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59화] 대답이 없는 자리

루카는 크로노의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안경 한쪽이 비뚤어져 있었다. 손을 올려 고치자 렌즈 너머로 그의 등이 보였다. 라보스 앞까지 걸어갈 필요는 없었다. 저 거리에서도 번개를 쓸 수 있었다. 멈추라고 말하려는데 입 안에 고인 쓴맛 때문에 먼저 기침이 나왔다.

마르가 기어가고 있었다. 한 손으로 바닥을 밀고 다른 손을 앞으로 뻗었다. 루카는 그녀의 어깨를 지나 크로노를 보았다. 그가 어디에 서려는지 그제야 알았다. 뒤에는 마르와 자신이 있었고, 조금 옆에는 사라와 쓰러진 마왕이 있었다.

라보스의 빛이 넓어졌다. 크로노가 그 앞에서 두 팔을 들었다.

“크로노, 피해!”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왔다. 크로노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얀빛이 그를 삼켰다. 그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루카는 얼굴을 가리려던 손을 내렸다. 눈을 감으면 그가 있는 자리를 놓칠 것 같았다. 앞으로 내민 팔과 붉은 머리, 허리에 매달린 칼집이 빛 가운데 있었다.

그 윤곽이 풀리기 시작했다.

루카는 마법을 모았다. 무엇을 하려는지도 정하지 못한 채 불을 불렀다. 손끝에 작은 열이 생겼다가 꺼졌다. 크로노가 서 있던 자리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마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빛이 거두어졌을 때 루카는 몸이 떨어지는 소리를 기다렸다. 누군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라면, 신음이라면, 거기까지 기어가면 되었다. 천을 찢고 마르에게 손을 얹게 하고 숨이 돌아오는지 살피면 되었다.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빈 바닥 위로 작은 빛 몇 개가 흩어졌다. 마르는 그곳까지 가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빛 하나가 지나가더니 사라졌다. 그녀가 손을 뒤집고 다시 펼쳤다. 루카는 그 동작을 멈추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라보스가 다시 울었다.

바닥의 균열이 사라 쪽으로 번졌다. 사라는 마왕의 어깨를 놓고 일어섰다. 입술이 움직였고 목에 걸린 보석에서 빛이 났다. 여왕의 모습은 더 짙어진 빛 너머로 가려졌다. 루카는 사라가 누구를 보며 말하는지 듣기 위해 몸을 당겼다.

“남은 힘으로 밖에 보내 드릴게요.”

마르가 돌아보았다.

“아직 안 돼요.”

그녀는 다시 빈 곳을 더듬었다. 루카도 그곳을 보았다. 크로노의 칼도, 옷도 없었다. 무엇 하나 주워 들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손은 바닥을 짚고 앞으로 갔다.

사라가 두 사람 가까이 왔다. 보석의 빛이 아래에서 얼굴을 비췄다. 그녀는 마르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굽혀 곁에 앉았다.

“여기 있으면 두 분도 죽어요.”

마르가 고개를 저었다. 입을 벌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사라는 그녀의 손을 잡아 루카의 손 위에 놓았다. 그 손등이 떨리고 있었다. 마신기 앞에서 힘이 빠졌을 때와는 다른 떨림이었다.

루카가 물었다.

“당신은요?”

사라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보석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빛이 세 사람의 발밑으로 번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진 마왕에게까지 닿았다. 루카는 그 빛이 닿는 끝과 사라의 발을 번갈아 보았다.

“같이 가요.”

사라가 눈을 들었다. 루카는 손을 내밀었다. 사라가 그 손을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

“미안해요.”

남은 목걸이의 힘으로 일행을 보내려는 사라 - RPG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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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손가락이 공기를 움켜쥐었다. 사라는 같은 거리에 있는 것 같았지만 닿지 않았다. 마르가 몸을 비틀어 크로노가 있던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루카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붙든 손을 통해 마르가 얼마나 세게 당기는지 느꼈다.

다른 손으로 바닥을 짚으려는 순간 바닥이 없어졌다.

*

짠물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루카는 기침하며 몸을 세웠다. 팔 아래로 작은 돌들이 밀렸다. 손을 펴자 젖은 모래가 붙어 있었다. 어둠 대신 하늘이 있었다. 마르가 곁에 엎드려 있었다. 손은 여전히 잡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흔들자 숨이 터져 나왔다. 마르는 기침을 하면서도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카는 그 얼굴을 보고 먼저 말했다.

“여기야. 나 여기 있어.”

마르는 듣고도 다른 쪽을 보았다. 루카도 함께 둘러보았다. 젖은 바위와 부서진 나뭇가지가 있었고, 멀리 사람들이 달리고 있었다. 사라와 마왕은 보이지 않았다. 크로노를 부를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멎었다.

땅이 흔들렸다.

바다에서 물기둥이 치솟았다. 루카는 마르를 붙들고 몸을 낮췄다. 굉음이 해변을 덮었다. 수면 위로 솟은 가시들을 알아보자 온몸의 힘이 다시 빠지는 듯했다. 저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따져 볼 시간은 없었다. 라보스가 해변보다 높이 몸을 드러냈다.

하늘을 향해 빛이 뻗었다.

멀리 떠 있던 땅의 가장자리가 환해졌다. 나무가 자라던 곳, 사람들이 찻잔을 싸서 걸어 나오던 길, 루카가 꽃을 본 땅이었다. 대륙의 한쪽이 기울었다. 작게 보이던 집들이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빛의 공격을 받는 하늘의 질 왕국 - RPG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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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가 루카의 팔을 잡아당겼다.

“올라가야 해.”

