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63화] 곶 끝에 남은 이름
마르는 물을 조금씩 마시다가 그릇을 놓았다. 바닥에 남은 한 모금은 끝내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손을 더 기울이면 물이 목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루카가 먼저 일어났다.
두 사람은 실버드를 마을에 두었다. 북쪽 곶으로 가는 길은 얼어붙은 풀 사이로 이어졌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눈이 엷어지고 맨바위가 드러났다. 마르는 등에 멘 활을 한 번 고쳐 잡았다. 화살통에서는 두 발이 부딪쳤다.
앞서 걷던 루카가 멈췄다.
검은 옷자락이 바위 끝에서 흔들렸다. 남자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발 옆에는 낫이 놓여 있었다. 날끝이 바위에 닿아 있었고,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르는 그의 등을 향해 몇 걸음 더 갔다.
“사라는?”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너도 밖으로 나왔잖아. 사라가 보냈잖아. 그 뒤에 봤어?”
마왕의 옷자락이 다리에 감겼다가 풀렸다. 그는 한참 뒤에 고개를 조금 돌렸다.
“못 봤다.”
마르는 그에게서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사라가 아직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말해 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자신과 루카뿐은 아니었으면 했다. 누군가 한 걸음만 더 뒤의 일을 알고 있었으면 했다.

“그 애는 늘 남부터 내보냈지.”
마왕이 말했다.
마르는 다시 그를 보았다. 그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는 데 조금 걸렸다. 신전에서 만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루카가 바위 위로 올라섰다. 마왕과 몇 걸음 간격을 두었다.
“예언자로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가 완전히 돌아섰다. 바람에 드러난 이마와 뺨은 신전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말라 보였다. 마르는 낫에서 그의 손으로 눈을 옮겼다. 손가락은 펴져 있었다.
“쟈키.”
그는 그 이름을 짧게 말했다.
“그 아이를 기억하나?”
마르의 손이 활끈에서 떨어졌다.
푸른 머리카락을 한 아이. 다가가면 먼저 물러나던 발. 사라를 부르면서도 어른들이 있는 쪽은 보지 않던 얼굴. 그 아이를 떠올리는 동안 눈앞의 남자는 기다렸다.
“찾고 있어.”
그녀가 말했다.
“알게티에서 보슈와 함께 사라졌대.”
마왕의 눈이 잠깐 움직였다. 놀랐는지, 무엇을 확인했는지 마르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그 아이였다.”
루카의 발밑에서 작은 돌이 굴렀다. 마르는 소리가 난 쪽을 보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에서 아이의 얼굴을 찾으려 했으나 귀도 눈매도 쉽게 겹쳐지지 않았다. 닮은 곳을 찾아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기억난 것은 사라에게 시선을 들던 순간이었다. 신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마왕이 그녀를 보고 입을 다문 순간.
“쟈키가…… 너라고?”
그는 대답 대신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기억하는 날에는 신전이었다. 바닥에 구멍이 열렸고, 현자들이 사라졌다. 누나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누나.
마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만은 아이에게서 들었을 때와 같은 자리를 찔렀다.
마왕은 손을 들지 않았다. 바다를 본 채 말을 이었다.
“닿기 전에 내가 빨려 들어갔다. 깨어난 곳에는 숲이 있었다. 아는 나무도, 아는 길도 없었지. 돌아갈 문은 닫혀 있었다.”
루카가 안경을 고쳤다.
“우리가 만난 쟈키는 알게티에 남았어. 사라가 보슈에게 맡겼고.”
“그건 너희가 본 날이다.”
루카는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마르도 그 말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었다. 쟈키가 사라진 자리에 어른이 되어 돌아온 사람은 서 있었지만, 아이를 어디로 찾으러 가야 하는지는 더 알 수 없어졌다.
“네가 떨어진 숲이 어디였는데?”
루카가 물었다.
“너희가 내 성에 오기 훨씬 전의 마족 땅. 그곳에서 비네거를 만났다.”
마르는 성의 계단을 떠올렸다. 적들이 가득했던 복도, 닫히는 문들. 그 안에 쟈키를 놓아 보려다 그만두었다. 아이가 자랐다는 말로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라보스를 불러내려고 한 거야?”
“죽이려고 했다.”
마왕이 말했다.
“내가 만들어 낸 것도, 내가 섬기는 것도 아니다.”
루카가 고개를 들었다. 마왕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밤에 소환이 끝났다면 마주할 수 있었다. 너희가 끼어들었고 문이 뒤틀렸지. 나는 이 시대로 돌아왔다.”
마르는 그의 말에서 자기들을 탓하는 부분보다 끝부분에 걸렸다. 이 시대로 돌아왔다. 사라가 있고 쟈키가 아직 아이인 곳으로. 그가 후드를 쓴 채 궁전을 걸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닫혀 있던 문 하나가 뒤늦게 열리는 것 같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니까 예언자가 될 수 있었어.”
루카의 말에 마왕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발 옆의 낫을 집어 들었다. 마르의 어깨가 굳었다. 그러나 날은 자신들 쪽으로 오지 않았다. 마왕은 자루를 바위에 세우고 손을 그 위에 얹었다.
“라보스는 그 준비까지 가져갔다.”
신전에서 그의 팔을 잡아 늘이던 어둠이 떠올랐다. 마르는 자신도 그가 성공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가 죽이려던 것 앞에 크로노가 섰고, 그 뒤에는 쓰러진 사람들이 있었다.
마왕의 시선이 마르의 얼굴을 지나갔다.
“그 녀석도 힘을 헤아리지 못했지. 감당할 수 없는 상대에게 나서면 그렇게 된다.”
마르는 한 걸음 다가갔다.
“그만해.”
마왕은 말을 멈췄지만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는 더 가까이 갔다. 루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발밑의 바위가 젖어 있었다.
“넌 누워 있었어.”
마르는 천천히 말했다. 빨리 말하면 숨이 끊길 것 같았다.
“우리가 다 누워 있었어. 크로노가 선 자리는 네 앞이기도 했어.”
낫을 쥔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감당 못 했다고?”
마왕이 자루를 바위에서 들었다. 얇은 날이 비스듬히 하늘을 가렸다.
“싸우겠나?”
마르는 활을 잡았다. 나무의 굽은 부분이 손에 익었다. 등 뒤에는 두 발이 남아 있었다. 하나를 꺼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얼굴을 겨눌지, 가슴을 겨눌지도 정할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이 활에서 떨어졌다.
“아니.”

