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56화] 바다 아래의 빛

작은 형체가 크로노를 보더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산 위에서 형제와 함께 길을 막았던 얼굴을 크로노는 기억했다. 지금 카에루가 지닌 검에 깃든 존재가, 훨씬 오래전 바다 아래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로노는 이름을 부르려다 멈췄다. 상대는 인사보다 먼저 붉은 나이프 쪽을 보았다.

“그걸 가져왔네.”

“보슈가 줬어.”

작은 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쪽 바닥을 따라 흰 빛이 한 번 흘렀다. 벽 속에서 둔한 울림이 일어나자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너무 많이 끌어 올리고 있어. 이대로 두면 깨어날 거야.”

크로노는 발밑을 보았다. 아래에는 바다가 있고, 바다 밑의 땅이 있을 것이다. 그 깊이를 눈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밑창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은 알게티에서 보슈가 그린 선보다 분명했다.

“어디로 가야 해?”

작은 손이 문 너머를 가리켰다. 크로노가 한 걸음 움직였을 때에는 형체가 옅어지고 있었다. 루카가 말을 걸려 했지만 마지막 윤곽은 빛에 섞여 사라졌다. 그녀는 빈 곳에 손을 뻗지 않고 크로노를 보았다.

“아는 사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에 있던 형제야.”

루카의 눈이 붉은 나이프로 내려갔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보였으나 그녀는 출구 쪽을 먼저 확인했다. 마르도 말없이 활을 고쳐 쥐었다. 셋은 문을 지나 신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크로노가 예상한 바다 냄새는 나지 않았다. 돌벽은 말라 있었고 바닥도 미끄럽지 않았다. 천장이 높은 넓은 방 아래로 층층이 길이 이어져 있었다. 기둥 사이의 빈 곳에는 물 대신 짙은 어둠이 고여 있었다. 빛나는 선이 벽을 따라 내려가다가 다음 층의 문으로 들어갔다.

빛나는 흐름 사이로 이어진 해저 신전의 길 - Vorxu
빛나는 흐름 사이로 이어진 해저 신전의 길 - Vorxu

처음에는 모두 장식처럼 보였다. 잠시 멈춰 보고 나니 빛이 흐르는 방향이 일정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줄과 아래에서 솟는 줄이 나뉘었다. 루카가 가까운 벽에 손을 대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계속 움직이고 있어.”

멀리서 발소리가 났다. 크로노는 오른쪽 통로를 보았다. 사람과 비슷한 키의 형체가 기둥 뒤에서 나왔다. 몸을 덮은 빛은 푸른색이었다. 그 뒤로 붉은 형체와 더 옅은 색의 형체가 나타났다. 같은 폭의 길에 나란히 서자 사람 셋이 통과할 여유가 없어졌다.

크로노는 칼을 뽑았다. 적은 말을 걸지 않았다. 푸른 형체가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크로노가 옆으로 비키며 날을 넣었지만 단단한 표면을 스치는 감각만 돌아왔다.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무리하게 밀지 않고 칼을 거두었다.

등 뒤에서 마르의 냉기가 뻗었다.

푸른 표면이 갈라졌다. 적이 크게 움츠러들었다. 크로노는 조금 놀라 그 틈을 보았다. 짐승의 둥지에서 푸른 짐승에게 냉기를 썼을 때와 반대였다. 그는 달려들려던 방향을 바꾸어 옆의 옅은 형체를 막았다.

“색만 보고 정하면 안 돼!”

루카가 뒤에서 말했다. 그녀의 불이 붉은 형체를 덮었다. 불길을 받아 더 단단해질 것 같던 적이 뒤틀리며 기둥에 부딪쳤다. 크로노는 자기 앞의 적에게 번개를 보냈다. 몸을 감싸던 얇은 층이 찢어지듯 벌어졌다.

적들이 물러서는 방향도 달랐다. 푸른 것은 마르에게 곧장 달려들었고 붉은 것은 옆길로 돌아 루카를 노렸다. 크로노는 마르 앞을 가로막으려다 멈췄다. 그녀는 이미 한쪽 발을 뒤로 빼고 다음 냉기를 모으고 있었다. 지금 그곳에 끼어들면 손을 쓸 공간을 가릴 것이었다.

그는 옆길로 뛰었다. 붉은 적이 모서리를 돌아오기 전에 기둥을 디뎌 방향을 꺾었다. 칼로 베는 대신 빈손으로 난간을 짚고 몸을 옮겨 길을 가렸다. 적이 그에게 팔을 뻗자 바로 낮아졌다. 그 머리 위로 루카의 불이 지나갔다.

