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58화] 부서진 예언
문을 미는 순간 마르의 펜던트가 가슴을 때렸다.
목걸이가 저절로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석을 움켜쥔 채 방 안으로 들어섰다. 높은 단 위에 마신기가 놓여 있었다. 왕궁에서 보았을 때보다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빛이 강했다. 그 앞에 선 사라는 한 손으로 장치의 가장자리를 짚고 있었다.

“사라!”
그녀가 돌아보았다. 놀라 입을 여는 동안 무릎이 굽혀졌다. 마르가 뛰어가려는데 바닥을 가로지르는 빛이 눈앞으로 솟았다. 뜨거운 기운에 발이 멎었다. 사라가 손을 들어 더 오지 말라는 뜻을 보였다.
여왕은 그 뒤의 높은 자리에 서 있었다. 딸이 쓰러질 듯 장치에 매달려 있어도 시선은 마신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예언자는 한쪽 벽 가까이에 있었다. 후드 아래에서 드러난 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여왕이 말했다.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손을 거두려 했지만 빛의 줄이 손목을 붙들듯 따라왔다. 마르는 무엇이 그녀를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손가락이 펴졌다가 다시 굽는 것을 보았다. 붙잡고 싶은 손의 모양은 아니었다.
“이미 너무 많아요. 이대로는 모두—”
“두려워할 필요 없다.”
여왕의 말은 딸에게 닿기 전에 마신기의 울림에 섞였다. 그녀는 오히려 앞으로 다가갔다. 바닥의 붉은 선이 치마 아래까지 번졌다.
마르는 활을 들었다가 내렸다. 여왕을 쓰러뜨리면 사라가 벗어날 수 있을까. 화살을 쏘는 순간 사라에게 무엇이 닥칠지 몰랐다. 대신 장치 옆으로 돌아갈 길을 살폈다. 크로노는 이미 반대편 계단 아래에 있었다. 붉은 나이프의 천을 풀면서 그녀를 보았다.
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사라에게 가겠다는 뜻으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크로노가 짧게 턱을 당겼다.
루카가 낮은 난간 뒤에 몸을 숙였다. 빛이 흐르는 틈과 사람이 디딜 수 있는 바닥을 번갈아 보더니 마르를 불렀다.
“벽 쪽으로. 가운데는 건너지 마.”
말이 끝나기 전에 마르가 움직였다. 보석을 옷 속으로 밀어 넣고 난간을 따라 달렸다. 여왕이 그쪽을 돌아보는 동안 크로노는 짧은 계단을 올랐다. 그의 손에서 드러난 붉은 날이 방 안의 빛을 받아 길게 빛났다.
예언자가 벽에서 몸을 뗐다.
마르는 그가 막으러 올 줄 알았다. 그러나 후드를 쓴 남자는 크로노를 지나 마신기를 보았다. 그 침묵이 이상했지만 물을 시간이 없었다. 사라가 마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두 손 사이에는 낮은 단 하나가 남아 있었다.
“여기서 나가요.”
마르가 말했다.
사라는 대답 대신 크로노를 보았다. 붉은 날이 마신기의 몸체에 닿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금속음이 났다. 크로노가 한 발을 앞으로 딛고 나이프를 밀어 넣었다. 돌처럼 보이던 표면에 붉은 선이 번지더니 손잡이까지 빛으로 덮였다. 날은 박힌 자리에서 더 길어졌다. 그의 손이 붙들 수 없는 크기가 되자 크로노가 손가락을 놓고 물러섰다.
마르가 숨을 삼켰다. 짧은 칼이 있던 자리에 검이 있었다. 데나도로 산에서 보았던, 카에루에게 돌아간 바로 그 형태였다. 그란과 리온의 얼굴을 떠올릴 새도 없이 검을 중심으로 빛이 한꺼번에 빨려들었다.

