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루카가 다시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끝에는 젖은 눈만 묻었다.

“깨졌어.”

루카가 말했다.

마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더 멀리 뻗었다. 장갑 끝이 눈 아래 흙에 긁혔다. 온종일 품에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없어질 수는 없었다.

“왜…… 여기까지 왔는데.”

뒤에서 루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마르. 어쩌면 목숨까지 되찾는 건…….”

그녀도 말을 끝내지 못했다. 마르는 눈에서 손을 떼었다. 루카가 안 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배의 새로운 손잡이를 잡을 때도, 산 아래에서 바람을 볼 때도. 이번에는 루카 역시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정상의 나무 아래에서 멈춰 선 일행 - RPGClassics
정상의 나무 아래에서 멈춰 선 일행 - RPGClassics

마르는 일어섰다. 무릎에 붙은 눈이 떨어졌다.

“대답해 줘.”

산 아래가 아니라 앞에 없는 얼굴을 향해 말했다.

“나를 두고 가지 마. 크로노!”

그 이름이 멀리 퍼지지 않았다.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마르는 눈물 때문에 해가 흐려졌다고 생각했다. 손등으로 눈을 닦았는데도 어두웠다. 검은 원이 해를 가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빛만 테두리에 남았다.

발밑의 감촉이 달라졌다.

*

먼지가 허공에 멈춰 있었다.

마르는 한쪽 손을 앞으로 내민 자세로 서 있었다. 눈이 아니라 돌바닥이었다. 떨어지는 돌조각들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저 앞에서 쏟아지던 빛은 넓어지지 않았다. 가장자리의 가는 줄 하나까지 그대로였다.

그 안에 크로노가 있었다.

두 팔을 든 모습이었다. 발꿈치는 아직 바닥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허리에는 칼집이 매달려 있었다. 마르는 그것부터 보았다. 그날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자리에, 천과 가죽과 한 사람의 몸이 있었다.

“크로노.”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발앞에 누군가 엎드려 있었다. 자기였다.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있었고, 손 하나가 크로노를 향해 뻗어 있었다. 마르는 그 손의 모양을 알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무엇을 붙잡으려 했는지도 알았다.

루카가 옆에서 멈췄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또 다른 루카가 바닥을 짚고 있었다.

“알이 우릴 데려온 거야.”

그녀는 낮게 말했다.

“저건 그때의 우리야. 바로 이 순간으로 돌아왔어.”

마왕의 발소리가 뒤에서 멎었다.

“시간이 멈췄군. 정말 가능한 일이었나.”

마르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크로노보다 옆에 있었다. 사라가 쓰러진 마왕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지금 서 있는 마왕은 낫을 쥔 손을 내린 채 그쪽을 보았다.

그가 몇 걸음 다가갔다.

“꼴사납군. 하나도 바꾸지 못했어.”

바닥에 쓰러진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사라 앞에서 멈췄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 얼굴 앞에 떠 있었다. 마르는 그가 이름을 부를 줄 알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루카가 마왕에게서 인형을 받아 들었다.

마르는 황급히 반대쪽을 받쳤다. 산에서 쓰던 천을 풀자 똑같은 얼굴이 또 드러났다. 하나는 빛 속에 서 있었고, 하나는 두 사람 사이에 누워 있었다. 두 얼굴을 번갈아 보는 동안 어느 쪽이 손에 닿는지를 자꾸 확인해야 했다.

“그 자리에 놓자.”

루카가 말했다.

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바닥에 엎드린 자신들을 돌아 크로노에게 갔다. 그가 한 걸음씩 옮겨 갔던 길이었다. 그때는 몇 걸음도 따라갈 수 없었는데 지금은 걸어갈 수 있었다. 마르는 빨리 가려다 발을 멈췄다. 인형의 다리가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받쳐 들었다.

크로노의 소매에 손이 닿았다.

천은 빳빳하지 않았다. 구겨진 자리를 누르면 손가락 아래로 접혔다. 마르는 그 사소한 움직임을 보고 숨을 놓쳤다. 이름을 다시 불렀지만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루카가 펜던트를 허리 주머니에 넣었다. 두 손을 써야 했다. 마르는 인형을 크로노 곁에 세우고 어깨를 받쳤다. 루카가 그의 몸을 붙잡았다.

당기자 무게가 왔다.

넘어지려는 한 사람의 무게였다. 마르는 인형의 어깨를 놓고 크로노의 허리를 받았다. 루카와 함께 한 걸음 물러났다. 마왕이 다가와 넘어지려던 인형을 붙잡았다. 그의 손이 가짜 팔을 들어 빛 쪽으로 향하게 했다.

라보스 앞에서 시간이 멈춘 순간에 도착한 동료들 - RPGClassics
라보스 앞에서 시간이 멈춘 순간에 도착한 동료들 - RPGClassics

크로노가 있던 자리에는 같은 옷을 입은 인형이 섰다.

마르는 고개를 낮추어 진짜 얼굴을 보았다. 볼에 작은 먼지가 붙어 있었다. 장갑으로 닦으면 아플 것 같아 자기 소매 끝으로 문질렀다. 먼지는 떨어졌다. 눈꺼풀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 있지?”

자기에게 묻는 말인지 그에게 묻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크로노. 그렇지?”

루카가 그의 팔을 자기 어깨 위로 옮겼다.

“나가자. 서둘러.”

마왕이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은 나중에 해라.”

그는 먼저 걸으려다 멈췄다. 사라가 있는 쪽을 한 번 더 보았다. 마르는 그 얼굴을 오래 볼 수 없었다. 손 안의 무게가 조금씩 아래로 처지고 있었다. 그녀는 크로노의 허리를 더 높이 받쳤다.

