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46화] 닫힌 문 바깥의 불
마르는 발바닥에 돌의 차가움이 닿아서 눈을 떴다.
몸을 가두었던 빛이 무릎 아래에서 얇게 풀리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받쳤다. 사라였다. 그녀는 마르를 바닥에 앉히고 손목을 짚었다. 왼팔에 감긴 천을 건드릴 때에는 손을 한 번 멈췄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마르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옆을 보았다. 크로노가 바닥에 누워 있었고, 에이라는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거칠게 숨을 쉬었다. 세 사람 위에 떠 있던 빛의 구체가 차례로 꺼졌다. 사라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광채가 크로노의 어깨를 덮었다. 경련하던 손가락이 조금씩 펴졌다.
방에는 창이 없었다. 벽 위쪽의 작은 틈으로 물이 흐르는 소리만 들어왔다. 알현실에서 옮겨지는 동안의 기억은 없었다. 마르는 목덜미를 더듬었다. 펜던트는 그대로였고, 활은 크로노의 검과 함께 문 옆에 세워져 있었다.
쟈키가 그 옆에 서 있었다. 알파드는 소년의 발목 가까이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마르가 몸을 일으키자 소년은 검을 집어 들었다. 무거운지 칼집 끝을 바닥에 끌면서 크로노 옆으로 가져왔다.
“떨어뜨렸어.”
크로노가 손을 뻗었다. 쟈키는 그 손이 칼집을 제대로 잡는지 확인하고 놓았다.
사라는 에이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에이라는 처음에는 피하려 했지만, 마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만히 있었다. 눌려 있던 가슴이 조금 편해진 듯 숨이 길어졌다. 종아리의 붕대에 배어난 피는 없어지지 않았다.
“깊은 상처까지 낫게 할 시간은 없어요.”
“너도 힘 없다.” 에이라가 말했다.
사라가 손을 거뒀다. 그제야 마르는 그녀의 손목이 떨린다는 것을 보았다. 알현실에서는 긴 소매가 가리고 있던 떨림이었다.
“마도기를 움직이려면 제가 필요해요. 어머니는 곧 다시 부르실 거예요.”
“그럼 가지 마요.”
말하고 나서 마르는 사라 뒤에 선 소년을 보았다. 쟈키는 누나 대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에게 얼마나 여러 번 했을지 모를 말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사라는 바닥에 떨어진 천을 주워 마르의 팔에 덧댔다.
“제가 거기 없으면 멈추게 할 사람도 없어요.”
“당신이 있어도 멈추지 않잖아요.”
천을 매던 손이 멎었다. 마르는 곧 미안하다고 할 뻔했으나 삼켰다. 사라가 모를 리 없는 일이었다. 안다고 해서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왕궁을 뛰쳐나올 수 있었지만, 이 사람 뒤에는 동생이 서 있었다.
사라는 매듭을 마저 묶었다.
“보슈 님이라면 방법을 찾으실 거예요. 라보스의 힘을 가장 오래 살펴 오셨으니까요.”
“어디 계세요?”
“탄식의 산에 갇혀 계세요. 어머니를 말리다가…….”
문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사라가 일어나기도 전에 검은 옷자락이 문턱을 넘어왔다.
예언자는 열린 감옥과 세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놀라지 않았다. 쟈키가 누나 앞으로 나서자 그의 시선이 잠깐 소년에게 머물렀다. 크로노는 검을 쥔 채 무릎을 세웠다. 예언자의 오른손이 올라가는 방향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왕성에서 그 손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먼저 식었다.
“한 번 풀어 주면 달라질 줄 알았나.”
그 말이 사라를 향한 것인지 자신들을 향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에이라가 일어났다. 예언자의 소매 끝에 어둠이 맺혔다. 바닥의 작은 돌가루들이 그 아래로 미끄러졌다.
사라가 두 팔을 벌리고 사이에 섰다.
“죽이지 마세요.”
“비켜라.”
“이 사람들을 죽이시면 저도 협력하지 않겠어요.”
예언자의 손이 멈췄다. 사라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르에게 붕대를 매 주던 손끝은 떨렸지만 팔을 내리지는 않았다. 쟈키가 누나의 소매를 잡았다.
“싫다고 했잖아.”
한동안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예언자가 소년의 손을 보았다가 얼굴을 돌렸다. 두건 아래의 입술이 가늘어졌다.
“그들이 온 곳으로 돌려보내라. 그리고 길을 닫아.”
사라가 숨을 들이켰다.
“그것으로 끝내 주시는 거예요?”
“다시 보이지 않는다면.”
