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54화] 남겨 둔 길
사라는 불 곁에 앉지 않았다. 마르가 자리를 조금 넓혔지만 그녀는 보슈의 손을 놓고 뒤쪽을 돌아보았다. 쟈키가 굴 벽에 붙어 서 있었다. 발밑에 물이 고인 것을 보고 신발을 옮기는 아이의 표정에는 왕궁에서 보았던 신경질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누나가 손을 내밀자 바로 다가왔다.
“정말 안 돌아가?”
“장치를 움직이러는 가지 않아.”
아이는 그 차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을 다물었다. 마르도 들었다. 사라가 어머니를 버렸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왕의 딸이라는 자리까지 벗어 던지고 온 것은 아니었다.
보슈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없어진 것을 알 텐데.”
“하늘길을 열어 두었어요. 왕궁까지 갈 수 있어요.”
“너를 데려오려고 사람을 보낼 게다.”
“그 전에 말씀드려야 했어요.”

마르는 무릎 위의 손을 펴 보았다. 처음 이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펜던트가 닮았다는 사실에 자꾸 눈이 갔다. 지금은 문을 열어 놓고 이곳으로 내려온 발이 더 궁금했다. 왕궁의 사람들이 붙잡지 않았을까. 아이까지 데리고 나오면서 무슨 말을 했을까. 물을 것은 많았지만 사라가 들고 온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왕궁에서 신전으로 갈 수 있나요?”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현실 안쪽에 전송 장치가 있어요. 어머니는 벌써 내려가셨어요. 마신기도 옮겼고요.”
루카는 지도를 펴지 않고 들었다. 그 길은 종이에 없었다. 사라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장치가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도 열어 두는지 물었다. 사라는 그렇다고 답한 뒤, 잠시 마르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보았다.
“봉인 문은 열 수 있겠네요.”
마르가 보석을 꺼냈다. 불빛 속에서도 안쪽의 빛은 흐려지지 않았다. 사라는 손을 대지 않았다. 마르도 둘이 왜 같은 모양인지 묻지 않았다. 나중에 물을 수 있도록 이 사람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쪽 사다리에서 발소리가 났다.
마르는 먼저 고개를 들었다. 주민들이 내려올 때 나던 나무의 삐걱임과 달랐다. 사다리를 타는 소리가 중간에서 끊겼고, 곧 굴 입구로 길게 그림자가 들어왔다. 달톤은 장갑을 당겨 끼우며 주위를 살폈다. 그를 알아본 주민 하나가 반쯤 일어섰다가 벽으로 물러났다.
“마중을 이리 멀리까지 나오게 하는군.”
사라가 쟈키를 뒤로 보냈다. 크로노는 이미 일어서 있었다. 손은 칼자루 가까이에 있었지만 뽑지는 않았다. 달톤과 그 사이에 사라가 서 있었고, 그 뒤로 아이들과 불이 있었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전하세요.”
사라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달톤이 코로 짧게 웃었다.
“그 말을 전하러 왔겠나?”
보슈가 앞으로 나섰다. 달톤의 손바닥에 빛이 맺히는 것을 본 순간 마르는 몸을 틀었다. 불덩이가 노인의 가슴께를 때렸다. 보슈가 뒤로 넘어지며 낮은 상을 밀었고, 그릇이 바닥에 깨졌다. 마르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뜨거워진 옷을 젖은 천으로 눌렀다.
크로노가 달려들었다. 달톤은 그를 맞받지 않고 사라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손목을 붙잡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는 동작이 빨랐다. 크로노의 검이 칼집을 벗어났을 때에는 사라의 목 가까이에 작은 불꽃이 걸려 있었다.
“한 걸음 더 와 보지.”
크로노는 멈췄다. 날끝이 흔들리지 않았다. 마르는 그가 달톤의 손과 사라의 발을 번갈아 보는 것을 보았다. 거리는 가까웠지만 칼이 닿기 전에 불꽃이 움직일 수 있었다.
쟈키가 달톤의 옆으로 달려들었다.
“손 놔!”
달톤이 빈팔을 휘둘렀다. 아이가 옆으로 넘어졌다. 크로노가 한 발 물러나 몸을 돌려 그를 받았다. 사라의 발이 앞으로 움직였으나 붙잡힌 팔 때문에 멈췄다. 마르는 일어나려는 보슈를 촌장에게 맡기고 손을 들었다.
달톤이 웃음을 거두었다.
“얼려 보려고? 누구부터 얼지 궁금하군.”
마르는 손가락을 접었다. 냉기를 퍼뜨리기에는 사라와 너무 가까웠다. 달톤의 눈이 그녀에게 머무는 동안 루카가 옆으로 움직였다. 마르는 따라 보지 않았다. 시선을 끌면 그쪽 길도 막힐 것이었다.
달톤은 먼저 눈치챘다. 사라를 뒤로 끌며 굴 안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 굴이 얼마나 깊은지 세어 보지 않았는데. 불을 넣으면 어디까지 갈까?”
입구 가까이 있던 여자가 아이 둘을 자기 등 뒤로 보냈다. 루카의 발이 멎었다. 조준할 수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좁은 굴에는 피할 곳이 없었다.
사라가 달톤을 돌아보았다.
“같이 가겠어요. 여기 있는 사람에게 손대지 마세요.”
“처음부터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마르는 사라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 전의 말이 거짓으로 바뀐 얼굴은 아니었다. 사라는 붙잡힌 손목을 풀려고 힘을 쓰는 대신, 달톤에게 가려 있던 쟈키를 찾았다. 아이는 크로노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크로노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쟈키, 여기 있어.”
사라가 말했다. 아이가 입을 열었으나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마르도 듣지 못했다. 달톤의 등 뒤에서 둥근 빛이 열렸다. 사라는 끌려 들어가기 직전 마르를 보았다.