붉은 형체가 무너졌다. 크로노는 착지한 발을 바꾸며 다시 가운데로 돌아왔다. 번개에 맞은 적은 아직 서 있었다. 팔을 내젓는 동작 사이로 몸 안쪽의 빛이 흔들렸다. 그는 거리를 벌린 채 번개를 한 번 더 보냈다. 얇게 떠 있던 형체가 바닥으로 접혔다.

마르도 자기 앞의 적을 쓰러뜨렸다. 마지막 냉기가 가라앉자 방에는 처음의 진동만 남았다. 세 사람은 바로 걷지 않았다. 다른 통로에서 발소리가 오는지 듣고, 서로가 서 있는 곳을 확인했다.

해저 신전의 방에서 벌어지는 전투 - ArrPeeGeeZ
해저 신전의 방에서 벌어지는 전투 - ArrPeeGeeZ

루카가 바닥에 남은 파편을 보았다.

“저 짐승들하고는 다르네.”

크로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경험이 쓸모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그는 칼을 넣지 않은 채 앞의 넓은 길을 살폈다. 정면 문에는 빛이 가로로 걸려 있었다. 좌우로는 작은 방들이 이어졌다.

“가운데는 막혔어.”

마르가 바닥의 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양쪽에서 이어지는 것 같은데.”

루카는 곧바로 장치의 원리를 설명하지 않았다. 먼저 오른쪽으로 걸어가 문 옆의 표면을 살폈다. 사람의 손이 자주 닿은 듯 닳은 부분이 있었다. 크로노가 안쪽을 확인하고 손짓하자 세 사람이 함께 들어갔다.

작은 방에는 제단처럼 솟은 낮은 돌과, 그것을 지키는 두 적이 있었다. 크로노는 빠르게 움직이는 쪽을 눈으로 좇았다. 벽을 타듯 돌아다니는 놈 때문에 뒤의 적을 겨누기 어려웠다. 마르가 한 발 앞으로 나와 활을 들었다. 그녀는 조준을 오래 붙들지 않고 놈이 돌아나올 모서리를 겨눴다.

화살이 옷 같은 외피를 꿰어 벽 가까이 붙잡았다. 움직임이 끊긴 짧은 동안 크로노가 다가갔다. 칼날이 이번에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쓰러지는 몸을 따라가지 않고 뒤로 물러났고, 그 빈 곳으로 루카의 불이 뻗었다. 나머지 적이 손을 들기도 전에 붉은 빛 속에서 주저앉았다.

마르는 화살을 뽑아 살폈다. 대가 휘어 있었다. 그녀는 벽 옆에 놓고 화살통을 닫았다. 네 발이 남았다.

루카는 낮은 돌의 윗면을 눌렀다. 움직이지 않았다. 옆으로 힘을 주어도 같았다. 마르가 바닥에 길게 난 자국을 발견해 가리켰다. 루카가 자세를 바꾸어 그 자국과 맞닿은 판을 밟자 돌 안쪽에서 무거운 소리가 났다. 벽의 빛 하나가 꺼졌다.

“발로 누르는 거였네.”

루카는 신발을 들어 판에서 떼었다. 빛은 다시 켜지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 더 누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가운데 길을 막은 빛이 전보다 줄어 있었다. 반대편에서도 같은 일을 해야 했다.

통로 바닥의 푸른 장치 - Vorxu
통로 바닥의 푸른 장치 - Vorxu

그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셋이 왼쪽 길로 돌아가 남은 방에 들어갔다. 여기에서는 푸른 적 둘이 앞을 지켰다. 마르가 냉기를 모으는 동안 크로노는 둘이 한꺼번에 달려들지 못하도록 입구를 좁혀 섰다. 루카가 뒤쪽의 다른 적을 견제했다. 각자 무엇을 할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 전의 실패가 벌써 움직임 안에 들어와 있었다.

마지막 형체가 쓰러지자 마르가 벽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크로노는 곁에 서서 물을 건넸다. 그녀가 마시는 동안 루카가 바닥판을 찾았다. 낮은 울림이 방 밖으로 퍼졌다.

돌아나오니 가운데를 막던 빛이 사라져 있었다.

크로노가 먼저 건너갔다. 그 너머에서는 방금 지나온 길의 아래쪽이 보였다. 신전은 평평한 건물이라기보다 안쪽으로 층을 접어 넣은 것 같았다. 아직 몇 층이나 내려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신기의 소리인지 다른 장치의 소리인지 구별되지 않는 울림이 점점 가깝게 들렸다.

넓은 계단에 접어들자 빛이 붉어졌다.

