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66화] 바람이 잦아드는 동안

누의 짧은 손이 인형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마르는 감쌌던 천을 더 내렸다. 붉은 머리카락 아래로 이마의 띠가 드러났다. 돔의 흐린 조명에서는 얼굴에 그늘이 져,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루카가 받치고 있던 발을 조금 올렸다.

누는 한 걸음 물러났다.

“이것이면 됩니다.”

마르는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었다. 된다는 말이 무엇까지를 뜻하는지 묻고도 싶었다. 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뒤쪽 방으로 돌아갔다. 일정한 발소리가 문 너머에서 멈췄다. 작은 금속판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푸른 인형 하나가 나왔다.

둥근 몸에 짧은 팔다리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문가에서 몸을 한 번 흔들더니 안내를 시작한다는 말을 하고 위로 떠올랐다. 마르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문밖으로 날아갔다. 곧 두 번째, 세 번째가 같은 길을 따랐다.

마르는 품의 알을 만졌다. 이곳에는 크로노와 닮은 인형이 있고, 산으로는 낯선 얼굴의 인형들이 갔다. 자신들이 부탁한 것에 이렇게 많은 손이 이미 닿아 있었다.

누가 돌아왔다.

“저 셋이 산에서 여러분을 도울 겁니다.”

루카는 종이에 쓰려던 것을 멈추었다. 누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앞서 들은 가슈의 기록처럼 말 사이에 긴 틈이 있었다.

“이것으로 남긴 일은 끝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습니다.”

마르는 얼굴을 들었다.

“이 몸을 쉬게 해 주십시오. 배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됩니다.”

루카가 누 앞에 무릎을 굽혔다. 짧은 팔 아래에 작은 돌출부가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다가 멈췄다.

“누르면 다시 말을 못 하는 거야?”

누는 움직이지 않았다. 같은 부탁을 다시 할 뿐이었다. 루카는 손을 거두고 이음매를 보았다. 손볼 곳을 찾는 눈이었다. 마르는 그녀가 공구를 꺼낼까 봐 가방을 보았지만, 가방은 닫혀 있었다.

마왕이 빈 작업대 앞에 서 있었다. 누를 부르지 않았다.

루카는 마른 천으로 누의 배에 붙은 먼지를 닦았다. 스위치가 드러났다. 그녀는 손끝을 대고 잠깐 기다렸다가 눌렀다.

마지막 부탁을 남기는 감시자의 돔의 누 - RPGClassics
마지막 부탁을 남기는 감시자의 돔의 누 - RPGClassics

낮은 울림이 끊겼다.

마르는 그제야 계속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누의 팔이 조금 내려갔다. 몸은 기울지 않았다. 루카는 밑에 손을 대려던 자세로 잠시 멈춰 있다가, 천을 접고 일어났다.

누가 지나갈 자리를 비워 두었던 마르는 옆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비켜 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준비해 온 천을 어깨에 둘렀다. 루카가 인형을 단단히 감싼 뒤 마왕을 보았다.

“내 등에 묶으면 총을 꺼내기가 어려워. 네가 맡아.”

그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루카가 긴 꾸러미를 그의 등에 대고 끈을 어깨 아래로 통과시켰다. 인형의 발끝이 걸음에 걸리지 않을 만큼 위로 올렸다. 마르는 매듭 하나를 당겨 보았다. 마왕이 고개를 돌렸지만 손을 떼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풀면 돼.”

루카가 옆구리의 매듭을 가리켰다.

밖에서는 산이 보였다. 어두운 하늘 위로 봉우리만 희었다. 루카는 실버드를 산 아래의 평평한 곳으로 옮겼다. 위쪽 눈구름을 향해 더 가려다 조종간을 되돌렸다.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선체를 옆으로 밀었다. 마르는 걸어 올라갈 길을 찾으며 땅에 내렸다.

눈은 처음부터 무릎을 붙잡았다.

몇 걸음 갔을 뿐인데 소매가 거세게 당겨졌다. 마르는 몸을 숙였다. 바람이 그보다 낮은 곳에서도 불었다. 두 발이 함께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을 짚자 눈 아래의 얼음이 손바닥을 밀어냈다.

뒤에서 루카가 그녀의 팔꿈치를 붙들었다. 둘은 함께 비탈을 조금 내려가다 바위에 걸렸다. 마왕은 낫의 자루를 가로로 대고 서 있었다. 외투가 끈에 묶인 인형을 때렸다.