루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의 풍경이 아직 이해되지 않았다. 땅은 아래에 있어야 했다. 저 큰 것이 떨어지면 그 밑의 물은 어디로 가는가. 질문을 끝내기 전에 바다의 수평선이 부풀었다.

마르가 먼저 일어나 그녀를 끌었다. 루카도 무릎을 펴고 뛰었다. 신발 안의 물 때문에 발이 무거웠다. 가방이 등에 부딪쳤으나 버릴 손이 없었다. 마르의 손을 놓으면 다시 못 찾을 것 같았다.

위쪽 비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한 남자가 바위를 붙잡고 다른 손을 뻗었다. 마르가 그 손을 잡았다. 루카는 마르를 밀어 올린 뒤 바위 틈을 디뎠다. 어깨를 붙잡는 손이 하나 더 왔다.

“계속 올라가!”

등 뒤에서 물이 바위를 때렸다. 루카는 돌아보지 않고 비탈을 기어올랐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밀려오면서 좁은 길에 몸이 겹쳤다. 누군가 넘어진 아이를 안아 들었다. 또 다른 사람은 손에 든 상자를 놓고 앞사람의 허리를 밀었다.

높은 바위턱에 이르렀을 때 하늘의 땅이 바다에 닿았다.

루카는 그 소리를 끝까지 듣지 못했다. 공기가 먼저 등을 때렸고 귀 안에서 가느다란 울림만 남았다. 사람들의 입이 움직였다. 마르가 바로 옆에서 무엇인가 말했다. 루카는 고개를 숙이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그녀와 함께 바위 뒤에 몸을 눕혔다.

물보라가 쏟아졌다. 달리는 사람들의 발과 버려진 짐이 시야를 스쳤다. 루카는 눈을 감고 마르의 손을 당겼다. 두 팔을 몸 아래로 넣은 채, 이번에도 놓치지 않았는지 손가락으로 확인했다.

*

불이 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에는 알게티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낮은 천장과 연기 냄새, 서로 가까이 누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벽은 돌이 아니라 천과 나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틈이 벌어져 잿빛 하늘이 보였다.

루카는 손부터 들었다. 손바닥에 모래가 붙어 있었다. 누군가 대충 씻어 준 흔적이 있었지만 손금 사이에는 남아 있었다. 오른쪽에서 마르가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는 붙잡은 손이 없었다. 대신 같은 담요가 덮여 있었다.

“깼구나.”

노인이 물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루카는 곁에 놓인 안경을 썼다. 노인의 얼굴과 그 뒤의 불이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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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그녀가 묻다가 기침했다. 노인은 그릇을 먼저 주었다.

“계속 잠들어 있었어. 데려왔을 때보다 숨은 편해졌구나.”

마르는 물을 받지 않고 문 쪽을 보았다.

“같이 온 사람은요?”

노인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루카는 질문을 고쳐 주지 않았다. 자기 입으로 그 이름을 말하면 남이 답을 내놓을 것이 두려웠다.

“해변에서 너희 둘을 올려 보낸 사람들이 있었지. 찾는 사람이 있느냐?”

마르가 입을 다물었다. 루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머리예요. 우리 나이쯤 되고.”

노인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본 적 없다는 말이었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루카는 그 차이를 붙들고 물을 마셨다.

마르가 담요를 걷었다. 신발을 신으려다가 발의 위치를 잘못 짚었다. 루카가 부츠를 바로 놓아 주었다. 마르는 고맙다는 말 없이 끈을 당겼고, 루카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둘은 거의 동시에 일어섰다.

문밖으로 나가자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하늘이 비어 있었다.

구름 뒤에 가려진 것이 아니었다. 루카는 어제 걸었던 길의 방향을 찾으려 고개를 움직였다. 더는 빛의 기둥도, 땅의 그림자도 없었다. 시야 끝에서 끝까지 바다와 낮은 구름뿐이었다.

그 아래 사람들이 천막을 세우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온 옷을 입은 여자가 젖은 천을 짰고, 알게티의 사람과 닮은 남자가 그 옆에서 나무를 깎았다. 어느 쪽도 상대를 비켜 세우지 않았다. 아이 하나가 둘 사이에서 못이 든 그릇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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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는 해변으로 몇 걸음 갔다가 멈췄다. 물에 떠온 물건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깨진 그릇, 낯선 외투, 바퀴 없는 작은 수레. 그녀는 하나씩 보았고 루카도 옆에서 보았다. 붉은 천 조각이 눈에 띌 때마다 둘의 걸음이 동시에 멎었다.

끝까지 가도 찾는 것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갈까?”

루카가 물었다. 마르는 바다를 본 채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루카는 더 묻지 않았다. 친구의 목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펜던트가 없었다. 말하려다 손을 내리고 마르를 보았다. 그녀도 손을 목에 대고 있었다.

둘은 한동안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파도가 들어왔다가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신전의 바닥을 더듬던 손에 이제는 찬 바람이 닿았다.

루카는 해변에 흩어진 것을 다시 살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 크로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제야 문장처럼 떠올랐다. 급히 다른 생각을 찾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같은 장면뿐이었다.

“마르.”

친구가 돌아보았다. 루카는 크로노가 없다고 말하려 했다. 입이 열리자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집에 가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문을 열고 아들을 찾을 것이다. 루카가 혼자 들어오면 뒤를 볼 것이다. 늘 그랬듯 조금 늦게 크로노가 들어오는 줄 알고.

마르가 루카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어디로 끌지도, 놓지 않겠다고 힘을 주지도 않았다. 루카는 그 곁에 선 채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손등에 떨어질 때까지, 누구도 다음에 갈 곳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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