마신기 위쪽에 균열이 났다.
사라의 손목을 감싸던 빛이 풀렸다. 마르는 단을 뛰어올라 그녀를 받았다. 사라의 손이 놀랄 만큼 차가웠다. 여왕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루카가 계단에 올라오며 크로노의 팔을 당겼다. 마신기에서 터진 빛이 천장으로 치솟았다. 바닥의 선들이 한꺼번에 꺼졌다. 마르는 사라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울림이 멎었다.
딱 한 번의 숨을 쉬는 동안이었다. 마르는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사라의 호흡을 들었다. 살아 있었다. 자기 팔 안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제 걸어 나가면 될 것 같았다.
그때 바닥 아래에서 다른 소리가 났다.
기계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돌을 타고 오는 것도 아니었다. 마르의 가슴 안쪽을 직접 흔드는 낮은 울음이었다. 꺼졌던 선들이 반대 방향으로 켜졌다. 균열에서 솟는 빛이 마신기의 크기를 넘어 방 전체를 채웠다.
“뒤로!”
루카가 외쳤다. 마르는 사라를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발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계단이 기울어진 것도 아닌데 몸이 앞으로 쏠렸다. 크로노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세 사람이 가까워지는 동안 사라의 모습이 빛 너머로 흐려졌다.
마르는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뻗었다. 손끝에 옷감이 닿았다가 빠져나갔다.
방의 벽이 사라졌다.
별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표면이 솟아 있었다. 바위라고 생각한 것이 움직였다. 길고 굵은 가시 아래로 겹겹의 껍질이 드러났고, 그 가운데 입처럼 벌어진 틈에서 빛이 고였다. 마르는 크기를 가늠하려 고개를 들었다가 그만두었다. 올려다본 만큼 더 많은 것이 보일 뿐 끝은 보이지 않았다.
라보스였다.
아리스 돔의 기록 속에서 하늘을 붉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때에는 화면을 끌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눈을 감아도 낮은 울음이 뼈 안에 남았다.
크로노가 검을 뽑았다. 붉은 나이프에서 변한 검은 그의 손에 없었다. 보슈에게서 받은 짧은 검이 익숙한 높이로 들렸다. 마르는 활에 화살을 걸었다. 루카가 조금 떨어져 섰다. 셋은 방금 골렘을 상대할 때처럼 거리를 벌렸다.
먼저 빛난 것은 라보스의 안쪽이었다.
마르는 화살을 놓았다. 돌촉이 어둠을 가로질러 껍질에 부딪쳤지만 그 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크로노의 번개와 루카의 불이 거의 같은 순간에 터졌다. 거대한 표면을 잠깐 비췄다가 사라졌다. 갈라진 곳도, 물러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빛이 그들에게 왔다.
피할 방향을 고를 틈은 없었다. 바닥에서 올라온 충격에 마르의 발이 들렸다. 활을 끌어안은 채 어깨부터 땅에 닿았다.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숨이 나오지 않았다. 뜨거움 다음에 차가움이, 그다음에는 몸이 어디까지 있는지 모르는 감각이 왔다.
얼마 뒤 손바닥 아래의 바닥을 느꼈다. 손가락 하나를 굽히는 데 힘이 들었다. 마르는 팔을 당겨 몸을 돌렸다. 루카의 안경에 빛이 비쳤다. 그녀는 옆으로 쓰러진 채 숨을 쉬고 있었다. 조금 더 먼 곳에서 크로노가 팔꿈치를 세우려 했다.
마르는 회복의 온기를 모았다. 손바닥이 희미하게 밝아지다 꺼졌다. 다시 하려 했지만 숨이 가빠졌다.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보내려 크로노에게 손을 뻗었다.
그들 사이로 옷자락이 지나갔다.
예언자가 라보스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쓰러진 사람들을 살피지 않았다. 두 손으로 후드를 뒤로 젖히고 외투를 벗어 던졌다. 창백한 머리카락과 길게 솟은 귀가 드러났다.
마르는 입을 열었으나 이름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다른 시대의 성, 어둠 속의 제단, 그곳에서 맞섰던 얼굴이 눈앞의 얼굴과 겹쳤다.
“마왕…….”
루카가 먼저 말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라보스를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처음 마주했을 때의 여유가 없었다. 입술을 벌려 숨을 들이켜는 모습까지 마르는 보았다.
“이번에는 끝내겠다.”
낫이 그의 손에서 움직였다. 마르는 그가 자신들을 베러 올 때 보았던 검은 기운을 기억했다. 지금은 그것보다 짙은 어둠이 라보스 앞에 모이고 있었다. 공기가 눌리며 귀가 먹먹해졌다. 크로노도 몸을 세우다 멈추고 그쪽을 보았다.
마왕이 팔을 내렸다. 어둠이 거대한 껍질을 덮었다.

마르는 적의 공격이 닿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기에게 칼을 겨누던 사람을 보면서, 그가 이번에는 성공하기를 바랐다. 라보스가 잠깐이라도 물러난다면 루카를 일으킬 수 있었다. 크로노와 함께 사라를 찾으러 갈 수 있었다.
검은빛이 안쪽으로 휘었다.
마왕의 팔이 끌려 올라갔다. 자신이 보낸 힘을 거두는 동작이 아니었다. 손끝과 어깨에서 기운이 뜯겨나가 거대한 틈으로 흘렀다. 그는 한쪽 발을 뒤로 놓고 버텼지만 발밑에 긴 자국이 났다. 낫을 지탱하던 손이 내려갔다.
“그만해!”
사라의 목소리였다.
마르가 고개를 돌렸다. 어둠 저편에서 사라가 달려왔다. 여왕도 그 뒤에 있었으나 딸을 따라오는 걸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라보스의 빛 속에 서서 마왕을 내려다보았다.
사라가 마왕에게 닿기 전에 그의 몸이 뒤로 튕겼다. 낫이 바닥을 긁으며 멀어졌다. 그는 마르와 라보스 사이에 쓰러졌다. 옆으로 돌아 일어나려 했으나 팔이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여왕의 웃음이 들렸다. 마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사라가 마왕 곁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왜 그에게 손을 뻗는지, 왜 그가 사라를 보자 입을 다무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알아야 할 것은 그들도 일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마르는 다시 온기를 모았다. 자기 손목에서 시작한 빛이 손바닥을 겨우 채웠다. 그것을 루카에게 보내자 친구의 어깨가 조금 움직였다. 한 번으로는 모자랐다. 그녀는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모았다.
“마르.”
크로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가까이 와 있었다.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그녀가 있는 곳과 루카를 번갈아 보았다. 마르는 손을 내밀었다. 붙잡아 함께 일어나자는 뜻이었다.
크로노가 그 손을 잠깐 잡았다. 손끝은 따뜻했다. 그는 마르의 손을 루카 쪽으로 옮겨 놓고 자기 손을 뺐다.
“같이 있어.”
그는 검을 짚지 않고 일어섰다. 처음에는 무릎이 펴지지 않았으나 한 번 더 힘을 주자 몸이 올라갔다. 마르는 그의 옷자락을 붙들려다 놓쳤다. 크로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다시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돌아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보스 안쪽에 다시 빛이 모이고 있었다. 크로노는 그 앞을 향해 걸었다. 마르의 손은 아직 그가 있던 높이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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