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48화] 돌아갈 사람의 자리

첫 번째 빛은 사람의 키보다 낮은 곳에 떠 있었다.

크로노가 가까이 가자 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말소리에는 숨을 고르는 간격까지 같은 크기로 남아 있었다. 루카는 빛을 만지려던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을 질 왕국의 현자 가슈라고 밝혔다.

마르가 크로노를 돌아보았다. 검은새호를 만든 사람. 카자르의 학자가 그 이름을 말할 때 손짓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르는 질문하기도 전에 두 번째 빛으로 발을 옮겼다.

노인은 자신이 원치 않은 시대에 떨어졌다고 했다. 하늘의 나라에서 살던 몸은 차가운 폐허를 쉽게 견디지 못했고, 돌아갈 방법을 찾는 동안 사람의 말소리보다 기계음을 더 많이 들었다고 했다. 말을 잇던 중 목소리가 한 번 끊겼다.

루카는 불빛 아래의 벽을 살폈다. 손으로 고쳐 끼운 작은 부품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 처음부터 하나의 장치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크기가 다른 고정쇠 사이에 얇은 금속 조각을 끼워 빈틈을 메웠고, 닳아 없어진 연결부에는 전선을 여러 번 감아 놓았다.

“여기 있는 걸로 만든 거야.”

루카가 아주 낮게 말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들을 수 없었다.

세 번째 빛에서는 라보스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생물은 오래전 땅속에 들어간 뒤 행성의 힘을 빨아들이며 살아왔다. 질에서 끌어 썼던 힘도 그 일부였다. 노인은 이 시대의 멸망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남아 있는 기록과 관측으로 알아냈다고 했다.

마르는 여왕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든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하던 얼굴. 가슈는 같은 곳에서 왔지만 무너진 세계에 머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 했다. 이 복도의 부품들은 그가 살펴본 폐허에서 하나씩 가져온 것일 터였다.

뒤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푸른 누가 문턱을 넘어오고 있었다. 작은 발이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을 디뎠다. 마르는 손의 움직임을 보았다. 짧은 팔이 걸음에 맞춰 똑같은 높이로 흔들렸다.

누는 그들을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크로노가 비켜 주자 멈추지 않고 네 번째 빛 옆에 섰다.

노인의 목소리는 그곳에서 조금 더 느렸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작한 것이 이제 거의 완성되었다고 했다. 다만 자신의 몸이 끝까지 버텨 줄 것 같지 않다는 말이 이어졌다.

마르는 앞방의 의자에 걸린 외투를 생각했다. 사람이 다시 돌아와 어깨에 걸칠 옷처럼 남겨져 있었다.

마지막 기록에서 가슈는 누군가 이곳에 도착하리라는 기대를 말했다. 언제 올지, 어떤 사람일지 알 수 없지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이라면 남긴 것을 쓸 수도 있으리라고 했다. 서둘러 당부를 끝내려는 듯 말이 빨라졌다가, 마지막에 다시 한 번 길게 멎었다.

루카는 그 침묵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더 이상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누가 입을 열었다.

“다 들으셨습니까?”

음성은 복도에 남아 있던 것과 달랐지만 말끝에 오래 묵은 피로가 비슷하게 걸려 있었다.

“가슈 님은 어디 계세요?”

마르가 물었다. 답을 짐작하면서도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몸은 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필요한 기억과 작업 순서는 제 안에 남겨 두셨습니다.”

루카가 무릎을 굽혀 누와 눈높이를 맞췄다. 옆구리의 이음매에서 금속이 조금 보였다. 살아 있는 누의 모습으로 만든 기계였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분이 하던 일을 네가 계속한 거야?”

“마무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누가 돌아섰다. 짧은 발을 옮기며 어두운 복도의 끝으로 갔다. 마르는 뒤따르다가 하나의 빛 앞에서 멈췄다. 가까이 지나가니 노인의 말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키퍼의 돔에서 실버드로 돌아가는 길 - Vorxu
키퍼의 돔에서 실버드로 돌아가는 길 - Vorxu

그녀는 물러났다.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맨 끝의 봉인 문은 앞의 것보다 컸다. 마르가 펜던트를 대자 검은 표면이 두 줄로 갈라졌다. 문 뒤에 고여 있던 조명이 하나씩 켜지며 넓은 공간을 드러냈다. 높은 천장 아래로 금속 뼈대가 길게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움직이는 받침대와 굵은 줄들이 놓여 있었다.

가운데에 배가 있었다.

벨사자르의 작업장 뒤에서 실버드에 오르는 일행 - Vorxu
벨사자르의 작업장 뒤에서 실버드에 오르는 일행 - Vorxu

마르는 먼저 검은새호를 떠올렸다가, 눈앞의 것이 훨씬 작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길고 단단한 몸통의 앞부분은 매끈하게 모였고, 뒤에는 둥근 기관들이 붙어 있었다. 사람이 앉을 자리를 투명한 덮개가 감싸고 있었다. 돔 안의 낡은 장치들 가운데 이것만은 먼지가 닿지 않은 빛을 냈다.

