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65화] 웃는 얼굴을 빌리러

덮개에 붙었던 먼지가 빛 속에서 사라졌다.

마르는 품에 든 꾸러미를 누른 채 창밖을 보았다. 누런 하늘이 푸르게 바뀌었다. 바다에는 해가 비쳤고, 마을의 지붕마다 제 색깔이 있었다. 실버드가 낮아지자 천막 사이를 걷는 사람들까지 보였다. 누군가는 손에 든 꼬치를 옆 사람에게 내밀고 있었다.

저렇게 더운 것을 먹을 수도 있구나.

생각하고 나서 마르는 입술을 다물었다. 무엇을 당연하게 여겼는지 며칠 사이에 자꾸 잊어버렸다. 루카는 광장에서 떨어진 빈터에 배를 내렸다. 덮개가 열리자 풀 냄새가 들어왔다. 마르의 옷에는 아직 먼 미래의 쇠 냄새가 남아 있었다.

마왕이 마지막으로 내렸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의 낫을 보고 걸음을 늦추었다가 다시 빨라졌다. 루카는 길이 좁아지기 전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건 좀 가려.”

마왕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날을 외투 안쪽으로 돌렸다.

광장에서 종이 울렸다.

마르는 발을 멈췄다. 같은 종이었다. 크로노와 부딪쳐 펜던트를 떨어뜨렸던 자리에는 아이 둘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바닥에 선을 긋고, 선을 밟았느냐 아니냐로 다투었다. 그 사이를 지나가려던 마르는 옆으로 돌아갔다.

루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천막에 매단 표지들을 보며 걸었다. 누가 풍선 하나를 놓쳐 손을 뻗자 마르도 위를 보았다. 얇은 끈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 뒤로 먼 수평선 위에 검은 형체가 있었다. 여기까지 와 있었다. 사람 하나가 그것을 가리켰고, 다른 사람은 보지 않은 채 과자를 샀다.

노점과 사람들 사이로 이어지는 천년제 광장의 길 - Vorxu
노점과 사람들 사이로 이어지는 천년제 광장의 길 - Vorxu

마르는 천막 안으로 시선을 내렸다.

노르슈타인 베클러의 이름은 입구에 크게 적혀 있었다. 안쪽은 어두웠다. 천을 밀고 들어가자 머리 하나가 허공에서 돌아섰다. 웃는 얼굴 옆으로 장갑 낀 손 두 개가 떠올랐다. 몸은 보이지 않았다.

마르는 뒷걸음질하려다 멈췄다. 그 손은 무기를 쥐고 있지 않았다. 박수를 치고 있었다.

“손님이군! 어떤 얼굴을 가져가고 싶나?”

“크로노요.”

이름이 너무 빨리 나왔다. 베클러의 웃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청년의 인형을? 주인 없는 데서 남의 얼굴을 내주지는 않는데. 오늘은 특별히 봐주도록 하지.”

루카가 앞으로 나왔다.

“무엇을 하면 되죠?”

은빛 점수 마흔 점. 그리고 동작을 따라 하는 놀이. 베클러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작은 원을 그렸다. 끝까지 해내지 못해도 인형은 주겠지만, 버틴 만큼 값을 깎겠다고 했다.

마르는 지갑을 꺼냈다. 안에는 동전이 있었다. 놀이에서 받는 점수는 없었다. 루카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덮었다.

“내가 알아.”

그녀가 마르를 데리고 나온 곳은 광장의 다른 편이었다. 둥근 기계가 팔을 들고 몸을 흔들었다. 구경하던 아이가 그 발 앞까지 갔다가 어른에게 붙잡혔다. 루카는 기계가 주먹을 내미는 범위를 보더니 가방을 마르에게 건넸다.

“곤잘레스야. 이기면 점수를 줘.”

그녀가 선 안으로 들어갔다. 기계는 노래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루카는 한쪽 팔이 뻗는 순간 몸을 낮추고, 되돌아오는 팔 아래로 빠졌다. 총성이 났다. 둥근 몸통에서 불꽃이 튀었다. 잠시 뒤 기계가 멈추더니 패배를 알리는 우스운 음을 냈다.

아이들이 웃었다.

