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57화] 서로 다른 두 번의 불꽃
계단 끝에서 그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로노는 마지막 몇 칸을 내려가다 멈췄다. 데나도로 산에서 보았던 얼굴이었다. 그때는 동굴을 울리며 웃었지만 지금은 벽을 짚고 서 있었다. 손바닥 아래의 돌이 떨릴 때마다 작은 손가락도 함께 움직였다.
“위에서 리온을 만났지?”
크로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란은 그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붉은 나이프를 감싼 천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새고 있었다. 크로노는 매듭을 풀어 날을 보였다.
“보슈의 마음이 들어 있어.”
그란이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닿기 전에 붉은빛이 그의 손가락을 비췄다.
“돌만으로는 이렇게 되지 않아. 만든 사람이 무엇을 바랐는지도 남거든.”
루카가 크로노의 옆으로 왔다. 산에서 부러진 검을 건네받을 때와 달리, 이곳의 그란은 그들을 처음 보는 눈이었다. 그녀는 아는 얼굴이라는 이유로 지난 일을 묻지 않았다.
“마신기에 쓰면 그 마음대로 멈출까?”
“힘이 너무 많이 모였어. 서둘러야 해.”
그란은 마르의 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옷 밖으로 나온 펜던트가 나이프와 같은 박자로 빛났다. 마르가 보석을 쥐자 손가락 사이의 붉은빛이 짙어졌다.
“그것도 같은 돌이야.”
보슈의 나이프, 사라의 목걸이, 자기에게 전해진 펜던트. 마르는 셋을 묶어 생각하다가 손을 놓았다. 지금 그 답을 붙잡으려 하면 사라에게 가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안쪽까지 갈게.”
그란은 비켜섰다. 크로노가 지나갈 때 작은 형체가 한 번 흐려졌다. 돌아보니 계단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붉은 날을 감싸자 빛도 천 안으로 숨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묶고 앞의 판으로 올라섰다.
승강장은 세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서도 남을 만큼 넓었다. 가장자리에는 허리 높이의 턱만 있었고, 맞은편 벽의 홈이 어둠 속으로 곧게 내려갔다. 루카가 왼쪽의 빛나는 부분을 눌렀다. 판이 짧게 들썩이더니 바닥 전체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이 눈높이 위로 사라졌다. 마르는 턱 안쪽으로 물러섰다. 위에서 마찰음이 났다.
크로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긴 팔을 가진 적 하나가 벽에서 몸을 떼었다. 그는 떨어질 자리를 피해 앞으로 뛰었다. 무게를 받은 판이 기울면서 마르의 발이 미끄러졌다. 루카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안쪽으로 당겼다. 적이 몸을 펴기 전에 크로노의 검이 어깨 아래를 지나갔다.
반대편에도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마르는 활을 메고 두 손을 폈다. 푸른 수호자의 발부터 냉기가 올라갔다. 막힌 동작 사이로 몸이 갈라지는 동안 크로노는 벽 가까이 붙어 다음 적을 기다렸다. 판 한가운데에서 싸우면 떨어져 내리는 것들에 둘러싸일 터였다.
“등은 이쪽에 붙여.”
루카가 마르를 불렀다. 둘은 벽을 뒤로 두고 자리를 좁혔다. 크로노가 앞을 막는 동안 불과 냉기가 번갈아 뻗었다. 내려오는 적들은 저마다 색이 달랐으나 떨어져 착지하는 순간만큼은 모두 움직임이 끊겼다. 셋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적이 턱 밖으로 넘어갔을 때 크로노는 검을 거두었다. 아래를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승강장이 멎었고, 닫혀 있던 벽이 양옆으로 열렸다. 다시 걸을 수 있는 길이 나타났다.
하층의 통로는 깊은 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끊어져 있었다. 양옆 방에서 빛의 줄이 나왔고, 발밑에는 위층에서 본 것과 비슷한 판이 있었다. 루카가 바로 밟으려다 멈췄다. 정면을 가로막은 장치에 아직 두 개의 빛이 켜져 있었다.
“옆부터.”