루카가 가까이 가서 발을 멈췄다. 보통은 처음 보는 기계 앞에서 말이 많아졌다. 지금은 배의 아래를 보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가 옆으로 몇 걸음 이동할 뿐이었다.

크로노도 기체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대지는 않았다. 선체 옆에 놓인 작은 작업대에는 쓰다 남은 부품과 안경이 있었다. 한쪽 다리를 철사로 고친 안경이었다. 그는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작업대 안쪽으로 밀어 놓았다.

“시간을 건너는 배입니다.”

누가 말했다.

마르는 투명한 덮개를 올려다보았다.

“문이 닫혀 있어도?”

“시간의 문을 거치지 않습니다.”

루카가 기관 아래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질문을 한꺼번에 하지 않았다. 선체와 바닥의 고정 장치 사이를 번갈아 보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부터 골랐다.

“움직일 준비는 끝났어?”

“마지막 점검은 마쳤습니다. 탑승자의 조작이 필요합니다.”

누가 벽의 손잡이를 당겼다. 낮은 마찰음과 함께 좌석이 놓인 받침대가 앞으로 나왔다. 세 자리가 있었다. 마르는 그 수를 세고 나서 다른 곳에 더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없었다.

“셋이 타는 거네.”

“현재 탑승자는 세 사람입니다.”

누의 대답에 루카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웃음에 가까웠지만 웃을 기운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로보가 들었으면 정확한 답이라고 했겠어.”

마르는 좌석의 등받이를 만졌다. 단단한 틀 위에 닳지 않은 천이 씌워져 있었다. 돌아가면 누구를 찾으려 했을까. 마르는 빈 좌석의 팔걸이를 잠시 쥐었다.

루카가 받침대 옆에서 누에게 물었다.

“먼저 확인해도 될까? 조작하다가 잘못 건드리고 싶지 않아.”

누는 짧은 팔로 위쪽을 가리켰다. 루카가 발판에 올라갔다. 몸을 굽혀 안을 들여다본 뒤 뒤쪽 고정쇠를 살폈다. 빛이 들어오는 장치는 작동하고 있었고, 의자와 덮개가 맞물리는 부분도 걸리는 곳이 없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부품을 억지로 열지 않았다. 한참 뒤 내려와 안경을 밀어 올렸다.

“내가 원리까지 알아냈다고 말할 수는 없어.”

크로노는 기다렸다.

“그래도 고장 난 채 버려진 배는 아니야. 누가 계속 돌봤어.”

그녀의 시선이 누에게 향했다. 작은 생물은 벽의 표식을 보고 있었다. 기다리라는 순서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크로노는 가운데, 마르는 왼쪽, 루카는 오른쪽이었다. 등받이의 각도는 생각보다 깊었다. 다리를 앞으로 뻗자 몸이 안정되었다. 크로노는 옆구리가 닿는 띠의 위치를 고쳤고 마르는 왼팔을 바깥으로 빼지 않도록 손을 무릎에 올렸다.

받침대가 천천히 올라갔다.

위에서 보던 선체가 양옆으로 내려오며 세 사람을 감쌌다. 의자가 제자리에 맞물리는 소리가 세 번 났다. 루카는 그 소리를 하나씩 들었다. 마지막 자리에서 조금 늦게 소리가 나자 아래를 보았고, 누가 고정 장치를 한 번 더 눌렀다.

누는 기체 옆의 높은 발판으로 올라왔다. 짧은 손가락이 앞의 둥근 계기를 가리켰다.

“원하는 시대를 고릅니다. 지시침을 맞춘 뒤 가운데 손잡이를 누르십시오.”

계기 둘레에는 여러 시대가 표시되어 있었다. 루카가 글자와 수를 짚으며 마르에게 읽어 주었다. 서기 천 년, 육백 년, 이천삼백 년. 멀리 돌아 나간 눈금에는 에이라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만 이천 년을 가리키는 표시가 있었다.

실버드의 시대 선택 계기 - Vorxu
실버드의 시대 선택 계기 - Vorxu

마르의 손가락이 그곳에 멎었다.

“사라가 있는 곳.”

루카가 그녀를 보았다.

“먼저 익숙한 시대에서 움직이는 걸 확인할 수도 있어.”

마르는 목걸이를 옷깃 안으로 넣었다. 사라는 그들을 살려 보낸 뒤 신전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두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왕궁에서 배웠지만, 그렇다고 이 배 앞에서 계속 기다릴 수는 없었다.

“돌아가서 지상 사람들부터 만나자. 위로 바로 올라가지는 말고.”

실버드에서 내릴 장소를 고르는 장면 - Vorxu
실버드에서 내릴 장소를 고르는 장면 - Vorxu

크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검을 제대로 쥐고 오래 싸우기도 어려웠다. 사람들을 만나 보슈가 갇힌 곳과 신전의 상황을 알아보는 일부터 할 수 있었다.

루카는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방금 들은 조작 순서와 선택할 시대를 적고 좌석 옆에 끼워 두었다. 움직이는 동안에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한 번에 하나씩 하자.”

누가 덮개의 테두리를 살피다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은 그대로 기다렸다. 크로노가 손잡이를 쥔 채 눈을 들어 보았으나 움직임이 없었다.

