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53화] 다시 쥐는 아침

사다리에서 내려오자 보슈가 자리를 내주었다. 조금 전까지 네 사람이 매달렸던 산은 바다 밑으로 사라졌는데, 불가에는 그들이 앉을 만큼의 빈자리가 생겨 있었다. 크로노는 거기에 주저앉아 두 손을 펼쳤다. 손금 사이에 검은 돌가루가 끼어 있었다.

알게티로 돌아온 보슈와 일행 - Thonky
알게티로 돌아온 보슈와 일행 - Thonky

여자가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 마르가 먼저 그릇을 받으려 하자 여자는 그녀의 팔꿈치를 가볍게 밀어 앉혔다.

“물은 내가 갈아 올 테니 씻기만 해.”

루카도 가방을 내려놓았다. 돌아오는 내내 품고 있던 밧줄을 펴자 그슬린 끝에서 가루가 떨어졌다. 촌장은 줄을 받아 남은 길이를 손으로 훑고, 벽에 걸린 다른 줄 옆에 얹었다. 루카가 잘려 나간 부분을 설명하자 그가 물었다.

“네 사람을 붙잡았나?”

“네.”

“그럼 쓸 만큼 썼군.”

그 말에 루카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풀었다.

어깨에 박힌 작은 파편은 불빛 아래서 빼냈다. 크로노가 이를 악물 때 마르는 그의 소매를 잡아 주었다. 마법을 더 짜내려 하지 않았다. 물로 씻고 깨끗한 천으로 감싸는 동안 노인의 질문이 잠깐씩 이어졌다. 어디서 왔는지, 사라를 어떻게 만났는지, 왜 탄식의 산까지 올라갔는지.

마르는 왕궁에서 풀려난 일과 예언자가 뒤따라온 일을 말했다. 사라가 명령에 따라 시간의 문을 닫았다는 대목에서 보슈의 손이 멎었다.

“그 아이가 너희를 내보내려 했단 말이지.”

“붙잡아 두면 죽일 것 같았어요.”

보슈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에 얹은 장작 하나가 속에서 갈라졌다. 그는 그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린 뒤에야 물었다.

“돌아온 길은 따로 있었느냐?”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슈가 만든 배라고 하자 보슈는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루카는 가방에서 접힌 조작 메모를 꺼냈다. 원본을 흉내 낸 글씨와 자기가 덧붙인 작은 표시가 한 장에 섞여 있었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 한동안 읽었다.

“이 사람은 이런 데에도 설명을 덜 쓰는군.”

보슈가 귀퉁이의 빈 곳을 손톱으로 짚었다.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지. 옆에 앉혀 놓고 물으면 대답은 잘하면서.”

루카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가 사라졌다. 가슈에게는 물을 수 없었다. 보슈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를 만난 곳이 어디냐?”

“아주 먼 곳이에요. 시간으로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루카는 폐허가 된 돔과 그 안에 남은 기록, 주인을 대신해 작동하던 누를 이야기했다. 노인이 기억하는 가슈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어, 살아서 나눈 대화처럼 꾸미지 않았다. 보슈는 처음 듣는 이름보다 익숙한 작업 습관에 더 자주 고개를 들었다. 설명이 끝났을 때 그는 메모를 양손으로 반듯하게 접어 돌려주었다.

“네가 가져온 것은 잘 보관해라.”

크로노는 무릎 옆에 놓인 짧은 검을 보았다. 같은 손으로 만든 것을 들고 그 손의 주인을 구해 왔다는 사실이 이제야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칼집째 보슈에게 건넸다.

보슈는 조금만 뽑아 날을 살피더니 자루 밑을 돌려 보았다.

“내가 만든 칼이군.”

그가 크로노를 바라보았다. 크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에게 받았어요.”

노인은 언제냐고 바로 묻지 않았다. 날을 집어넣고 자루를 크로노 쪽으로 돌려주었다.

“쥐는 손에 잘 맞느냐?”

크로노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보슈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건 다행이구나.”