그들은 오른쪽 방에 들어가 수호자를 물리치고 벽의 손잡이를 당겼다. 왼쪽에서도 같은 일을 하자 문밖의 소리가 달라졌다. 크로노가 가운데 판을 밟았다. 홈 아래에 잠겨 있던 좁은 다리가 올라와 맞은편에 걸렸다. 세 사람은 손잡이가 되돌아가는지 기다리는 대신 열린 길을 건넜다.

다리 끝에서 마르가 손을 들었다.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남은 네 발 가운데 하나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다가 그대로 두었다. 넓은 방 너머, 익숙한 장갑을 낀 손이 허공에 둥근 선을 긋고 있었다.
달톤은 그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다만 크로노의 걸음이 멀쩡한 것을 확인하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끈질기군.”
“사라는 어디 있어?” 마르가 물었다.
“너희가 걱정할 때는 지났어.”
그가 양손을 벌렸다. 방 양쪽에 빛의 구멍이 열리며 거대한 발이 하나씩 내려왔다. 이어서 돌처럼 두꺼운 몸과 작은 머리가 나타났다. 왕궁에서 보았던 골렘과 같은 생김새였다. 이번에는 둘이었다.
크로노는 검을 앞으로 세웠다. 왼쪽 골렘이 손을 들자 검은 구슬이 그 위에 맺혔다. 달톤이 쓰던 것과 닮아 있었다. 그는 옆으로 뛰었으나 구슬이 터뜨린 기운은 다리까지 훑었다. 마르가 그를 붙들려다 두 번째 구슬을 보고 몸을 낮췄다. 그것이 벽에서 터지자 손끝에 모으던 냉기가 흔들렸다.
달톤은 이미 안쪽 문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루카가 불꽃을 보내 그 문 앞을 막으려 했다. 오른쪽 골렘의 넓은 팔이 길을 가렸다. 불이 몸에 닿자 잿빛 표면 안쪽이 붉어졌다. 적은 달아오른 손을 들더니 방금 받은 것과 닮은 불덩이를 토했다.
루카가 급히 옆으로 구르며 외쳤다.
“받은 걸 돌려줘!”
왼쪽에서는 크로노의 번개가 터졌다. 골렘이 어깨를 젖히는가 싶더니 양팔 사이로 흰 줄기를 뿜었다. 번개가 바닥을 긁으며 마르의 발치까지 왔다. 그녀는 넘어지지 않으려 한 손을 짚고, 일어나는 김에 크로노에게 회복의 온기를 보냈다.
왕궁에서 상대했던 한 마리는 공격을 받고 바뀌었다. 이번에도 같았다. 다른 것은 둘이 서로 다른 것을 배웠다는 점이었다. 불을 피한 곳으로 번개가 뻗었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고 멈추면 검은 구슬이 몸의 힘을 훔쳤다.
크로노가 가운데로 파고들려 하자 루카가 팔을 내저었다.
“칼은 쓰지 마. 둘이 같이 받아치면 못 버텨.”
그는 내딛은 발을 옆으로 바꿨다. 오른쪽 골렘의 팔을 피하면서 마르에게 돌아갈 길을 확보했다.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달톤이 사라졌지만 돌아볼 틈은 없었다.
루카는 두 골렘을 한눈에 보려고 뒤로 물러났다. 왼쪽의 흰빛이 아직 남아 있었다. 오른쪽은 새 불꽃을 모으고 있었다. 처음에는 더 큰 불로 한꺼번에 덮고 싶었다. 손바닥을 벌렸다가 다시 좁혔다. 넓게 펼칠수록 힘이 모자랐다. 할 수 있는 크기로, 한 번씩 해야 했다.
“마르, 잠깐만 둘을 떨어뜨려 놔 줘.”
“얼릴까?”
“아니. 네 쪽으로 불이 가면 말해.”
마르는 설명을 더 요구하지 않았다. 오른쪽 골렘을 보며 비스듬히 움직였다. 루카는 왼쪽에 불을 보냈다. 흰 줄기가 끊기고 붉은빛이 몸속을 채웠다. 불덩이가 날아오자 그녀는 기둥의 돌출부 뒤로 몸을 틀었다. 열이 뺨을 스쳤다. 숨을 들이켜기 전에 크로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한 걸음 더 끌어냈다.