그 말을 하고 나서도 화는 줄지 않았다. 손바닥 안쪽에 손톱을 눌렀다.
“널 죽이면 크로노가 돌아와?”
마왕은 답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은 안 해.”
루카가 옆으로 와 섰다. 그녀도 총을 뽑지 않았다. 다만 마르보다 반걸음 앞에 서서 마왕을 보았다.
“네 얘기는 들었어. 카에루에게도 네가 직접 해.”
마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루카는 돌아섰다. 마르는 그녀의 발자국 옆으로 발을 놓았다. 등을 보이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다시 활을 잡으면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바위턱을 내려갈 때 뒤에서 목소리가 왔다.
“시간을 다루는 현자를 찾아라.”
루카가 먼저 멈췄다.
“뭐?”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길이 있다면 그가 알 것이다.”
마르는 발을 올렸던 돌에서 다시 내려왔다. 급히 돌아서는 바람에 화살 두 발이 부딪쳤다.
“크로노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이야?”
“나는 모른다.”
그 말이 너무 빨라서 마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물어라.”
“어디 있는데?”
“쟈키와 함께 현자들도 흩어졌다. 보슈는 너희가 찾았고, 하늘을 나는 배를 보니 가슈의 흔적도 찾았겠지. 시간의 현자는 가스파다.”
루카가 마르를 보았다. 마르는 어둠 속의 작은 불빛을 생각했다. 난간에 기댄 노인. 어느 시대에서 돌아와도 늘 거기에 있던 사람.
아직 이름이 맞는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물어볼 곳이 생겼다.
마왕이 낫을 거두고 걸어왔다. 루카의 손이 허리로 갔다.
“같이 가지.”
“우릴 도우려고?”
그는 루카를 지나 마르를 보았다.
“라보스는 살아 있다.”
루카는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마르가 그녀의 팔에 손을 대었다. 둘은 잠깐 마주 보았다. 마르는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루카도 그런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세 사람은 떨어져 걸었다. 마왕은 앞서지도 나란히 서지도 않았다. 마르는 가끔 돌아보았고, 돌아볼 때마다 같은 간격으로 검은 옷자락이 따라오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한 아이가 실버드의 날개를 만지려다 어른에게 손을 잡혔다. 루카가 조종석으로 올라가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마르는 뒤쪽 좌석에 앉았다. 마왕은 남은 자리 앞에서 잠깐 멈췄다.
마르는 그 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가 앉았다. 긴 자루가 좌석 옆에 눕혀졌다. 마르는 자기 무릎에 놓인 활을 들어 창 쪽으로 옮겼다. 자루와 닿지 않게 했다.
루카가 덮개를 닫았다. 실버드는 이번에는 한 번에 땅을 떠났다. 마을의 불빛이 낮아지고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먼 곳에서 수면이 솟았다.
처음에는 파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 위로 드러난 검은 모서리는 다시 내려가지 않았다. 바닷물이 벽을 타고 쏟아졌다. 그 뒤로 또 다른 벽과 높은 탑이 나왔다. 루카가 조종간을 당겼다. 실버드가 떠오르는 거대한 건물에서 멀어졌다.
마르는 두 손을 창에 댔다.
그들은 저 아래에서 나왔다. 무너지는 바닥, 마신기의 빛, 사라가 서 있던 자리가 저 안에 있었다. 물이 건물 아래로 떨어졌다. 드러난 밑바닥이 수면에서 떨어져 올라갔다.
해저 신전이 공중에 떠 있었다.
마왕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손이 창 아래를 눌렀다.
“검은 꿈…….”

마르는 그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묻지 않았다. 건물 위의 빛이 짙어졌고, 낮은 구름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 안에서 누가 살아 있는지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루카의 손이 시간 조절 장치 앞에서 멈췄다.
마르는 떠 있는 신전과 루카를 번갈아 보았다. 다시 들어가자고 하면 루카는 무엇부터 말할까. 사라의 이름일까, 그곳에서 일어난 일일까.
“노인에게 가자.”
마르가 말했다.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은 창에서 손을 뗐다.
창밖의 빛이 길게 늘어났다. 마르는 활을 무릎 위로 되돌렸다. 실버드가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옆자리의 낯선 옷자락이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그녀는 손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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