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51화] 발밑을 지나는 구름
루카는 휘어진 화살을 무릎 위에서 굴렸다. 촉을 곧게 펴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지만, 자루와 맞닿는 부분에 금이 있었다. 손톱이 걸리는 가느다란 틈을 마르에게 보여 주자 그녀가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한 번은 쏠 수 있겠지?”
“어디로 날아갈지는 모르겠어.”
루카는 화살을 건넸다. 마르는 금 간 부분을 직접 만져 본 뒤 화살촉을 천으로 감쌌다. 멀쩡한 것과 섞이지 않도록 가방 안에 넣고 활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알게티에서 다시 밤을 보냈다. 루카는 잠들기 전에 가방의 찢어진 곳을 두 겹으로 덧댔다. 바닥에서 주워 온 드라이버를 안주머니에 끼우고, 열쇠 장치도 그 옆에 깊이 넣었다. 혹시 모를 충격에 덮개가 열리지 않도록 확인했지만, 이곳에서 게이트 키가 길을 열어 줄 수는 없었다.
기름 먹인 천 한 장을 덮고 누우려는데 마르가 물었다.
“배는 괜찮을까?”
“두고 온 곳에 눈이 더 쌓였겠지. 돌아가서 걷어 내야 할 거야.”
루카는 바위 능선과 표시해 둔 위치를 떠올렸다. 실버드가 그들을 다시 이 시대로 데려와 주었다. 그렇다고 지금 머리 위에 있는 산까지 옮겨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고 있는 조작법을 생각 없이 넓혀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가슈가 남긴 메모에 비행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지금 가서 동료들을 데려오는 건?” 마르가 물었다.
“가려면 함께 가자. 배로 다른 시대에 간 뒤에도 동료들이 있는 곳까지 찾아가야 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여기서 흩어지고 싶진 않아.”
“그럼 여기서는 그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알아 놓았으니 돌아갔다 오면 반드시 늦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다만 돌아오려는 시간에 정확히 닿을 수 있는지, 자신은 아직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녀가 설명하자 마르는 물주머니의 마개를 만지다가 손을 떼었다.
“우리 셋이 갈 수 있는지 내일 보고 정하자.”
크로노도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잠들려고 등을 돌리는 그의 움직임이 전날보다 덜 끊겼다. 루카는 조명을 껐다. 마을의 불이 낮아진 뒤에는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르가 웃음을 참느라 잠자리에서 몸을 움츠렸고, 옆에서 크로노가 얼굴을 덮었다. 루카는 두 사람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려다가 자기도 입을 눌렀다.
아침에는 촌장이 밧줄 매듭을 살펴 주었다. 지상에서 짐을 당길 때 쓰는 방식과, 사슬에 몸을 붙잡아 둘 때 필요한 방식이 같지는 않았다. 루카는 자신이 묶은 매듭을 다시 풀고 노인의 손을 따라 했다. 당긴 줄이 느슨해지지 않는지 세 사람이 차례로 체중을 실어 보았다.
그동안 크로노는 굴 입구의 사다리를 오르내렸다. 돌아올 때는 물을 채운 주머니까지 들었다. 마지막 칸에서 잠깐 멈췄으나 혼자 내려설 수 있었다. 마르는 팔을 움직여 보고 활을 한 번 당겼다. 루카도 가방을 맨 채 몸을 숙였다 폈다.
“천천히 가면 되겠어.” 마르가 말했다.
촌장은 세 사람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어디서 쉬어야 할지 자신도 모르는 산길에 대해 아는 척하지 않았다. 다만 동굴 끝에서 바람이 돌아 불 때를 기다리라고, 사슬에 서서 맞지 말고 엎드려 보내라고 했다.
루카는 그 말을 지도 옆에 적었다. 마을 사람에게 빌린 줄을 허리에 감고 조명을 켰다.
짐승의 둥지는 전보다 넓어 보였다. 사라진 소리들 때문이었다. 처음 왔을 때는 바위마다 무언가 붙어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물이 떨어지는 곳과 바람이 들어오는 틈이 따로 들렸다. 그들이 남긴 싸움의 흔적은 그대로였다. 크로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지나갔고, 루카는 공구가 흩어졌던 바닥을 한 번 더 비추었다.
사슬 앞에서 세 사람은 멈춰 섰다. 구름 아래 매달린 고리들은 멀수록 가늘어졌다. 루카는 눈으로 간격을 셈하다가 그만두었다. 저 위까지의 길이를 알아내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줄지 않을 것이다.
크로노가 먼저 올랐다. 고리의 한쪽 가장자리를 밟고, 앞쪽에 세워진 다음 고리를 잡았다. 밑창에 감아 둔 가죽이 쇠 위에서 눌렸다. 그는 두 걸음 나아간 뒤 뒤를 돌아보았다. 혼자만 설 수 있는 지점에서는 기다리지 않고, 마르가 올라설 자리가 있는 곳까지 옮겼다.