“저기!”

루카가 위를 가리켰다.

푸른 인형이 눈 가운데 있었다. 마르는 바람이 약해지기를 기다려 그쪽으로 갔다. 작은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잦아들면 앞으로. 거세지면 나무 뒤로.”

인형이 있던 곳에서 가지가 뻗었다. 마르는 움찔하며 물러섰다. 몸을 가릴 만큼 굵은 줄기가 서 있었다. 나무껍질에 손을 대자 거친 감촉이 장갑을 눌렀다. 막 눈앞에서 생긴 것인데 뿌리는 비탈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죽음의 산에서 바람을 피하는 법을 알려 주는 인형 - RPG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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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바람이 왔다.

셋은 나무 뒤로 붙었다. 마르는 줄기를 마주 본 채 발을 조금씩 밀어 올렸다. 뒤로 밀리지 않으려면 계속 힘을 주어야 했다. 마왕의 등에서 인형을 감싼 천 끝이 튀어나왔다. 루카가 그것을 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람이 낮아졌다.

루카는 바로 뛰어나가려다 마르를 보았다. 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다음 나무까지 달렸다. 발자국은 곧 지워졌다. 마르는 두 번째 줄기를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앞선 나무가 눈가루 뒤로 흐려졌다.

돌아가려 해도 같은 바람을 건너야 했다.

그녀는 다음 나무만 보았다. 바람이 귀 옆에서 가늘어질 때를 기다렸다. 루카가 한 손을 들었다 내렸다. 이번에는 셋의 발이 거의 함께 움직였다.

눈보라 속 나무 뒤에서 바람을 기다리는 일행 - RPG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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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 끝에서는 바람 소리가 낮아졌다. 바위가 양옆에서 길을 가렸다. 마르는 손을 무릎에 대고 몸을 접었다. 목 안이 아팠다. 루카는 물통을 내밀었고, 그녀는 조금만 마셨다. 남은 물을 들여다보는 것을 보고 루카가 뚜껑을 닫아 주었다.

눈 아래에서 검은 형체가 튀었다.

마왕이 먼저 돌아섰다. 길을 굴러 내려온 것 두 개가 발 앞에서 갈라졌다. 하나가 마르에게 덤벼들었다. 그녀가 활로 밀어내는 동안 마왕의 손 위에 번개가 퍼졌다. 눈길이 푸르게 밝아졌다. 두 형체가 뒤집힌 뒤에는 바위에서 작은 돌들이 떨어졌다.

루카는 떨어지는 돌을 피하며 마왕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도 천장을 보고 있었다. 마르는 알이 멀쩡한지 만져 본 뒤 앞으로 갔다.

동굴 입구에서 낮은 울음이 들렸다.

그녀는 한쪽 발을 든 채 멈췄다. 바람 때문에 생긴 소리라면 길게 이어질 것이었다. 이 소리는 짧게 끊겼다 다시 시작되었다. 안쪽에서 돌을 끄는 소리가 겹쳤다.

가시가 먼저 보였다.

어둠이 움직이자 그 아래로 둥근 껍질이 나타났다. 껍질 앞에는 벌어진 입이 있었다. 젖은 살이 접혔다 펴졌고, 낮게 깔린 몸이 동굴 바닥을 긁었다.

마르의 손이 차가워졌다. 신전에서 보았던 것은 이보다 훨씬 컸다. 그런데 크기가 다르다는 사실이 아무 위안도 되지 않았다. 벌어진 입을 보고 있으면 라보스의 빛이 다시 넓어질 것 같았다.

루카의 총구가 올라갔다.

마왕은 옆구리의 끈을 풀었다. 인형을 벽의 움푹한 곳에 눕히는 동안 생물이 앞으로 밀고 나왔다. 루카가 쏘았다. 입을 겨눈 탄환이 고개가 낮아지는 순간 껍질의 턱에 맞았다.

마르는 금속성 울림을 들었다.

가시들이 한꺼번에 떨렸다. 마왕이 몸을 돌렸으나 늦었다. 날카로운 것들이 동굴을 가로질렀다. 마르는 팔로 얼굴을 가리고 엎어졌다. 어깨와 허벅지가 동시에 뜨거워졌다. 뒤쪽 돌벽에서 수없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루카가 무릎을 꿇었다. 총을 쥔 손에서 피가 떨어졌다.