크로노는 일어나려던 몸을 멈췄다. 지금 검을 들어도 사라가 먼저 다칠 자리였다. 그가 칼집을 허리에 묶자 마르도 벽에 기대어 활을 챙겼다. 쟈키가 예언자를 노려보는 동안 알파드는 소년의 다리 뒤에서 낮게 울었다.
사라는 문을 나서기 전 동생 앞에 무릎을 굽혔다.
“이번에는 방에서 기다려 줘. 돌아오면 내가 찾으러 갈게.”
쟈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매를 놓았다. 옷에 남은 구김이 펴질 때까지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왕궁의 복도는 조용했다. 시종들은 예언자를 보고 옆으로 비켰다. 마르는 화분을 안고 있던 여자를 찾았지만 지나치는 얼굴 가운데 보이지 않았다. 그 작은 싹마저 떠올라 걸음이 늦어졌다. 예언자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하늘길을 내려오자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세 사람의 모피와 외투는 돌려받았으나 몸 안에 남은 냉기는 막을 수 없었다. 사라는 얇은 겉옷만 걸쳤다. 예언자의 망토는 세찬 바람 속에서도 몸 가까이 가라앉아 있었다.
크로노와 마르는 앞장서서 처음 떨어졌던 동굴로 향했다. 길을 잘못 들 때마다 예언자가 방향을 지적할 것 같았지만 그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발자국만 내려다보았다. 크로노는 그 침묵까지 마음에 걸렸다.
동굴 안에는 꺼진 불씨와 마른 이끼가 남아 있었다. 마르가 바위벽 앞에 섰다.
“여기예요. 우리가 온 뒤에 사라졌어요. 열쇠는 다른 동료가 가지고 있고요.”
예언자가 사라를 보았다. 사라는 허공에 손을 대고 천천히 옮겼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가느다란 빛이 손가락을 따라 드러났다. 마르가 흉내 내 보았을 때는 응답하지 않던 자리가 사라의 펜던트 가까이에서 둥글게 벌어졌다.
저편에서 덥고 마른 공기가 흘러왔다. 재 냄새였다.
에이라가 문 가까이 다가갔다. 불탄 숲의 냄새를 맡은 순간 얼굴이 달라졌다. 마르는 열린 틈 너머에 검게 그을린 바위가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도착했을 때 빛이 사라진 것과 길 자체가 끊어지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사라는 그 남은 길을 찾은 듯했다.

“건너가세요.”
사라가 말했다. 마르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기묘하게도 눈보라를 뚫고 온 자신의 손보다 차가웠다.
“보슈 님을 찾을게요.”
사라의 시선이 예언자 쪽으로 흔들렸다. 마르는 손을 놓았다. 더 말하면 약속을 건네는 대신 이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 것이었다.
에이라가 먼저 건넜다. 크로노는 마르가 문 안에 들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뒤를 보았을 때 예언자는 사라의 팔이 아니라 문을 보고 있었다. 크로노는 그를 향해 턱을 조금 들었다. 남자의 입가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차가운 동굴이 등 뒤에서 접혔다.
마르는 재가 깔린 바닥에 두 발로 내려섰다. 열린 문 안에는 사라가 남아 있었다. 그녀가 펜던트를 들자 푸른 틈의 가장자리에 가는 선들이 얽혔다. 크로노가 마지막으로 건너오는 순간 빛이 좁아졌다.
“살아 있어요.”
마르가 말했다. 소리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라의 얼굴이 선들 뒤로 지워졌다. 닫힌 자리에는 잠시 희미한 문양이 떠 있다가 사라졌다.
에이라가 바위에 손바닥을 댔다. 몸으로 밀어 보고 주먹으로도 두드렸다. 돌가루만 떨어졌다. 크로노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지 않았다. 에이라가 스스로 손을 내린 뒤에야 바깥을 가리켰다.
세상은 떠나기 전보다 어두웠다.
해가 가려진 하늘 아래로 재가 흘렀다. 충돌 구덩이 가장자리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올라왔다. 먼 숲의 나뭇가지들은 잎이 아니라 회색 먼지의 무게 때문에 처져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비탈에는 발자국이 있었다. 큰 새가 발톱으로 긁은 자국과, 사람이 왕복한 흔적이었다.
에이라가 몸을 낮추고 살폈다.
“키노 왔다.”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돌아왔다. 바깥 능선에서 새 울음이 났다. 잠시 뒤 날개 둘이 재구름을 가르며 내려왔다. 키노가 먼저 뛰어내렸고 다른 새에서는 짧은 망토가 펄럭였다.
카에루는 땅에 닿자마자 검을 뽑으려다 에이라의 얼굴을 보고 손을 멈췄다.
“그 꼴로 또 어딜 다녀온 건가.”
