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64화] 아직 열리지 않은 시간

시간의 끝에 닿자 먼저 작은 불빛이 보였다.

마르는 덮개가 열려도 바로 내리지 못했다. 저 불빛 아래에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라가 난간에서 몸을 떼고 손을 들었다. 로보가 뒤따라 일어났다. 카에루는 두 걸음 나오다가 멈췄다.

마왕이 먼저 발판을 밟았다.

금속이 짧게 울렸다.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칼집에서 드러난 날에 불빛이 걸렸다. 마왕도 걸음을 멈췄다. 둘 사이로 에이라의 들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왜 저자가 여기 있나.”

카에루의 목소리는 마르에게 향했지만 눈은 마왕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르는 좌석을 짚고 일어났다. 자신이 설명해야 했다. 조종판을 확인하던 루카가 뒤돌아보았다.

“같이 왔어.”

“그건 보이네.”

마르가 발판을 내려왔다. 입을 열었지만 첫말을 고를 수 없었다. 마왕의 얼굴을 보니 신전에서 사라가 그에게 손을 뻗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곶에서 들은 이야기부터 해야 했다.

에이라가 실버드 안을 들여다보았다.

“크로노?”

빈 좌석을 확인한 뒤에도 그녀는 기체 뒤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마르는 에이라를 불렀다.

“여기 봐.”

에이라가 돌아섰다.

“크로노는 못 왔어.”

손을 벌리고 서 있던 에이라의 팔이 옆구리에 붙었다. 카에루가 처음으로 마르를 보았다. 로보의 목 안쪽에서 낮은 소리가 났다가 멎었다.

루카가 옆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마르의 어깨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가까이 서 있어서 옷깃이 닿았다.

“해저 신전에서 라보스가 깨어났어.”

마르는 바닥의 이음매를 보며 말했다.

“우리가 막으려고 했는데 안 됐어. 일어날 수가 없었어. 크로노만…….”

마지막 말을 잇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그때 에이라가 먼저 앞으로 왔다.

“다쳤나? 데리러 간다.”

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라가 멈췄다.

“우릴 가렸어. 라보스가 있는 쪽으로 가서.”

그 장면을 소리 내어 말하자 눈앞의 바닥이 너무 가까워졌다. 마르는 무릎을 펴려고 애썼다.

루카가 이어 말했다.

“몸도 남지 않았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난간 너머에는 바람도 없었다. 마르는 이렇게 조용한 곳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에이라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힘이 너무 세서 마르는 조금 몸을 기울였다. 에이라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손을 풀지도 않았다. 잠시 후 손가락 사이의 힘이 아주 조금 줄었다.

카에루가 검을 칼집으로 돌려 넣었다. 끝까지 들어가는 소리는 늦게 났다.

“자네 둘은?”

그가 물었다.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뜻으로 보였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로보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마르보다 낮은 곳에서 얼굴의 불빛이 비쳤다.

“앉으시겠습니까?”

마르는 앉으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에이라의 손을 덮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어볼 게 있어.”

불빛 가까이에 있던 노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늘 기댔던 난간에서 지팡이를 가져오는 동안, 마르는 그가 이미 들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노인은 빈 실버드를 보았다.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흥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르는 처음 듣는 가락이었다. 노인은 한 소절을 다 마치지 못하고 멈췄다. 지팡이를 세워 두 손으로 짚었다.

“그 아이가…….”

시간의 끝에서 크로노를 떠올리는 동료들 - RPGClassics
시간의 끝에서 크로노를 떠올리는 동료들 - RPGClassics

그는 다음 말을 고르지 않았다. 그대로 기다렸다.

“시간의 현자를 찾고 있어요.”

마르가 말했다.

“가스파라는 분이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법을 알지도 모른다고 해서.”

노인의 눈이 뒤쪽으로 갔다. 마왕이 불빛 바깥에 서 있었다. 그는 다가오지 않았다.

“돌아오면 무엇부터 하겠니?”

노인이 물었다.