빛이 바닥의 균열을 가렸다.

*

나무 밑으로 크로노가 내려왔다.

마르는 그와 같은 높이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닿은 몸이 조금 기울자 팔을 뻗었지만,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멈췄다. 붉은 머리카락에 눈가루가 붙었다.

가슴이 움직였다.

한 번. 그리고 다시.

마르는 세 번째를 기다렸다가 손을 내밀었다. 크로노의 손목 안쪽을 만졌다. 손가락 아래에서 무언가 두드렸다. 그녀의 손이 너무 떨려 제 맥박과 헷갈렸다. 조금 느슨하게 잡자 다시 느껴졌다.

“돌아왔구나.”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 루카가 뒤에서 숨을 내쉬었다. 마르는 그 숨이 끝날 때까지 크로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돌아왔어, 크로노.”

그의 눈이 열렸다.

먼저 나무를 보았다. 다음은 맑은 하늘이었다.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자 마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크로노는 몸을 일으키려다 옆구리에 손을 대었다. 루카가 어깨를 눌러 앉혔다.

“천천히. 지금은 천천히 해.”

그는 그녀를 보았다가 마왕 쪽을 보았다. 손이 허리의 칼집으로 갔다. 마르가 그 손을 잡았다.

“괜찮아. 지금은 같이 있어.”

크로노가 손을 멈췄다. 이유를 묻는 얼굴이었다. 마르는 설명하려 했지만 첫말부터 나오지 않았다. 해저 신전과 검은 새, 거기에서 잃은 화살과 집의 계단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다들 기다렸어.”

그녀가 말했다.

“카에루도, 에이라도. 로보도 아직 기다리고 있어.”

마르는 더 말하지 못하고 몸을 숙였다. 크로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깨가 자기 팔 안에 들어왔다. 그의 옷에서 기억하던 냄새가 났다. 젖은 천도, 눈도 아닌 그가 입던 옷의 냄새였다.

“다시는 그렇게 멀리 가지 마.”

말을 하고 나서야 울음이 나왔다. 크로노의 손이 등 가까이 올라왔다가 멈췄다. 곧 어깨 아래에 닿았다. 잘못 짚은 것처럼 조금 옮겨졌다. 마르는 그 서툰 손을 느끼며 더 세게 붙들었다.

죽음의 산 정상에서 크로노를 끌어안은 마르 - RPGClassics
죽음의 산 정상에서 크로노를 끌어안은 마르 - RPGClassics

루카는 옆에 앉았다. 안경을 벗고 두 눈 사이를 눌렀다. 울고 있는지 보려고 고개를 들면 크로노를 놓아야 해서, 마르는 들지 않았다.

“네가 없을 때……”

그녀는 말을 시작했다.

“루카가 배를 몰았어. 날 수 있게 됐거든. 그다음에 우린…… 아니, 먼저 끌려갔어. 장비도 다 빼앗겼고.”

순서가 엉켰다. 입으로 말하면 모두 간단한 일처럼 들렸다. 크로노가 조금 몸을 움직이자 마르는 뒤로 물러나 얼굴을 보았다.

“듣고 있지? 아직 할 말이 많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왔다.

마르는 그 작은 움직임을 한참 보았다. 루카가 펜던트를 내밀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받아 목에 걸었다. 고리를 채우는 동안 크로노는 마르의 찢어진 장갑을 보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 천 가장자리를 건드렸다.

“그건 나중에.”

마르가 말했다. 이번에는 끝말이 웃음에 조금 걸렸다.

나무 아래의 빛이 다시 넓어졌다. 루카가 일어섰다. 마왕은 돌 위에 두었던 끈을 집고 돌아왔다. 인형은 없었다. 마르는 크로노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그는 처음에는 그녀에게 기대었다가, 두 발을 눈 위에 놓았다.

빛 너머로 작은 등불이 보였다.

마르는 눈을 깜박였다. 신발 아래에는 시간의 끝의 바닥이 있었다. 크로노가 옆에서 몸을 바로 세웠다. 네 사람은 배를 타지 않고 돌아와 있었다. 난간 가까이에는 실버드가 먼저 와 있었다.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에이라였다. 그녀는 바로 앞에서 멈추어 크로노의 양팔을 잡았다. 얼굴을 위아래로 살핀 뒤 가슴에 귀를 대었다. 크로노가 놀라 어깨를 들었다. 에이라는 떨어져 서더니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쳤다. 루카가 너무 세다고 말했고, 그제야 에이라가 웃었다.

카에루는 조금 늦게 다가왔다. 마왕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대신 크로노 앞에 섰다.

“기다리게 했군.”

목소리가 끝에서 조금 낮아졌다. 로보가 그 옆으로 와 손을 내밀었다. 크로노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세웠다.

가스파는 등불 옆에 서 있었다. 마르는 감사하다고 말하려 했지만 노인이 먼저 손을 저었다.

크로노와 함께 시간의 끝으로 돌아온 동료들 - RPGClassics
크로노와 함께 시간의 끝으로 돌아온 동료들 - RPGClassics

“그 손들을 보렴.”

마르는 돌아보았다. 크로노가 잡은 로보의 손과, 그의 팔에서 아직 떨어지지 않은 에이라의 손이 보였다. 루카가 어깨를 짚어 앉을 자리를 가리켰다. 크로노는 앉기 전에 마르를 찾았다.

그녀는 바로 옆에 있었다.

크로노가 자리를 조금 비웠다. 마르는 그의 옆에 앉아 장갑을 벗었다. 이번에는 찢어진 쪽 손을 감추지 않았다.

참고자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