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49화] 불을 나누는 사람들

마르의 질문이 끝나자 불 맞은편에서 가죽을 꿰매던 여자가 바늘을 멈췄다.

“탄식의 산에는 왜 가려고?”

“보슈라는 분을 찾으러요. 그곳에 갇혀 있다고 들었어요.”

여자는 바늘을 가죽에 꽂고 세 사람을 살폈다. 마르에게서 크로노의 해진 옷으로, 다시 루카의 가방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불가에 누워 있던 아이가 몸을 뒤척였다. 여자는 아이의 발에서 흘러내린 덮개를 끌어 올린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아래로 내려가 봐. 촌장님이 아직 깨어 계실 거야.”

마르는 무릎에 놓았던 활을 잡았다. 일어나려는 순간 여자가 솥 옆에 엎어 둔 그릇 하나를 바로 놓았다.

“그건 먹고.”

맑은 국물에 잘게 썬 뿌리가 떠 있었다. 마르는 그릇을 두 손으로 받았다가 왼팔 안쪽이 당겨 손의 위치를 바꿨다. 여자는 그것을 보고도 묻지 않았다. 대신 세 번째 그릇에는 건더기를 조금 더 넣어 크로노에게 건넸다.

낮은 거처는 입구에서 보았던 것보다 깊었다. 불빛 밖으로 몇 걸음만 나가면 바닥이 끊기고, 사다리가 아래쪽 어둠으로 이어졌다. 벽에 난 작은 굴마다 생활하는 소리가 났다. 돌절구를 찧는 둔탁한 울림, 솥 가장자리를 긁는 소리, 잠을 재촉하는 목소리. 위에서 들어온 찬 공기가 발목을 훑었지만 사다리를 내려갈수록 물기와 사람의 체온이 섞인 냄새가 짙어졌다.

사다리로 이어지는 알게티의 거처 - Studio POPPO
사다리로 이어지는 알게티의 거처 - Studio POPPO

마르는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숙였다. 왕궁에서는 고개를 들어도 닿을 곳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누군가 지나올 때마다 먼저 몸을 옆으로 비켜야 했다.

촌장은 벽의 갈라진 틈에 헝겊을 밀어 넣고 있었다. 루카가 조명을 들자 그가 고맙다는 듯 턱을 움직였다. 젖은 돌 틈으로 바람이 새어 나왔다. 헝겊을 깊이 쑤셔 넣고 나서야 노인이 손을 털었다.

“여기가 알게티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더러 봤지만, 산으로 올라가겠다는 사람은 오랜만이군.”

루카는 낮은 돌 위에 지도를 펼쳤다. 실버드의 위치를 가리키지 않도록 한쪽을 접고, 그들이 들어온 방향만 짚었다. 촌장은 그림의 끝에 손가락을 대더니 엉뚱하게도 자기 발밑을 가리켰다.

“짐승들 둥지를 지나야 하오. 여기서 더 내려가면 동쪽에 굴이 나지. 그 끝에 산을 묶은 사슬이 있소.”

“그걸 타고 올라간다는 말씀이세요?”

“달리 길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노인은 루카에게 종이를 조금 돌려 달라고 했다. 손톱으로 굴이 굽는 방향을 그려 보이며, 짐승이 있는 곳에서는 벽에 바싹 붙어도 안심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바위와 털의 빛깔이 비슷한 데다 사람 머리보다 높은 곳에도 발톱 자국이 남는다고 했다.

“산까지 가 보셨어요?” 마르가 물었다.

“사슬이 시작되는 데까지만. 보슈 님을 데려간 뒤에는 그마저 가까이 못 갔소.”

“왜 가두었는지 아세요?”

촌장은 마르의 목에서 옷 밖으로 나온 펜던트를 보았다. 그러고는 그보다 조금 위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분이 여왕께 옳지 않은 일은 옳지 않다고 말했으니까.”

뒤쪽 굴에서 누군가 기침했다.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목소리를 낮추지는 않은 채 계속했다. 바닷속 신전에 들어가는 자재를 나르러 지상인들이 불려 갔다고 했다. 처음에는 돌아온 이들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그 소식도 뜸했다. 언제 신전이 완성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늘에 있는 분들은 힘이 모자라지 않는다는데, 아래에서 올려 보내는 짐은 자꾸 늘어나오.”

마르는 여왕의 알현실을 떠올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무엇이든 결정할 수 있었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끝난 다음 아래에서 몇 사람이 짐을 들어야 했는지, 그때는 보이지 않았다.

땅의 민족의 이야기를 듣는 일행 - ArrPeeGeeZ
땅의 민족의 이야기를 듣는 일행 - ArrPeeGeeZ

루카가 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내려가기 전에 잘 곳을 빌릴 수 있을까요?”

크로노가 고개를 들었다. 루카는 그의 얼굴보다 그가 한 손으로 누르고 있는 옆구리를 먼저 보았다.

