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47화] 먼지 속에 남은 문양
루카는 종이 위에 문양 두 개를 그렸다.
왼쪽 것은 미래의 돔에서 베껴 두었던 그림이었다. 오른쪽 것은 마르가 기억을 더듬어 그린 질 왕궁의 문이었다. 종이 아래에는 공구 가방을 받쳐 놓았다. 바닥의 돌 틈 때문에 선이 흔들리자 루카가 종이를 돌렸고, 마르는 아직 비어 있는 아래쪽 곡선을 손톱으로 짚었다.
“여기가 조금 더 길었어.”
루카가 선을 고쳤다. 두 그림은 이제 닳은 정도만 달랐다.
화로 맞은편에서 가스파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에이라에게 의자를 내주었으나 에이라는 불 옆 바닥에 앉는 편을 택했다. 로보는 그녀의 다리 아래에 가죽을 깔아 주었다. 종아리를 구부릴 때마다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눕혀 두었던 짐을 발밑으로 옮겨 높이를 맞췄다.

“저기서는 아무도 이걸 만들 줄 몰랐어요.”
루카가 그림을 가스파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옛날 궁전에 같은 게 있어요. 누군가 기술을 전했거나, 물건 자체가 오래 살아남았거나.”
“문이 있다면 만든 자가 있었겠지.”
가스파가 말했다. 루카는 그를 보았다.
“오늘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없어요?”
노인은 종이의 가장자리를 펴 주었다.
“미래의 남쪽에 작은 돔이 있네. 오래도록 자기 시대에 돌아가고 싶어 했던 자가 머물렀지. 문을 열 물건이 생겼다면 그곳에 가 보게.”

“그 사람이 돌아갈 방법을 찾았나요?” 마르가 물었다.
가스파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화로 안에서 장작이 갈라지며 한쪽으로 무너졌다. 에이라가 나무토막을 돌려 다시 불이 닿게 했다.
“그가 무엇을 남겼는지는 직접 보는 편이 좋겠군.”
루카는 더 캐묻고 싶었으나 종이 위의 두 그림을 다시 보았다. 답을 기다릴 대상이 눈앞의 노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르는 팔에 새로 감은 붕대를 당겨 보았다. 어젯밤보다 덜 아팠다. 기운이 돌아왔다고 해서 화상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고, 크로노도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먼저 옆구리를 짚었다. 루카는 그가 외투를 입기 전에 매듭이 조이지 않는지 살폈다.
“이번에는 내가 같이 가.”
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펜던트와 미래의 문을 아는 자신, 장치를 살필 루카가 필요했다. 크로노는 검을 허리에 걸었다. 에이라가 일어나려 하자 그가 그녀의 종아리 쪽을 보았다.
에이라는 손바닥을 들어 그를 멈췄다.
“안 간다. 다리부터 낫는다.”
마르가 의외라는 얼굴을 하자 에이라는 가죽 위로 다리를 쭉 폈다.
“다시 그 큰 놈 만나면, 이번에는 안 넘어진다.”
카에루가 웃음을 누르며 옆에 앉았다. 그는 그랜드리온을 손이 닿는 곳에 놓았지만 칼집에서 꺼내지는 않았다. 마르는 예언자에 관해 물어보고 싶다가 그만두었다. 카에루도 지금은 대답보다 기다림을 골랐다.
로보는 남쪽 폐허의 지형을 종이에 덧그렸다. 끊어진 지상 도로 대신 하수도를 따라가면 산 아래의 돔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오래된 기록이라 길이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돌아오시면 바뀐 곳을 알려 주십시오.”
루카가 지도를 접었다.
“직접 걸어 본 지도 하나 만들자.”
그들은 아리스 돔 쪽으로 이어지는 빛에 들어섰다. 마르는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에이라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불을 쬐고 있었고, 카에루와 로보가 그 양옆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두고 간다는 생각이 들다가, 돌아올 자리가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미래의 공기는 여전히 메말라 있었다.
기둥의 빛이 걷히자 금속 지붕의 녹슨 틈과 먼지 낀 조명이 나타났다. 낮은 통로를 건너 사람들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마르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데운 쇠와 축축한 천, 오래 비어 있던 그릇에서 나는 냄새였다. 질 왕국에서 이곳 이야기를 했지만 여왕에게는 닿지 않았던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까운 벽 아래에서 아이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앞에는 흙을 담은 낡은 통이 놓여 있었다. 작은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이는 물을 붓지 않고 젖은 천을 꼭 짜서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마르는 옆에 앉았다.
“자라고 있네.”
아이는 통을 가리지 않았다. 대신 손으로 빛을 막던 팔을 비켜 주었다.
“어제도 이만했어.”
“내일은 다를지도 몰라.”