루카는 열다섯 점을 받고 다시 선 안에 섰다. 다음에는 주먹이 모자 끝을 스쳤다. 그녀는 모자를 바로잡고 거리를 벌렸다. 마르는 응원하려던 입을 닫았다. 세 번째 겨루기가 끝났을 때 루카의 안경에 땀이 맺혀 있었다. 마르는 가방을 돌려주기 전에 자기 소매로 그 물기를 닦아 주었다.

“이제 돼.”

루카가 말했다. 마왕은 조금 떨어진 천막 그늘에 서 있었다. 그가 이 광경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다.

베클러의 천막으로 돌아가 마흔 점을 내자 작은 종이 울렸다.

어둠 속에서 크로노가 걸어 나왔다.

마르는 한 걸음 움직였다. 루카가 가방끈을 잡아 멈춰 세웠다. 그의 발이 바닥에 닿았는데도 구두 안에서 체중이 옮겨지는 기척이 없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바람이 없는 곳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인형이었다.

이마의 띠와 옷의 접힌 자리까지 닮아 있었다. 마르는 어느 곳이 다른지 찾다가 눈을 보았다. 눈은 이쪽을 보고 있었으나 자신을 알아보지 않았다.

“누가 할 텐가?”

베클러의 손이 둘 사이를 오갔다. 루카가 앞으로 나오려 하자 마르가 가방끈을 풀어 그녀에게 건넸다. 알도 함께 맡겼다.

“내가 할게.”

바닥에 표시된 자리에 섰다. 베클러는 신호를 기다리라고 했다. 먼저 움직이면 틀린 것이라며 장갑 낀 손가락을 흔들었다.

인형이 왼팔을 들었다.

마르는 자기 왼팔을 들었다. 종이 울리기 직전에 멈춰, 손을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베클러는 웃었다. 아직 끝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오른팔. 그다음은 두 손을 얼굴 옆으로 가져가 놀라는 몸짓이었다. 마르는 인형의 손끝을 보았다. 생전의 크로노를 떠올리면 늦었다. 눈앞에서 움직이는 나무와 천만 보아야 했다.

인형이 배를 잡고 웃었다.

소리는 없었다. 어깨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르는 손을 배 위에 댔다. 입을 열었다. 베클러의 종이 다시 울렸다.

웃는 흉내를 내야 했다.

그녀는 몸을 조금 숙였다. 입가를 올리고, 어깨를 흔들었다. 눈이 뜨거워졌다. 인형은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 있었다. 오른손을 든 것을 왼손으로 따라 했다. 종이 짧게 두 번 울렸다.

“거기까지!”

마르는 손을 내렸다. 혀에 짠맛이 닿았다. 입술을 깨물었는지 눈물이 흘렀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베클러가 값을 불렀다. 루카는 지갑을 열고 동전을 세었다. 끝까지 이기지는 못했지만 남은 돈으로 낼 수 있었다. 마지막 동전이 떠 있는 손바닥 위에 놓였다.

“집으로 보내 두지. 크로노의 집이야. 다른 얼굴을 잘못 가져가지 않도록!”

닮은 인형을 크로노의 집으로 보내겠다는 베클러 - Vorxu
닮은 인형을 크로노의 집으로 보내겠다는 베클러 - Vorxu

인형은 어둠으로 돌아갔다. 마르는 뒤따라가려던 발을 멈췄다. 여기서 들고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루카가 알 꾸러미를 돌려주었다. 마르는 두 손으로 받고 가슴에 붙였다.

밖에서는 누군가 방금 놀이가 재미있었느냐고 물었다. 마르는 못 들은 척했다.

*

집으로 가기 전, 루카는 상점에 들렀다. 마르는 새 화살 열 발을 받아 남은 두 발과 함께 묶었다. 루카는 탄약을 보충하고 마른 붕대와 밧줄을 골랐다. 둘이 접은 두꺼운 천과 작은 식량 꾸러미를 놓자, 가게 주인은 어디 멀리 가느냐고 물었다.

“산에요.”