오른편 벽의 틈에서 불덩이가 튀어나와 계단을 가로질렀다. 크로노는 걸음을 멈추고 팔을 들어 뒤의 둘을 세웠다. 불덩이는 반대쪽 벽 아래로 사라졌다. 잠시 뒤 같은 틈이 다시 밝아졌다.

루카가 시간을 세려는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세 번째 빛이 지나간 뒤 크로노가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달리던 발을 중간의 넓은 단에 붙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르와 루카가 차례로 따라왔다. 불이 다시 지나갔을 때 세 사람은 이미 틈 아래에 있었다.

“왕궁의 사람들은 이걸 지나서 다니나?”

마르가 물었다.

루카는 벽 안쪽을 보았다.

“원래 이랬는지 모르겠어.”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크로노는 가까운 모서리에 놓인 연장을 보았다. 자루에 헝겊이 감긴 망치와, 손잡이가 닳은 긴 집게였다. 반듯한 벽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그 옆에는 누군가 반쯤 먹다 놓은 음식이 천에 싸여 있었다.

알게티에서 짐을 나르러 불려 갔다는 사람들도 이런 곳에 있었을까. 크로노는 망치를 집어 들지 않았다. 주인이 돌아와 찾을 수 있도록 그대로 두고 다음 단을 살폈다.

이번에는 적이 먼저 뛰어내렸다. 긴 팔다리가 계단 여러 칸을 한 번에 건넜다. 크로노는 위에서 내려오는 무게를 정면으로 받지 않았다. 한 칸 옆으로 옮겨 적의 발이 닿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몸을 돌려 옆구리를 베었다. 놈이 난간 쪽으로 기울자 마르가 앞을 막고 냉기를 보냈다. 뒤에서 뛰어오던 두 번째 적은 루카의 불을 피해 위쪽에 멈췄다.

크로노는 멈춘 적을 쫓아 올라가지 않았다. 다음 불덩이가 벽을 밝히고 있었다. 그는 마르의 손목을 가볍게 쳐 신호를 보내고 아래 단으로 뛰었다. 루카도 따라 내려왔다. 적은 머리 위에서 팔을 휘두르다가 불길 때문에 물러섰다.

추격하는 발소리는 바로 들리지 않았다. 셋은 계단의 굽은 벽 뒤로 들어갔다. 적을 모두 쓰러뜨릴 때까지 그 자리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크로노는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고 아래를 보았다.

신전 통로의 적들과 맞선 일행 - ArrPeeGeeZ
신전 통로의 적들과 맞선 일행 - ArrPeeGeeZ

마르가 그의 시선을 따라왔다. 멀리, 바닥보다 조금 높게 놓인 넓은 판이 보였다. 양옆에 수직으로 난 홈이 벽 아래까지 이어졌다. 루카는 그것을 보고 가방을 앞으로 돌렸다가 다시 등에 멨다.

“내려가는 장치 같아. 가까이서 확인하자.”

세 사람은 곧장 뛰지 않았다. 벽 뒤에서 물을 나눠 마시고 남은 음식을 한 입씩 먹었다. 짧은 틈이었지만 마르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려 힘을 가라앉혔고, 루카는 안경의 김을 닦았다. 크로노도 서서 둘을 재촉하지 않고 같은 단에 앉았다.

붉은 나이프를 둘러싼 천이 조금 풀려 있었다. 그는 매듭을 고쳐 맸다. 천 사이로 나온 날은 이곳의 빛을 받아 더 짙게 보였다. 산에서 받은 검을 쓰는 사람에게 그보다 오래된 나이프가 맡겨졌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보다 어디에 써야 하는지가 지금은 더 분명했다.

루카가 아래의 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걸 처음 만든 사람은 완성된 걸 보고 좋아했겠지.”

크로노도 벽을 보았다. 빈틈없이 맞은 돌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장치, 바다를 밖에 붙잡아 둔 방들이 이어졌다.

마르가 물주머니를 잠갔다.

“아마 그랬겠지.”

루카는 조금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멈춰야 해.”

그녀는 벽에서 눈을 돌려 내려갈 길을 보았다. 크로노는 그 얼굴을 보고 함께 일어났다.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없어져야만 부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카는 그 둘을 모두 가진 채 계단으로 나갔다.

아래쪽에서 다시 진동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벽의 빛이 한 번 늦게 따라왔다. 크로노는 난간을 쥔 손에 그 간격을 느꼈다. 어디선가 아주 큰 것이 장치의 박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마르와 루카가 같은 단에 내려서는 것을 보고 다음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붉은 빛 사이로 셋의 그림자가 길게 뻗었다. 이번에는 누구도 먼저 돌아보지 않았다. 아래로 향하는 발소리가 같은 속도를 찾고 있었다.

참고자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