“길은 열려 있어요.”
빛이 접혔다. 마르는 두 사람이 사라진 바닥으로 달려갔다. 손을 뻗었을 때 닿은 것은 식어 가는 공기뿐이었다. 그곳에 문양도, 열쇠를 댈 틈도 남지 않았다.
뒤에서 쟈키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아이는 크로노에게서 벗어나 사라가 서 있던 자리에 섰다. 고함을 지를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르는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려다가 그만두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이 달래는 얼굴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궁 안쪽 길, 네가 아는 만큼 말해 줘.”
쟈키가 그녀를 보았다.
“가려고?”
“응.”
“또 붙잡히면?”
마르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크로노가 곁으로 왔다. 그는 검을 칼집에 넣고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달톤을 지나갈 거야.”
쟈키의 시선이 그 칼에 머물렀다. 조금 전에는 쓰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다가 왕궁의 안쪽 계단을 설명했다. 여왕이 있을 때 시종들이 멈춰 서는 곳, 그 너머로 달톤이 드나드는 문. 루카가 그 말을 듣고 손바닥만 한 종이에 선을 그었다. 쟈키는 틀린 방향을 손가락으로 고쳤다.
보슈가 앉은 자리에서 일행을 불렀다. 마르는 돌아가 노인의 호흡을 살폈다. 화염에 그슬린 옷 아래로 피부가 붉어져 있었으나 말은 분명했다. 그녀는 온기를 천천히 모아 상처 위에 대었다. 보슈는 그녀가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사라를 데려가면 장치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루카가 물었다.
“멈출 방법을 아세요?”
“시도할 방법은 있다.”
보슈가 옷 안쪽에서 가늘고 긴 것을 꺼냈다. 천을 벗기자 붉은 날이 드러났다. 불빛이 반사된 색과 달랐다. 돌을 얇게 깎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자리는 날카로웠다. 마르는 선사시대에서 손에 올렸던 붉은 돌을 떠올렸다.
“드림스톤인가요?”
“그래. 마신기에도 같은 돌이 쓰였다.”
루카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보슈는 날을 만지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이 나이프를 장치에 써라. 힘을 받아들이는 그 몸체에.”
“부술 수 있다는 말씀이죠?”
“내가 만든 것을 멈추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바다 아래로 옮겨진 지금의 장치를 보지는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두 안다고 할 수는 없어.”
마르는 노인의 손을 보았다. 무기를 건네는 손보다 놓지 못하는 손에 가까웠다. 루카도 더 쉬운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직접 만든 장치를 남에게 부수라고 부탁하는 것이 어떤 말인지 그녀는 알고 있는 듯했다.
크로노가 손을 내밀었다. 보슈는 곧바로 주지 않고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산에서 돌아온 너희에게 또 가라고 하는구나.”
크로노는 고개를 조금 저었다.
“사라가 있어요.”
그 말 뒤에 다른 이유를 덧붙이지 않았다. 보슈는 나이프를 천으로 감싸 그의 손에 놓았다. 크로노는 붉은 날이 흔들리지 않도록 짧은 칼집 안으로 넣고, 평소 쓰던 검과 반대쪽에 묶었다. 마르는 그 두 물건의 길이가 다른 것을 보았다. 하나는 길을 지나가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착한 곳에서 써야 했다.

루카는 바닥에 놓인 가방을 들었다. 촌장이 입구까지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자 그녀는 바깥길이 막혔는지만 봐 달라고 부탁했다. 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왕궁으로 따라올 필요는 없었다. 남은 사람에게는 남은 일이 있었다.
마르는 쟈키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보슈 옆에 서 있었으나 그의 옷을 잡지는 않았다.
“누나는 나 때문에 갔어.”
낮은 목소리였다. 마르는 누구 때문도 아니라는 말을 급히 하지 않았다. 달톤이 무엇을 했는지 이 아이도 보았다.
“네 누나는 너를 여기 두려고 끝까지 말했어.”
쟈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려 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르는 대답을 받아내려 하지 않고 일어섰다. 보슈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쟈키도 피하지 않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아침에 화살을 건넨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마르에게 작은 먹을거리 꾸러미를 주었다. 마르는 고맙다고 말하고 가방에 넣었다. 출발을 늦출 만큼 큰 준비는 없었다. 신발끈을 묶고 물을 채우는 동안 크로노는 먼저 바깥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눈은 그쳤어.”
루카가 지도를 접었다. 셋은 좁은 출구를 지나 설원으로 나왔다. 마르는 찬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떠 있던 산도 더는 없었다. 대신 멀리 빛의 기둥이 곧게 서 있었다. 사라가 닫지 않고 남겨 둔 길이었다.

바람이 겉옷을 당겼다. 마르는 화살통을 당겨 메고 크로노와 나란히 걸었다. 루카가 뒤에서 하늘길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둘 사이로 따라붙었다.
“왕궁은 처음이라 길 안내는 너희가 해.”
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안쪽 장치는 네가 봐 줘.”
“보는 건 할 수 있지.”
크로노가 앞의 낮은 눈턱을 넘어섰다. 마르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그녀가 이미 옆으로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 거두었다. 루카는 둘이 밟은 자리를 골라 넘어왔다. 눈 위에 세 줄의 발자국이 길어졌다.
마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따라오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굴 안에서는 보슈가 쟈키와 함께 있을 것이고, 이 길 끝에서는 사라를 다시 만나야 했다. 그때는 펜던트 이야기를 물을 수 있기를 바랐다. 서서 급히 한마디씩 나누는 대신, 앉을 곳부터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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