“지금은 사다리 내려오는 것도 힘들었잖아.”

그가 손을 떼려 하자 마르가 팔꿈치를 잡았다. 붙잡은 힘이 약한 것을 스스로 느꼈다. 왕궁에서 받은 상처와 하수도의 피로가 몸속 여기저기에서 뒤늦게 자리를 잡는 듯했다. 따뜻한 국물을 마시고 나니 오히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도 쉬어야 해.” 마르가 말했다. “올라가서 널 치료해 줄 힘까지 남겨 두려면.”

촌장은 옆 굴로 그들을 안내했다. 바닥에는 마른 풀이 두껍게 깔려 있었고, 벽 가까운 자리가 비어 있었다. 크로노는 한동안 입구 쪽을 보더니 칼집을 풀어 잠자리 곁에 놓았다.

세 사람은 신발을 벗기 전부터 할 일이 많았다. 젖은 옷을 말리고, 뜯어진 솔기를 모으고, 가방 안에 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 습기를 닦아야 했다. 크로노가 상의를 걷자 마르는 숨을 들이켰다. 가슴 아래를 가로질러 퍼진 멍이 불빛에서도 선명했다. 상처만 보고 있던 마르에게 그가 붕대 끝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네가 잡고 있어.”

마르는 그의 손에 붕대를 되돌려 주었다. 그가 끝을 눌러 주는 동안 천을 등 뒤로 돌렸다. 너무 조이지 않도록 숨을 크게 쉬어 보라고 하고, 다시 조금 풀었다. 손바닥에 모은 희미한 냉기는 붓고 열 오른 부분만 잠깐 식혔다. 통증이 줄자 크로노의 어깨가 내려갔지만, 몸을 돌릴 때 움찔하는 것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루카는 기다렸다가 마르의 왼팔 붕대도 갈았다. 새 천을 대기 전 손목을 조금 움직여 보게 했다.

“활시위 당길 때 어때?”

“당기는 건 괜찮아. 버티고 있는 게 더 아파.”

“그럼 오래 겨누지 않는 쪽으로 생각하자.”

그 말이 마르는 고마웠다. 활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반박부터 했을지도 몰랐다. 루카는 대신 두 발 남은 금속 화살을 꺼내 휘어진 곳이 없는지 굴려 보았다. 마르는 나란히 놓인 화살을 바라보다가 공구 가방에서 새어 나온 실뭉치를 집었다.

“네 소매도 찢어졌어.”

“그건 아직 붙어 있는 쪽이 많아.”

“팔 줘.”

마르가 말했다. 루카는 이내 팔을 내밀었다. 바늘이 천을 통과할 때마다 소매 안의 팔이 조심스럽게 굽혀졌다. 두 사람이 서로의 옷을 고치는 사이 크로노는 누운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검을 잡지 않은 그의 손이 풀린 것은 한참 뒤였다.

마르는 처음에는 기침 소리와 물방울 소리 때문에 잠들지 못했다. 입구 가까이에서 말린 풀을 뒤집는 소리도 들렸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내일 쓸 땔감의 양을 셌다. 그 숫자를 따라가던 생각이 어느 순간 끊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루카의 안경이 불빛을 가리고 있었다.

“해가 떴대.”

마르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제와 같은 바위였다.

“넌 어떻게 알아?”

“물어봤지.”

루카가 턱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어린아이가 빈 그릇을 모으고 있었다. 마르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자신이 가져온 아침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마르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고, 굳어 있던 팔을 너무 빨리 짚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곁에서는 크로노가 조심스럽게 숨을 늘려 보고 있었다. 눕기 전보다 안색은 나아졌지만 아직 깊이 들이마시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아침을 먹고도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촌장이 알려 준 길을 다시 확인하고, 걷는 데 필요한 만큼 짐을 나눴다. 크로노가 가장 무거운 가방을 들려 하자 루카는 지도와 조명을 그의 손에 얹었다.

“앞에서 이것 좀 봐 줘. 사슬에 올라가서는 내가 다시 들게.”

마르에게는 물주머니와 가벼운 마른 음식이 돌아왔다. 자신이 들 수 있는 무게를 골라 허리에 묶고 나니, 크로노가 혼자 짐을 다 들고 먼저 가는 것보다 훨씬 빨리 준비가 끝났다.

출발하기 전 세 사람은 가죽을 꿰매던 여자의 불가를 다시 찾았다. 여자는 마르가 내민 빈 그릇을 받으며 신발을 가리켰다.

“밑창 보여 줘 봐.”

닳은 가죽이 젖은 바위에서 미끄러질 거라고 했다. 여자는 짧은 가죽끈을 꺼내 발 앞쪽을 감는 법을 보여 주었다. 매듭이 밑으로 내려오지 않게 한 번 더 당겨 주는 손이 거칠었다. 크로노는 그 곁에 앉아 같은 방식으로 자기 신발을 묶었다.