마르가 답했다. 어느 산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크로노의 집 앞에서는 문을 두드리는 데 오래 걸렸다. 마왕은 담장 바깥에 남았다. 루카는 평소처럼 들어가려다 마르를 보고 손을 거두었다. 결국 마르가 문을 두드렸다. 손등에 나무의 결이 닿았다.

트루스 마을의 크로노 집 앞에 도착한 일행 - Vorxu
트루스 마을의 크로노 집 앞에 도착한 일행 - Vorxu

안에서 대답이 왔다.

“열려 있어요.”

바닥을 닦은 냄새가 났다. 창가의 작은 깃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마르는 발에 묻은 흙을 문지르고 들어갔다. 고양이가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다 루카를 알아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곧 두 사람 뒤의 열린 문을 보았다.

위층에서 크로노의 어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루카구나. 마르도 왔네. 올라와.”

계단 중 하나가 밟자마자 울었다. 루카는 그다음 계단의 끝을 밟았다. 어디가 소리 나는지 아는 걸음이었다. 마르는 그녀를 따라가며 알이 든 옷 안쪽을 눌렀다.

방 안에 크로노가 서 있었다.

마르는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인형은 책상 옆에 놓여 있었다. 방 안에서 보니 천막에서보다 더 닮았다. 침대의 길이와 문틀의 높이가 그 얼굴을 익숙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침대 끝의 옷을 개고 있었다.

“크로노는 잘 지내니?”

루카가 대답했다.

“네.”

말이 멎었다. 어머니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보자 마르는 알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황급히 풀었다.

“잘…… 잘 지내요.”

루카가 말했다.

마르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창문 밑에는 해가 길게 들어와 있었다. 그 밝은 자리에서 자신들의 젖었던 옷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어머니는 개던 옷을 무릎에 놓았다.

“너희한테 폐나 끼치지 않는지 몰라. 너무 말썽 부리지 말라고 전해 주렴.”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폐를 끼쳤느냐는 말을 듣자 산 아래로 보내진 세 사람과 닫힌 빛이 떠올랐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어머니가 그의 옷을 개고 있었다.

“아주머니.”

루카가 불렀다.

“응?”

그녀는 한 번 입을 다물었다가 인형 쪽을 보았다.

“저 인형을 좀 빌려 갈게요.”

어머니는 뜻밖이라는 듯 인형을 보았다. 조금 전 누군가 보내온 것이라고 했다. 크로노가 없는 방에 저 얼굴이 있으니 놀랐다고 웃었다. 마르는 따라 웃으려다 그만두었다.

“그러렴. 넘어뜨리지 않게 조심하고.”

루카가 먼저 인형의 어깨에 손을 댔다. 마르는 다리를 받쳤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사람이었다면 다른 쪽으로 기울었을 무게가, 두 팔 사이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머리를 문틀에 부딪치지 않도록 돌리자 뺨이 마르의 소매에 닿았다.

크로노의 방에 놓인 닮은 인형 - Vorxu
크로노의 방에 놓인 닮은 인형 - Vorxu

아무 온기도 없었다.

두 사람은 천을 둘러 얼굴을 가렸다. 어머니는 문을 잡아 주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 고양이가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 마르는 밑을 보느라 발을 헛디딜 뻔했다. 루카가 멈춰 주었다.

“천천히.”

루카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현관 앞에서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마르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문이 닫힌 뒤에도 손에 든 것을 내려놓지 않았다. 마왕이 담장에서 몸을 뗐다. 그의 눈이 감싼 얼굴로 향했다가 루카에게 돌아왔다.

마르는 그에게 인형을 넘기지 않았다. 루카와 함께 빈터까지 들고 갔다. 실버드의 좌석 사이 바닥에 눕히고 밧줄로 움직이지 않게 묶었다. 접힌 팔이 덮개에 걸리지 않도록 두 번 살폈다.

루카가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마르는 문가에서 들은 말을 입 안으로 다시 해 보았다. 잘 지내요. 소리가 나기 전에 이를 다물었다. 알을 싼 천은 따뜻해져 있었다. 자신의 체온이었다.

배가 땅을 떠났다. 크로노의 집 지붕이 다른 지붕들 사이로 작아졌다. 마르는 그쪽을 끝까지 보았다. 지붕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고개를 돌려, 발치의 밧줄이 풀리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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