말한 뒤 마르는 싹을 좀 더 자세히 보았다. 흙 가까운 줄기에서 새 잎이 아주 작게 접혀 있었다. 그녀가 가리키자 아이가 몸을 바짝 숙였다. 둘은 잠깐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보았다.
돔의 노인이 다가왔다. 그는 세 사람에게 내줄 음식이 없다고 먼저 말했다. 크로노는 선사시대에서 챙겨 온 말린 고기 일부를 꺼내 놓았다. 노인은 곧장 집지 않고 손바닥을 옷에 닦았다.
루카는 지도를 펼쳤다.
“남쪽 돔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어요. 누가 사는 곳이라고 들었는데요.”

노인이 굽은 손가락으로 산 아래의 표시를 짚었다.
“감시자의 돔 말이구먼. 예전에 늙은 사람이 있었지. 요즘도 불이 켜지는지는 모르겠네. 저쪽으로 가는 사람은 드물어.”
그는 지상 도로 가운데 끊어진 곳을 손톱으로 그었다. 로보가 짐작한 대로였다. 남은 길은 하수도뿐이었다. 노인은 옆 통에서 가느다란 금속 화살 몇 개를 꺼냈다. 끝은 뭉툭했으나 몸통은 반듯했다.
“전에 사냥하던 자들이 남겼네. 빈 통을 메고 가는 것보다 낫겠지.”
마르는 길이와 무게를 살피고 활에 걸어 보았다. 손에 익은 것보다 무거웠다. 그녀는 네 개만 골라 화살통에 넣었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도록 통 안에 돌려놓았다.
돔 밖의 바람은 눈보라와 달리 아무것도 덮어 주지 않았다. 부서진 도로와 드러난 철근, 뒤집힌 차량의 속까지 먼지를 밀어 넣었다. 크로노는 한동안 위를 보았다. 하늘에 떠 있던 섬이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려 했으나 회색 구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수도 입구는 낮은 언덕의 옆구리에 있었다. 덮개를 들어 올리자 차고 눅눅한 바람이 나왔다. 루카가 작은 등을 켜 먼저 아래를 비추었다. 사다리 몇 단은 빠져 있었지만 바닥까지 이어지는 틀은 남아 있었다.
그들은 짐을 먼저 내려 보냈다. 크로노는 옆구리를 비틀지 않도록 한 발씩 옮겼고, 마르는 왼팔 대신 오른손으로 체중을 받쳤다. 마지막으로 내려온 루카가 덮개를 완전히 닫지 않은 채 돌 하나를 끼웠다. 뒤로 돌아와야 할 경우를 위해서였다.
안쪽에서는 물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천장에 맺힌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어둠 속에서 다른 소리가 응답했다. 루카가 걸음을 멈추자 그 소리도 멎었다. 마르는 화살을 꺼냈다. 깃 대신 붙은 얇은 금속 날개가 손가락에 차갑게 닿았다.
갈림길의 난간에는 마른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누군가 물을 길러 다니며 남긴 표시 같았다. 크로노는 그쪽으로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왼쪽 물속에서 두 개의 작은 눈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등 낮춰.”
그의 말에 루카가 불빛을 바닥 가까이 내렸다. 좁은 통로 너머에 그림자가 길게 생겼다. 발이 많은 생물이었다. 서로 다른 간격으로 움직이는 다리들이 벽을 더듬고 있었다.
마르는 숨을 고르고 앞을 겨눴다. 첫 화살은 생각보다 낮게 날았다. 괴물의 머리 대신 등껍질을 때리고 튕겨 물속에 떨어졌다. 그녀는 어깨를 조금 들었다. 두 번째를 걸기 전에 루카가 손등으로 그녀의 팔을 가볍게 쳤다.
“기다려. 좁은 데로 들어오게 하자.”
통로 끝에서 날카로운 긁는 소리가 났다. 물속에 있던 작은 생물들이 흩어지고, 그 뒤에서 훨씬 큰 몸이 솟아올랐다. 넓은 등껍질에 달린 가시가 천장에 닿았다. 크로노는 루카가 본 그림자가 한 마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괴물은 다리로 벽을 밀며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크로노가 앞으로 나서자 긴 집게가 양옆으로 벌어졌다. 그는 검으로 한쪽을 받았다. 다른 쪽이 몸을 감싸려 하자 뒤로 물러났지만 굽은 끝이 외투에 걸렸다.
순간 몸이 통로 밖으로 끌려 나갔다. 검끝이 난간에 부딪치며 불꽃을 냈다. 괴물의 집게가 가슴과 허리를 함께 조였다. 크로노는 숨을 뱉은 뒤 다시 들이마실 수 없었다. 다친 옆구리가 눌리자 눈앞에 물빛과 불빛이 한데 번졌다.