마르는 기어서 다가갔다. 생물은 아직 앞에 있었다. 루카의 손목을 잡고 빛을 모으자 친구가 이를 악물었다. 피부를 스친 상처에서 피가 느려졌다. 어깨에 박힌 가시 하나는 루카가 자기 손으로 뺐다.

마왕이 낫을 낮게 들었다. 얼굴에 얇은 자국이 났다. 껍질 위쪽에는 탄환이 닿은 흔적만 남아 있었다.

“거긴 안 뚫렸어.”

루카가 말했다.

입이 다시 벌어졌다. 그 안에서 붉은 빛이 뭉쳤다. 마르는 몸을 옆으로 던졌다. 불덩이가 그녀가 있던 바닥에 터졌다. 벽에 세워 둔 인형 위로 빛이 지나갔다.

마왕의 손가락 사이에 번개가 맺혔다. 루카가 고개를 저었다.

“껍질까지 닿아.”

그는 그녀를 보았다. 마르는 그가 그대로 손을 내릴까 봐 숨을 멈췄다. 하지만 빛은 손끝에서 잦아들었다. 마왕은 낫을 고쳐 잡았다.

마르가 화살을 걸었다. 입이 위로 들릴 때까지 기다렸다. 신전의 거대한 입을 생각하지 않으려 시위에 닿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지금 보이는 살의 가장자리, 그곳만 겨누었다.

죽음의 산 동굴을 막아선 가시 껍질의 생물 - RPG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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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이 박혔다.

생물이 머리를 떨었다. 껍질은 조용했다. 루카는 쏘지 않고 한 번 더 기다렸다. 뒤로 미끄러진 입이 다시 나왔을 때, 좁은 불길을 그 안으로 보냈다. 울음이 동굴을 채웠다.

가시는 날아오지 않았다.

“앞쪽만.”

루카가 말했다. 마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활을 내렸다. 셋이 다 공격하면 피를 닦을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루카의 팔을 한 번 더 살핀 뒤 마왕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찢어진 뺨 위로 빛이 지나갔다.

그의 낫은 크게 돌지 않았다. 입이 나올 때 자루를 당겼고, 휘어진 날끝만 앞으로 보내 살의 옆을 걸었다. 생물이 몸을 비틀자 마왕도 무릎을 굽혔다. 날이 껍질에 닿기 전에 비켜 냈다.

루카가 그 빈틈에 쏘았다.

뜨거운 덩어리가 루카의 발 앞에 터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다 돌에 발꿈치가 걸렸다. 마르가 등을 받쳤다. 이번에는 총구를 내릴 시간이 있었다. 둘이 벌어진 뒤에야 다시 총성이 났다.

생물이 길을 막은 채 몸을 낮추었다. 아무도 앞으로 뛰지 않았다. 마왕이 오른쪽으로 옮기자 입이 그를 따라갔다. 루카가 왼쪽으로 무릎을 밀었다. 마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숨을 고르며 손에 남은 온기를 모았다.

낫이 한 번 더 움직였다.

루카의 불이 입 안을 밝혔다. 마르는 그 안쪽의 살이 오므라드는 것을 보았다. 몸이 크게 들썩이더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굽어 있던 가시들이 한쪽으로 쓰러졌다. 딱딱한 껍질이 갈라져 부서지는 동안 셋은 움직이지 않았다.

더는 울음이 나지 않았다.

루카가 손수건으로 총의 손잡이를 닦았다. 마르는 죽은 몸 가까이 갔지만 화살을 뽑지 못했다. 부러진 자루가 깊이 걸려 있었다. 열한 발이 남았다.

그녀는 돌아와 인형의 천을 풀었다. 날아온 가시는 벽에 막혔고, 가짜 얼굴에는 아무 흠도 없었다. 천을 다시 덮으려는데 손가락이 떨렸다. 마왕이 반대쪽 끝을 눌러 주었다. 천이 움직이지 않자 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

루카는 셋의 상처를 붕대로 감았다. 마르는 동굴 안쪽을 보았다. 눈은 더 깊은 곳까지 이어졌고, 그 위에 난 넓은 자국도 함께 이어져 있었다.

마왕이 다시 인형을 등에 멨다. 루카가 끈을 당겼다.

“아직 갈 수 있어?”

루카는 마르에게 물었다. 마르는 장갑 안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굽혔다. 마지막 손가락까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뒤, 앞쪽의 눈에 발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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