루카는 마지막으로 발을 올렸다. 조명은 필요 없어 가방에 넣었다. 두 손이 비고 나니 손가락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쇠는 매끄럽지 않았다. 눈이 녹았다 얼어붙은 부분과 거칠게 녹슨 부분이 섞여 있었다.
굴 입구가 등 뒤로 멀어졌다. 바람이 아래에서 올라오자 옷이 몸에서 들떴다. 마르가 활을 등 가운데로 바짝 당겨 걸었다. 루카는 밧줄을 앞의 고리에 넘겨 붙잡았다. 바람이 줄어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한 걸음씩 움직였다.
구름은 멀리서 보던 것처럼 가볍지 않았다. 입자들이 얼굴과 안경에 달라붙었다. 앞서 가던 마르의 머리카락 끝에 물이 맺혔다. 루카가 손등으로 안경을 닦는 순간 사슬이 옆으로 밀렸다. 발이 한쪽으로 돌아가며 몸이 기울었다.
그녀는 줄을 잡아당겼다. 허리에 압박이 오고, 무릎이 쇠에 부딪쳤다. 마르가 돌아보려 하자 루카가 외쳤다.
“오지 마. 거기 잡고 있어.”
크로노도 몸을 낮췄다. 마르는 그가 있는 쪽 고리를 붙잡았고, 루카는 줄에 매달린 체중을 팔로 나누며 발을 다시 올렸다. 안경 한쪽에 물이 가득해 앞이 겹쳐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두 번 끄덕일 때까지 앞의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위에 손이 닿았을 때 루카는 자신이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알았다. 고리를 놓으려 해도 손가락이 곧게 펴지지 않았다. 크로노가 가방을 받아 주었고 마르는 그녀가 올라올 공간에서 물러났다.

산의 첫 비탈은 부서진 돌과 짧은 풀로 덮여 있었다. 루카는 무릎을 꿇은 채 굴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구름 틈으로 사슬 일부만 보였다. 올라온 길이 저렇게 가늘었나 싶어 더 보지 않았다.
마르가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너도 좀 마셔.” 루카가 말했다.
“마셨으니까 주지.”
루카는 받아 한 모금 삼켰다. 목이 아플 만큼 말라 있었다. 크로노는 옆에서 길을 살피고 있었다. 솟은 바위들 사이로 또 다른 사슬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아래로 이어지지 않고 산의 떨어진 두 부분을 연결하고 있었다.
길을 따라가자 둥근 돌 하나가 움직였다. 루카는 바람에 굴러온 줄 알았으나 돌은 경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틈에서 눈 같은 빛이 번쩍였다. 크로노가 손을 들었고, 루카는 불을 모으려 손가락을 펼쳤다.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다.
힘이 다한 것과 달랐다. 시작하려는 감각 자체가 중간에서 끊겼다. 마르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둥근 돌이 한 바퀴 돌자 크로노가 다가가 검을 내리쳤으나, 날은 조금 전까지 돌이 있던 자리를 찍었다. 돌은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게 빠르게 방향을 바꿨다.
“떨어져 봐!” 루카가 말했다.
셋은 돌을 가운데 두고 뒤로 물러났다. 크로노가 다시 쫓아가려던 발을 멈췄다. 둥근 돌은 바위 사이를 오가더니 어느 틈에 굴러 들어가 사라졌다. 조금 지나자 루카의 손끝에 불꽃이 맺혔다. 그녀는 즉시 껐다.

“저게 가까이 있으면 힘을 못 쓰나 봐.”
정확히 어디까지 영향을 받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또 나타날지도 몰랐다. 루카는 돌이 사라진 틈을 지도에 표시했다. 여기서는 마법으로 몸을 지탱하거나, 추락하는 사람을 붙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됐다. 그녀는 허리에 맨 줄을 다시 당겼다.
높은 곳으로 갈수록 길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사슬 앞에서 만났다. 멀쩡해 보이는 비탈이 끝에서 절벽으로 끊겼고,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바위 뒤로 오를 틈이 나 있었다. 앞장선 크로노가 손을 들면 둘은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틈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려도 재촉하지 않았다.
두 번째 사슬을 건널 때 날개 달린 괴물이 위쪽 바위에서 몸을 폈다. 회색 막 사이로 빛이 비쳤다. 그것이 바람을 타고 내려오자 크로노는 고리를 붙잡은 채 몸을 낮췄다. 마르도 그의 뒤에 엎드렸다. 루카는 맨 뒤에서 팔을 들었다가 거두었다. 그 위치에서 불을 보내면 앞의 두 사람을 지나쳐야 했다.