마르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기.”

누는 눈을 떴다.

“설명을 계속합니다.”

루카가 참지 못하고 짧게 웃었다. 고요한 격납고에서 그 웃음이 뜻밖에 크게 들렸다. 누는 신경 쓰지 않고 계기 옆의 작은 표시를 가리켰다. 빛이 안정된 뒤에 출발해야 했고, 덮개가 닫히는 동안에는 손을 밖에 내밀면 안 되었다.

“이 배의 이름은 실버드입니다.”

마르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한 번 불렀다. 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남겨 둔 순서에 들어 있는 대답인지, 새로 들은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루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하늘도 날 수 있어?”

“비행 기능은 없습니다. 이 배가 건너는 것은 시간입니다.”

루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작판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바닥의 받침대와 선체를 다시 살폈다.

누가 발판을 내려갔다.

크로노는 천천히 지시침을 옮겼다. 기원전 만 이천 년의 표시에 닿자 조작판 안쪽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마르는 좌석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마도기 앞에서 들었던 박동이 떠올라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 진동에는 사라의 숨을 빼앗던 불규칙한 떨림이 없었다.

루카가 계기의 빛을 확인했다.

“아직.”

크로노의 손이 멈췄다. 두 번 깜박이던 작은 불빛이 하나로 가라앉았다.

“이제 됐어.”

그는 손잡이를 눌렀다.

투명한 덮개가 내려왔다. 누의 모습이 곡면 너머로 조금 작아졌다. 마르는 누가 주인의 빈 의자로 돌아갈지 궁금했다.

선체 뒤의 기관에서 빛이 번졌다. 격납고의 벽은 그대로 있는데 거리만 길어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 달려간다는 느낌이 들기 전에 작업대와 누, 봉인 문이 가느다란 선으로 늘어났다. 마르는 천천히 숨을 뱉었다.

빛이 배의 양옆을 스쳤다.

문을 건널 때처럼 몸이 흩어지지는 않았다. 발바닥에는 발판이 있었고, 손을 내밀면 크로노의 소매가 닿았다. 루카는 눈을 크게 뜬 채 계기를 보고 있었다. 크로노가 그녀 쪽으로 손을 움직이려 하자 루카는 손잡이에서 떼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르는 손을 거두어 무릎에 놓았다.

진동이 잦아들었다. 눈앞이 한 번 희어졌다가 깊은 회색으로 가라앉았다. 덮개 너머에 눈이 붙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루카가 종이에 적힌 순서와 꺼진 계기를 확인하고 숨을 내쉬었다. 크로노가 조작부에서 손을 떼자 덮개가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마르는 그 냄새를 알아보았다. 재도 녹슨 쇠도 섞이지 않은, 코 안쪽이 아릴 만큼 깨끗하고 매서운 공기였다.

눈앞에 얼어붙은 평원이 펼쳐졌다.

실버드는 낮은 바위 능선 옆에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이 내리자 눈이 발목 위로 올라왔다. 크로노는 뒤를 돌아 기체가 사라지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둥근 선체 위에 눈가루가 얇게 내려앉고 있었다. 돌아갈 배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마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너머의 빛이 잠깐 옅어졌다가 다시 가려졌다. 저 위에 질 왕국이 있었다. 아직은 떨어지지 않은 나라였다.

루카는 내려온 발판을 접고 기체가 놓인 자리를 지도에 표시했다. 바위 능선의 모양도 작게 그렸다. 크로노는 눈에 묻히지 않을 만한 돌을 골라 옆에 세웠다.

세 사람은 바람을 등지고 걸었다. 멀리 보이는 하늘길까지 갔지만 입구는 닫혀 있었다. 마르가 손을 대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예언자가 막은 것이 동굴의 문 하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펜던트를 꺼내려다 멈췄다. 루카와 크로노도 억지로 열자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흔적을 따라 방향을 바꿨다. 모피를 묶은 짐이 지나간 자국이 눈 위에 두 줄로 남아 있었다. 오래되지 않았다. 바람에 지워지기 전에 따라가자 비탈 아래로 낮은 입구가 보였다.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마르는 몸을 굽혀 먼저 이름을 불러도 될지 망설였다. 누가 사는지 알지 못했다. 대신 문가의 나무를 손등으로 두드렸다.

잠시 뒤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모피를 두른 여자가 작은 틈을 열었다. 그녀는 세 사람의 얼굴보다 다리와 손을 먼저 살폈다. 피가 새로 흐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자리를 비워 달라고 말했다.

“눈부터 털고 들어와요. 불이 작아서 옷까지 말리려면 오래 걸려요.”

마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크로노가 그녀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 주고 루카가 젖은 신발 끝을 문턱에 두드렸다. 여자는 그들이 서두르지 못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안쪽에 세 사람이 앉을 자리가 생겼다. 마르는 불 가까이에 두 손을 내밀었다가 손가락을 조금 폈다. 사라에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살아 있으라는 말. 이제 이곳에 돌아왔으니 그 말 다음에 할 일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불 맞은편의 여자에게 물었다.

“탄식의 산으로 가려면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나요?”

참고자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