돌 표면이 검게 그을렸다. 루카는 몸을 확인할 틈도 없이 오른쪽 골렘을 겨눴다. 두 번째 불꽃을 보내자 그쪽도 같은 자세로 팔을 들었다.
이제 둘 다 불을 썼다. 그렇다고 쉬워지지는 않았다. 공격이 두 곳에서 왔고 피할 바닥은 좁아졌다. 다만 흰 줄기와 불덩이를 동시에 살피던 눈이 한 종류의 움직임을 좇을 수 있었다.

마르가 둘 사이의 간격을 가리켰다.
“오른쪽이 조금 늦어.”
크로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이 팔을 들 때 먼저 움직였다. 불덩이가 그의 뒤를 따라 터졌다. 오른쪽도 그를 겨누려고 몸을 돌렸고, 그사이 마르가 루카에게 다가가 손을 얹었다. 온기가 등으로 스미자 루카의 가쁜 호흡이 길어졌다.
“혼자 계속할 수 있어?”
“계속은 못 해. 하나부터 끝내자.”
그녀는 왼쪽 골렘의 가슴을 겨눴다. 불에 맞은 표면은 처음보다 깊게 패여 있었다. 공격을 흉내 내도 받은 손상까지 없어지지는 않았다. 루카는 그 자리에 불을 집중했다. 적의 팔이 올라올 때면 크로노가 먼저 자리를 바꾸었다. 마르는 뒤처진 사람에게 회복을 나누고 다음 피할 곳을 짧게 불렀다.
세 번째 공격 뒤 왼쪽 골렘이 무릎을 꿇었다. 큰 입이 벌어지자 크로노가 달톤의 마지막 공격을 떠올리고 손을 들었다. 탁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셋은 얼굴을 가리고 흩어졌으나 힘이 다시 빠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른쪽 골렘이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루카는 무릎을 세우지 못한 채 손을 뻗었다. 불꽃이 적의 가슴을 때렸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곁에서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마르가 자세를 낮추고 냉기를 모으고 있었다.
“바꿀게.”
마지막 한 마리였다. 크로노는 칼을 집어넣고 루카를 일으켰다. 골렘의 몸을 뒤덮은 붉은빛이 걷히며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루카와 함께 바닥의 하얘지는 부분에서 벗어났다. 마르는 피한 자리로 따라오지 않고, 적이 팔을 거두는 동안 한 번 더 냉기를 쏟았다.
골렘이 무너졌다. 마지막에 토해 낸 탁한 바람이 지나갈 때 마르는 활을 안고 웅크렸다. 크로노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어깨를 가렸다. 바람이 멎자 거대한 형체 둘이 빛의 구멍 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루카는 한동안 빈 바닥을 보고 있었다. 자기 손에서 나간 불을 남이 돌려주는 광경이 눈 안에 남아 있었다. 마르가 물주머니를 내밀자 받고도 바로 마시지 못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번개까지 맞았어.”
마르가 말했다. 루카는 물을 한 모금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에 답하려고 한 말보다 먼저 기침이 나왔다. 마르는 등을 두드리며 기다렸다. 크로노도 벽에 기대앉아 호흡을 고르는 동안 둘을 재촉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힘이 돌아오자 마르가 손을 차례로 잡았다. 길게 쉬어야 할 상처는 없었다. 마법을 쓰느라 식은 손이 따뜻해지고, 달톤이 사라진 문 너머의 울림이 다시 분명해졌다.
크로노가 일어났다. 루카는 물주머니를 돌려주며 방 한가운데를 보았다. 셋이 흩어져 달리던 바닥에 검은 자국과 서리가 뒤섞여 있었다. 여기에 시간을 더 두고 갈 이유는 없었다.
안쪽 문은 잠기지 않았다. 그들은 좁은 전실을 지나 다음 문 앞에서 멈췄다. 커다란 입을 가진 누 하나가 옆에 서 있었다. 미래의 가슈가 남긴 존재와 닮았으나 들고 있는 것도, 하는 일도 달랐다.
누는 셋의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루카는 말을 기다렸지만 그가 전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인 듯했다. 누가 천천히 몸을 비켰다.
문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두세요.”
마르는 누를 지나 곧바로 문에 손을 댔다. 사라의 목소리를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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