루카가 긴 밧줄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옆방에서 짐을 묶던 줄 한 동아리를 가져왔다. 올이 풀린 곳을 함께 살펴본 뒤 루카가 묶는 법을 다시 익혔다. 그것으로 무엇이든 매달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사히 내려오면 돌려줘.”

마르는 줄을 받다가 손을 멈췄다. 여자는 벌써 다른 가죽을 무릎 위에 펴고 있었다.

아래쪽 통로에는 창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촌장의 말을 전해 듣고 한 걸음 물러났다. 바로 뒤에서 마을의 불빛이 끊겼다. 루카가 조명을 들자 낮은 바위턱과 물에 씻긴 발자국이 드러났다.

짐승의 둥지로 향하는 알게티 아래쪽 길 - Studio POPPO
짐승의 둥지로 향하는 알게티 아래쪽 길 - Studio POPPO

“발밑만 보지 마시오.” 남자가 말했다. “머리 위에 매달리는 놈도 있으니.”

크로노가 먼저 통로를 살폈다. 곧바로 나아가지 않고 셋이 설 수 있는 평평한 곳을 골라 발을 디뎠다. 마르는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뒤따랐다. 몇 번 굽은 길을 지나자 사람 사는 냄새가 사라지고, 축축한 털과 오래된 뼈에서 나는 냄새가 대신 들어왔다.

바닥에 난 홈은 짐을 끌고 간 자국처럼 보였다. 그러나 홈은 돌 앞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위로 이어졌다. 조명이 따라 올라가자 바위에 걸린 굵은 발가락이 보였다.

짐승은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이 붙어 있었다.

크로노가 손바닥을 펴 보였다. 마르와 루카가 멈췄다. 짐승의 등에 엉긴 먼지가 바위와 똑같은 빛깔이었다. 눈이 먼저 움직였다. 이어 뒷다리가 접히자 크로노는 오른쪽 빈 곳을 가리켰다.

셋이 갈라서는 순간 짐승이 떨어졌다. 앞발이 바닥을 때리며 깨진 돌을 튀겼다. 크로노는 목을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짐승이 돌아서는 속도를 보고 한 걸음 물러났다. 긴 팔이 방금 그의 허리가 있던 곳을 훑었다. 마르는 화살에 얹었던 손을 떼고 바닥 가까이 냉기를 보냈다. 젖은 돌이 얼자 짐승의 뒷발이 옆으로 벌어졌다.

루카의 불이 그 틈으로 파고들었다. 털 끝이 타며 시큼한 냄새가 났고, 짐승은 고개를 젖힌 채 더 세차게 앞발을 휘둘렀다. 크로노의 칼끝이 팔 바깥을 스쳤지만 그것으로는 막지 못했다. 오히려 몸을 낮춘 짐승이 바위를 밀어낼 듯 달려들었다.

마르는 뒤에 있던 굴 입구를 돌아보았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피하기에는 좁았다.

“크로노, 이쪽으로 오지 마!”

그가 달리는 방향을 꺾었다. 루카가 손을 들어 기다렸고, 마르는 냉기를 넓히는 대신 이미 얼린 곳을 다시 굳혔다. 짐승이 크로노를 따라 몸을 틀다가 미끄러지는 순간, 불길이 벌어진 앞다리 사이를 덮쳤다. 크로노는 타격이 들어간 것을 보고 다가가 짐승의 몸 아래로 검을 밀어 넣었다. 무게가 쏠리기 전에 빠져나왔으나 자세를 펴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짚었다.

굴 안에서 맞닥뜨린 짐승들 - Studio POPPO
굴 안에서 맞닥뜨린 짐승들 - Studio POPPO

마르는 쓰러진 짐승을 지나 그에게 갔다. 크로노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보였지만, 마르는 그 손이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호흡을 확인했다.

“조금씩 다치게 해서는 더 거칠어져.” 루카가 말했다.

그녀도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조명을 다시 들어 올리자 굴 안쪽에 더 깊은 발톱 자국이 보였다. 크로노는 바로 일어서지 않았다. 셋은 마른 바닥으로 물러나 물을 조금씩 마셨다. 앞에 무엇이 더 있든 방금과 같은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마르는 활을 등에 고쳐 걸었다. 남은 화살 두 발이 화살통 안에서 부딪쳤다. 돌 틈에 고인 물을 보고, 루카가 불을 보냈던 방향을 눈으로 되짚었다. 이제는 어둠 속의 짐승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움직일 자리도 먼저 찾아야 했다.

세 사람이 다시 걸을 때 굴 저편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길고 낮은 울림이 발바닥까지 전해졌다. 마르는 그것이 촌장이 말한 사슬에서 나는 소리인지 생각하며, 앞사람과의 간격을 조금 줄였다.

참고자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