괴물의 발톱이 고리를 긁었다. 크로노가 칼집째 무기를 밀어 내며 날개 밑을 받았다. 놈이 솟구치는 동안 셋은 앞의 바위 쪽으로 이동했다. 루카는 마르의 발이 평평한 곳에 닿는 것을 보고 마지막 고리를 건넜다.
다시 내려오는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덮었다. 크로노가 칼을 뽑고 앞에 섰다. 괴물은 그의 얼굴을 향해 발톱을 내밀었지만 마르의 냉기에 날개 한쪽이 굳었다. 몸이 비스듬히 내려앉자 루카가 뻗은 불꽃이 다른 쪽 날개를 쳤다. 크로노의 검은 낮아진 몸통을 가로질렀다. 괴물은 바위 가장자리에 부딪쳐 구름 속으로 떨어졌다.
루카는 절벽 쪽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날갯짓이 다시 들리는지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돌아오지 않자 가방을 벗고, 조금 전 고리에 부딪친 무릎을 살폈다. 바지가 벗겨진 자리에 피가 맺혀 있었다. 마르는 천을 적셔 먼지를 닦아 주었다.

오랫동안 셋 다 말이 없었다. 물을 마시는 동안 바위 바깥으로 구름이 흘렀다. 아랫부분이 잠깐 걷히자 까마득한 설원이 보였다. 루카는 그 풍경을 보며 어느 쪽에 실버드가 있을지 짚어 보았다. 산이 조금씩 흔들려 방향이 틀어지는 것인지, 구름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보슈 아저씨가 내려올 수 있을까?”
마르가 물었다. 루카는 그제야 가지고 온 밧줄의 길이를 다시 보았다. 세 사람이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느라, 네 사람이 내려갈 때의 자리를 충분히 계산하지 못했다.
크로노가 비어 있는 자기 등에 손을 얹었다. 마르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업으면 우리 둘이 널 잡아야 하잖아.”
루카는 돌아온 길에 표시해 둔 넓은 바위를 짚었다. 사슬에 한 사람씩 걸어 줄 수는 있었다. 보슈가 전혀 걷지 못한다면 옷과 줄로 몸을 받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경우 크로노만 짐을 떠안을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보고 정하자. 내려갈 때 쓸 줄은 남겨 둘게.”
그녀는 지도의 여백에 넓은 바위와 좁은 고리를 구분해 그렸다. 길을 찾는 종이였던 것이 이제는 쉴 수 있는 곳과 사람을 기다릴 수 있는 곳을 기록한 종이가 됐다.
그들은 남은 음식을 조금씩 나눠 먹었다. 크로노가 자기 몫의 단단한 뿌리를 씹다가 멈추자 마르가 물에 적셔 주었다. 루카는 가슈의 돔에서 보았던 세 개의 좌석을 떠올렸다. 셋이 타는 자리를 정확하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산에서 돌아갈 네 사람의 자리는 이제 자신들이 찾아야 했다.
구름 위로 해가 기울었다. 바위는 햇빛을 받고도 차가웠다. 마지막 사슬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세 사람의 손바닥이 모두 붉어져 있었다. 크로노가 위쪽을 살피고 돌아와 사람 하나가 서 있는 것 같다고 손짓했다. 루카는 밧줄을 챙기고 그를 따라갔다.
정상은 생각보다 평평했다. 가운데에 푸른 얼음 덩어리가 서 있었다. 빛이 그 안을 여러 겹으로 나누어 놓아 처음에는 사람의 윤곽만 보였다. 크로노가 가까이 가며 각도를 바꾸자 굽은 어깨와 수염이 드러났다.
루카는 숨을 멈췄다. 미래의 어느 폐허에서 기록으로 본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보슈의 얼굴이었다.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몸 가까이 모으고 있었다. 얼음 속인데도 옷자락 끝에는 서리가 없었다.

크로노가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표면에 닿기 전에 바위가 울렸다. 루카는 바로 그의 팔을 당겼다. 정상 바깥에서 거대한 손가락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왼편 바위 가장자리를 움켜쥔 손은 짙고 붉었다. 오른쪽에서는 더 창백한 손이 펼쳐졌다. 두 손 사이로 얼굴이 올라왔다. 바위처럼 겹친 이마 아래, 사람을 닮았으나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크기의 눈이 열렸다.
루카는 마르가 뒤로 물러나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도 자리를 옮겼다. 내려갈 사슬은 세 사람의 등 뒤 왼쪽에 있었다. 얼음에 갇힌 보슈는 거대한 형체 바로 앞이었다.
그녀는 밧줄을 발에 걸리지 않을 곳에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귀하게 접었던 지도도 그 위에 얹었다. 종이 위에 그린 돌아갈 길을, 이제는 세 사람이 서 있는 이곳까지 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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