그 뒤로는 누구도 긴 이야기를 재촉하지 않았다. 보슈도 그릇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일행이 산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주민들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나누다 흩어졌다. 크로노는 옆자리에 눕는 마르에게 자기 몫의 접은 천을 조금 밀어 주었다. 그녀가 반을 도로 밀어 놓았다. 둘은 더 흥정하지 않고 나란히 머리를 얹었다.

그날 밤에는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알게티의 작은 잠자리 - Studio POP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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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불가의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잠들기 전 장작을 쌓던 남자가 이제 아이에게 신발을 신기고 있었다. 안쪽 굴에서는 칼 가는 소리가 났다. 크로노는 얼마 동안 누운 채 그 소리를 듣다가 몸을 일으켰다. 루카가 안경을 머리 위에 얹고 가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찾는 게 뭔데?”

“안경.”

그는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루카는 손을 올렸다가 그대로 눈 위로 내렸다.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마르가 이불 안에서 말했다.

“이미 들었어.”

크로노는 웃다가 여자가 내미는 그릇을 받았다. 어제는 씹는 일도 번거로웠던 음식이 오늘은 모자랐다. 그는 빈 그릇을 조금 내밀었고, 여자는 묻지 않고 한 국자 더 떠주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마르가 붕대를 갈았다. 밤사이 힘을 되찾은 손에서 온기가 차분하게 흘렀다. 산 위에서 급히 피를 멎게 할 때와 달리,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한 곳씩 마무리했다. 허리와 옆구리를 오래 붙잡던 뻣뻣함도 그날 처치와 휴식 뒤에 풀렸다. 피부에 남은 자국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몸을 돌리고 깊게 숨을 쉬는 데 더는 걸리는 곳이 없었다. 손과 어깨의 새 상처에는 보호할 천만 남겼다.

마르는 자기 팔도 살폈다. 오래 감고 있던 천을 풀고 팔꿈치를 몇 번 굽혀 보더니 새 붕대는 꺼내지 않았다. 크로노가 물그릇을 옮기는 동안 그녀는 활을 가져와 시위를 걸었다.

“빈 채로 당기지 마.”

굴 안에서 칼을 갈던 남자가 다가왔다. 마르가 시위를 놓지 않고 천천히 되돌렸다. 남자는 그녀의 빈 화살통과 활을 번갈아 보았다.

“길이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것을 골라 보겠나?”

그가 가져온 화살은 마르가 쓰던 것보다 굵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촉도 돌과 뼈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르는 하나씩 손가락 위에 올려 무게가 쏠리는 곳을 찾았다. 여섯 발을 골라내자 남자는 굴 막다른 곳의 오래된 짚 꾸러미를 가리켰다.

첫 화살은 겨눈 곳보다 낮게 박혔다. 두 번째는 왼쪽이었다. 마르는 무턱대고 힘을 늘리지 않고 발을 옮겼다. 세 번째가 가운데에 들어가자 남자가 짧게 턱을 당겼다.

“조금 가까이서 써야겠네요.”

“그 활에는 그렇겠군.”

마르는 세 발을 모두 뽑아 촉을 살핀 뒤 화살통에 넣었다. 루카가 보관하던 휜 금속 화살은 남자에게 보여 주었다. 쓸 수 있는 재료가 있으면 남겨 두겠다고 하자 그는 촉을 받아들었다. 대단한 선물인 척하지 않았고, 마르도 새 무기를 얻은 사람처럼 굴지 않았다. 이제 필요한 순간 쏠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알게티 거처 안의 탁자와 주민 - Studio POP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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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는 그사이 위층에서 내려오는 물동이를 받아 옮겼다. 사다리 중간에서 아이 하나가 길을 막고 내려오지 못했다. 한 손에는 둥근 나무 조각이 들려 있었다.

“던져.”

그가 빈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망설이다 나무 조각을 떨어뜨렸다. 크로노는 그것을 받아 손등 위로 한 번 튕겼다가 다시 쥐었다. 아이가 급히 나머지 칸을 내려왔다.

“어떻게 했어?”

크로노가 이번에는 천천히 보여 주었다. 나무 조각이 손가락 사이에서 반 바퀴 돌았다. 아이가 따라 하다 놓치자 그는 굴러가는 조각을 발등으로 멈춰 세웠다. 마르가 화살통을 메고 나올 때 아이는 이미 세 번째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거 나도 못 하는데.”