마르는 두 번째 화살을 놓았다. 이번에는 껍질을 겨누지 않았다. 벌어진 집게 안쪽의 얇은 마디에 화살이 박혔다. 조이던 힘이 잠깐 느슨해졌다. 루카가 손바닥을 뻗어 그 틈으로 짧은 불길을 보냈다.
뜨거워진 집게가 벌어졌다. 크로노가 난간에 걸친 채 떨어지자 마르가 외투를 잡아 통로로 끌었다. 그는 기침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마르는 활을 내려놓고 가슴에 손을 댔다. 차가운 물기가 손바닥 아래로 모였다. 숨이 조금씩 돌아왔으나 얼굴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루카는 두 사람 앞을 지켰다. 괴물이 고개를 낮추면 머리 가까이에 불을 만들고, 물러나면 힘을 거뒀다. 계속 태울 힘은 없었다. 상대가 어느 쪽 벽에 발을 디디는지 보면서 한 걸음씩 뒤로 움직였다.
크로노가 마르의 손목을 잡았다.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손에 힘이 없었다. 대신 그가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괴물의 앞쪽 두 다리가 낮은 배수구 위에 걸쳐 있었다. 무거운 몸을 끌고 오느라 그 다리들이 번갈아 같은 틈을 짚었다.
마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에 손을 댔다. 얕은 물이 얼며 배수구와 다리 끝을 함께 감쌌다. 루카가 등불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괴물은 불이 오는 줄 알고 몸을 틀다가 붙잡힌 다리를 억지로 빼려 했다. 배 아래가 드러났다.
크로노가 일어섰다. 달려들지는 않았다. 난간을 붙잡고 균형을 세운 뒤 검을 두 손으로 짧게 쥐었다. 괴물이 얼음을 부수며 앞으로 쏠릴 때, 그 무게가 내려오는 자리에 날을 밀어 넣었다.
긴 몸이 뒤틀렸다. 루카가 크로노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앞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바로 앞을 지나갔고, 괴물은 난간을 부순 채 아래 수로로 떨어졌다. 물이 솟아 등불까지 덮쳤다. 루카가 불을 감싸는 동안 크로노와 마르는 벽에 붙어 움직임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곧장 출발하자고 하지 않았다.
크로노가 벽에 앉아 숨을 돌렸다. 루카는 젖은 외투를 들어 붕대를 확인했다. 상처가 다시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눌린 자리에 검붉은 멍이 번지고 있었다. 마르는 남은 두 화살을 세고, 수로 가장자리에 떨어진 빈 활을 주웠다.
“한 번에 될 줄 알았어.”
그녀가 말했다. 첫 화살이 튕겼던 자리를 보고 있었다.
루카는 등불 유리를 닦았다.
“달랐잖아. 무게도, 거리도.”
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화살을 쏠 때 높이를 고친 손목의 감각을 기억해 두었다. 크로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녀는 먼저 팔을 내밀었다. 그는 이번에는 곧장 잡았다.
지상으로 나가는 사다리 앞에서 루카가 지도를 폈다. 젖은 종이 위에 방금 지난 갈림길과 무너진 난간을 표시했다. 로보에게 보여 줄 지도가 조금 달라졌다.
밖은 들어올 때보다 더 어두웠다. 산의 그림자가 돔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꼭대기에는 눈처럼 흰 것이 붙어 있었지만 바람에 날리는 모양은 재와도 닮았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고 싶은 풍경은 아니었다.
감시자의 돔은 다른 돔보다 작았다. 바깥문을 밀자 경첩이 오래된 소리를 냈다. 안쪽에는 침상과 낮은 책상, 크기가 제각각인 공구들이 있었다. 의자 등에는 누군가 벗어 둔 외투가 걸려 있었다. 손으로 잡는 부분만 닳아 밝은 빛이 드러난 공구 하나가 책상 끝에 놓여 있었다.
루카가 손을 가져갔다가 멈췄다.
“계세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둥근 푸른 생물이 벽 곁에 서 있었다. 질 왕궁에서 보았던 누와 닮았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세 사람이 들어오는 동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르는 그 뒤의 검은 문을 보았다.
루카가 종이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먼지 사이로 드러난 선들이 기억과 맞았다. 마르는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왼팔을 높이지 않으려고 문 가까이 몸을 붙였다. 푸른 돌에서 나온 빛이 닳은 홈을 천천히 채웠다.

아주 오래 걸려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나온 공기에는 먼지가 거의 없었다. 어둠 속 바닥 가까이 작은 빛 하나가 켜졌다. 그 뒤로 두 번째, 세 번째가 멀리 이어졌다. 크로노는 발끝을 문턱 위에 올렸다가 돌아보았다.
마르는 펜던트를 가슴에 내려놓았다. 조금 전 아이가 새 잎을 들여다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이 시대에 더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과 함께 첫 번째 빛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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