마르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알았지만 무엇을 하느냐는 것까지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건…….”

손으로 팔을 잡을 것이다. 붙잡아도 사라지지 않는지 볼 것이다.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들여다볼 것이다. 그중 어느 것도 노인이 묻는 답 같지 않았다.

“다시는 그런 데 혼자 서게 안 할 거예요.”

노인은 마르의 얼굴을 보았다. 마르는 그가 그 말로 충분하다고 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지팡이 손잡이만 쓸었다.

“시간을 건너는 것과 죽은 이를 돌려놓는 것은 다르단다.”

“알아요.”

대답이 너무 빨랐다. 마르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뇨. 몰라요. 그래서 물으러 왔어요.”

노인의 손이 멈췄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마르는 조금 더 기다렸다. 다른 말은 오지 않았다. 가슴 안쪽에서 부풀었던 것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에이라의 손을 놓고 반걸음 물러섰다. 마왕에게 돌아가 묻고 싶었다. 왜 이곳에 오라고 했느냐고. 하지만 그가 길을 안다고 한 적은 없었다.

루카가 그녀와 함께 돌아섰다.

“잠깐.”

노인이 불렀다.

그는 옷 안쪽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둥글고, 한쪽 끝이 조금 더 좁았다. 불빛을 받아 표면에 흐린 무늬가 비쳤다. 마르는 가까이 갔다.

“손을 펴 보렴.”

그녀는 두 손을 내밀었다. 물건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겉면에는 손톱으로 찾을 만한 틈이 없었다.

“시간의 알이다. 크로노 트리거라고 불러도 좋겠지.”

시간의 끝에서 건네받는 작은 알 - RPGClassics
시간의 끝에서 건네받는 작은 알 - RPGClassics

마르는 이름보다 손 안의 무게에 집중했다. 너무 가벼워서 손을 세게 오므리면 깨질 것 같았다.

“이걸로 어떻게 해요?”

“가능성을 품고 있어. 그것을 열 수 있는지는 너희에게 달렸다.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야.”

루카가 마르의 손 가까이 몸을 숙였다. 공구를 꺼내지는 않았다.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있나요?”

“너희 배를 만든 이에게 물어보렴.”

마르의 손이 굳었다. 가슈의 빈 의자가 떠올랐다. 몸은 더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던 누의 목소리도.

“그분은 이미…….”

루카가 말을 멈췄다. 그녀와 마르는 서로를 보았다. 기억과 작업 순서를 남겨 두었다. 누가 그렇게 말했다.

마왕이 불빛 안으로 들어왔다. 노인의 얼굴을 본 뒤, 그 손에 들렸던 알을 보았다.

“가스파.”

이번에는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오래 걸렸구나.”

마왕의 입이 굳었다. 그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마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알을 감싸 쥐었다. 왜 이름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대답을 들어야 할 질문이 따로 있었다.

루카가 가방에서 마른 천을 꺼냈다. 마르는 그것을 받아 알을 감쌌다. 가장자리를 접으려던 손이 한 번 헛돌았다. 에이라가 천 끝을 잡아 주었다. 매듭을 짓지는 않았다. 다시 펼칠 수 있도록 겹쳐 넣었다.

“에이라도 간다.”

마르는 실버드를 보았다. 세 자리였다. 마왕도 배 쪽을 보고 있었다. 루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슈를 아는 사람이 함께 가면 좋겠어. 우리가 놓친 말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셋이 다녀올게.”

에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르의 손에 든 천을 보고, 그 뒤에 선 마왕을 보았다. 마르가 그녀의 손을 한 번 잡았다 놓았다.

카에루가 마왕 앞을 막았다.

“이 일로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네.”

마왕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카에루는 검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지금은 그 아이를 되찾는 일부터 하겠네. 돌아오면 나와 할 이야기가 있을 걸세.”

“기다려라.”

마왕이 말했다.

카에루의 턱이 잠깐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먼저 길을 비켰다. 로보가 실버드 옆의 발판을 확인하고 물러섰다. 에이라는 난간 옆에 남아 있었다.