“연습하면 돼.”

“너 말고 저 애한테 한 말이야.”

아이가 웃었다. 크로노도 웃으며 물동이를 들었다. 내려온 곳으로 다시 올라가는 발에 망설임이 없었다.

보슈는 촌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크로노가 돌아오자 자리를 가리켰다. 노인의 앞에는 불탄 나무 끝으로 그린 간단한 그림이 있었다. 위쪽에 큰 원, 아래쪽에 작은 원이 놓였고, 둘 사이에 선이 이어져 있었다.

“너희는 라보스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루카는 앉자마자 종이를 펴려다가 손을 멈췄다. 먼저 마르와 크로노를 보았다. 크로노는 큰 원 아래에 손가락을 놓았다.

“땅속에 있어요.”

“그리고 하늘에서 왔어요.” 마르가 이었다. “아주 오래전에요. 떨어지는 걸 봤어요.”

보슈의 시선이 셋을 훑었다. 그는 놀랐다는 말을 여러 번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린 선을 손바닥으로 조금 지우고, 아래쪽 원 주위에 더 넓은 테두리를 그었다.

“우리는 그 힘을 끌어 올리고 있다. 처음에는 쓸 만큼이면 된다고 생각했지.”

루카가 물었다.

“얼마나 끌어 올리는지 알 수는 있었나요?”

“장치에 흐르는 양은 잴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 잘못이었어.”

노인은 아래의 원을 가리켰다. 크로노는 아리스 돔에서 본 붉은 하늘을 떠올렸다. 장치 바깥에 있는 힘. 눈금을 읽는 사람을 아예 남겨 두지 않을 만큼 큰 것이 그 아래에 있었다.

“여왕은 바다 아래에 신전을 짓게 했다. 더 가까운 곳에서 더 많은 힘을 얻으려고. 사라를 시켜 마신기를 움직일 생각이다.”

“사라가 멈추면요?”

마르의 질문에 보슈는 잠깐 생각했다.

“지금 여왕에게는 그 아이가 필요하다.”

밖에서 부츠를 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급히 사다리를 내려오다 마지막 몇 칸을 건너뛰었다. 촌장이 몸을 돌리기 전에 그가 말했다.

“사라 님이 오셨습니다.”

보슈가 일어섰다. 크로노도 몸을 돌렸다.

사라는 외투의 후드를 벗고 있었다. 어깨에 앉은 눈이 불가의 온기에 녹았다. 뒤따른 쟈키는 사람들 사이를 둘러보다 누나의 옷자락 가까이 붙었다. 높은 천장과 빛나는 바닥에서 보았던 두 사람이 낮은 굴 안에 서 있었다. 주민들이 급히 길을 비우자 사라가 오히려 멈췄다.

알게티를 찾아온 사라와 쟈키 - Studio POPPO
알게티를 찾아온 사라와 쟈키 - Studio POPPO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앉아 계세요.”

그녀는 보슈를 발견하고 사람들 사이로 걸어왔다. 말을 꺼내기 전에 그의 손을 잡았다. 보슈는 그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둘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크로노는 사라의 외투 안쪽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여행할 짐도, 시종도 없었다.

사라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마르를 보고, 크로노를 보고, 처음 가까이 마주하는 루카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르가 짧게 이름을 알려 주었다.

“돌아오셨군요.”

“이번에는 우리가 길을 찾았어요.” 마르가 말했다.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는 얼굴이었으나 그것만 전하려 온 사람은 아니었다. 보슈가 묻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해저 신전이 완성됐어요.”

굴 안에서 나던 생활의 소리가 하나씩 멎었다. 보슈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는 어쩌려고 여기까지 왔느냐.”

사라는 대답을 고르느라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돌아가서 그 장치를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쟈키가 누나를 올려다보았다. 마르는 들고 있던 화살통 끈을 놓았다. 크로노는 보슈 앞에 그려진 두 개의 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노인의 손이 오가던 그 사이를, 사라는 이미 건너온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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