마르는 대답하려다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으니 갈라진 입술이 아팠다. 카에루가 다가와 크로노의 팔을 자기 어깨에 걸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 전에 체중을 받아 냈다.
키노는 에이라의 다리를 보았다. 에이라는 그가 가져온 물을 마시고 물주머니를 돌려주었다.
“사람들?”
“같이 있다. 이오카, 라루바. 먹을 것 옮겼다. 돌 밑에도 자리 있다.”
“불은?”
“안 껐다.”
에이라는 키노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잠깐 댔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숲 아래를 보았다. 연기 사이로 가느다란 다른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타 버리는 숲과는 달리 한곳에서 곧게 피어나는 불이었다.

야영지는 큰 바위 아래에 옮겨져 있었다. 아이들은 마른 가지에서 재를 털었고 어른들은 가죽을 겹쳐 입구의 틈을 막았다. 에이라가 들어서자 사람들이 일어났으나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녀가 다친 것을 본 노인이 불 옆자리를 비웠다.
그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셋 다 앉아. 설명은 나중에 해도 돼.”
루카가 공구 가방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고 있었다. 그 뒤에서 로보가 솥을 들어 불 옆으로 옮겼다. 마르는 한 걸음 내딛다가 그대로 루카를 끌어안았다. 안경테가 뺨에 닿았다.
루카는 잠깐 굳었다가 다치지 않은 쪽 어깨를 감쌌다.
“정말이지. 찾으러 올 시대가 하나여야 말이지.”
그들은 일행의 소식이 끊긴 뒤 시간의 끝에서 나와, 산의 문을 통해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카에루에게 사정을 듣고 키노와 번갈아 구덩이 근처를 살피고 있었다. 루카의 허리에서 게이트 키가 흔들렸다. 마르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조금 풀렸다.
크로노가 앉자 로보가 그의 등 뒤에 접은 가죽을 받쳤다. 카에루는 붕대를 푸는 루카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을 데웠다. 에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키노의 이야기를 들었다. 몇 명이 아프고, 어느 골짜기에 열매가 남아 있으며, 어제보다 물이 얼마나 차가워졌는지. 여왕의 알현실에서는 끝내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여기서는 하나씩 대답을 얻었다.
마르는 뜨거운 그릇을 두 손으로 받았다. 냄새를 맡자 배가 아플 만큼 고팠다. 한 숟갈을 삼킨 뒤에야 사라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식사는 식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질의 하늘과 지상의 추위, 마도기와 신전, 쟈키가 한 말이 불 주변으로 건너갔다. 크로노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말하는 대목에서 고개를 들었다. 카에루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자라고 확신하나?”
크로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닮았다는 것과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달랐다. 카에루는 검을 무릎에서 내려 옆에 두었다.
“그럼 아직은 이름을 붙이지 않겠네.”
밤이 깊어지자 루카는 봉인된 문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왔다. 열쇠로는 열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실패를 감추려 장치를 들여다보는 대신 마르 앞에 앉았다.
“그런데 그 펜던트로 왕궁 문을 열었다고 했지?”
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양, 미래에서도 봤어. 돌아가서 확인하자.”
키노는 다음에 바위 거처를 넓힐 곳을 에이라에게 보여 주었다. 에이라는 길을 따라가 물이 스미는 벽을 짚고, 잠든 아이들의 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표시를 남겼다. 아침에 이동할 사람과 남아서 식량을 모을 사람을 나누고 나서야 불 앞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모피를 무릎 위에 접었다. 지상의 노인이 건네준 가죽이었다. 에이라는 그 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키노를 보았다.
“추운 데도 사람 있다. 에이라 그 사람들 봤다.”
키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사람, 키노 본다.”
두 사람은 그 말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날이 밝을 무렵 일행은 산으로 향했다. 카에루도 생존자들에게 남은 도구를 건네고 함께 길을 나섰다. 회복되지 않은 세 사람 때문에 걸음은 느렸다. 로보가 짐을 맡고 루카가 앞에서 길을 확인했다.
산의 시간의 문은 아직 살아 있었다. 루카가 열쇠를 대자 빛이 넓어졌다. 먼저 크로노와 마르, 로보가 들어가고, 문을 붙들고 있던 루카가 카에루와 에이라를 보낸 뒤 따라왔다.
마르는 돌바닥 위에서 익숙한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한 사람씩 빛에서 빠져나왔다. 여섯 명이 다 모인 것을 세고 나서야 그녀는 바닥에 앉았다.

에이라는 가로등보다 화로를 먼저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두 손을 내밀고, 불이 붙은 나무 사이의 틈을 살폈다. 그러고는 옆에 놓인 장작을 하나 집어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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