마르는 자리에 앉아 천 꾸러미를 품에 안았다. 전처럼 옆자리와 거리를 벌릴 여유가 없었다. 덮개가 닫히기 직전 그녀는 에이라에게 손을 들었다. 에이라도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내리지 않았다.

미래의 하늘은 낮고 누렇게 흐려 있었다.

루카는 돔의 둥근 지붕을 찾아 천천히 내려갔다. 날개를 접는 동안 안쪽에서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계기를 확인한 뒤에야 덮개를 열었다. 마르는 알을 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황폐한 미래의 감시자의 돔으로 향하는 실버드 - Vorxu
황폐한 미래의 감시자의 돔으로 향하는 실버드 - Vorxu

여기에도 차가운 공기가 있었다. 그러나 마을의 바람과는 냄새가 달랐다. 녹슨 쇠와 오래된 먼지가 혀에 붙었다. 발밑에서 깨진 조각이 바스러졌다. 마왕은 아무 말 없이 지평선을 보았다.

감시자의 돔 안에는 의자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외투도 걸려 있었다. 마르는 그 옆을 지날 때 발소리를 줄였다.

펜던트를 대자 봉인 문이 열렸다. 푸른 누가 복도 끝에서 고개를 들었다. 작은 발이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였다. 루카는 문턱 안쪽으로 들어와 기다렸다.

마르는 천을 펼쳤다.

“이걸 주셨어요. 가스파가.”

누가 멈췄다. 눈이 알로 향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서 마르는 손을 조금 더 내밀었다.

“친구를 데려오고 싶어요.”

누의 목 안쪽에서 작게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죽음의 산으로 가야 합니다.”

루카가 가방을 열었다. 종이의 젖은 부분을 피해 남은 빈 곳을 폈다.

“여기서 갈 수 있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누는 마르를 보았다. 그 눈길이 얼굴에서 어깨, 발끝으로 내려갔다. 마르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되찾으려는 분과 똑같이 생긴 인형이 필요합니다.”

루카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옷만 비슷한 건 안 돼?”

“그분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닮아야 합니다.”

닮은 인형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는 감시자의 돔의 누 - RPGClassics
닮은 인형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는 감시자의 돔의 누 - RPGClassics

마르는 알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으로 크로노가 있던 곳에 닿는다고 해도, 그가 서 있던 자리는 그대로 남는다. 누는 아직 그보다 자세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마르는 먼저 인형을 찾기로 했다. 다 이해한 뒤 움직이려 하면 여기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알아요?”

“노르슈타인 베클러. 그런 일이라면 그 사람일 겁니다. 축제가 열리는 곳을 찾아보십시오.”

마르는 고개를 들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루카도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 천년제의 소리, 광장의 천막, 걸어 다니며 서로를 부르던 사람들이 잠깐 이 조용한 복도에 겹쳤다. 마르는 그날 크로노의 뒤를 따라 걷던 자기 발을 떠올렸다. 그때는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찾으면 다시 올게요.”

마르가 말했다.

누는 고개를 끄덕이고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마왕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 그가 입을 열 것처럼 보여 마르는 기다렸지만, 그는 외투가 걸린 방 쪽으로 시선만 돌렸다.

마르는 알을 다시 쌌다. 천의 모서리를 같은 순서로 접자 이번에는 손이 헛돌지 않았다. 루카가 가방 안쪽에 자리를 비워 주었지만 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들고 있을게.”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녀는 루카를 불렀다.

“집에 가면 어머니도 만나겠지.”

누구의 어머니인지 루카는 묻지 않았다.

마르는 말을 연습하려 했다. 크로노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처음에 무엇을 말해야 할까. 아직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금방 돌아온다고도 할 수 없었다.

루카가 열린 문을 붙잡았다.

“나도 같이 갈게.”

마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턱을 넘었다. 차가운 바람에 천 끝이 들렸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 끝을 눌렀다. 아직 알은 열리지 않았다. 품 안에 그대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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