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45화] 왕좌 아래의 메아리
크로노는 칼자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계단 아래의 남자가 턱을 조금 들었다. 두건 안쪽으로 빛이 들었으나 눈까지 닿지는 않았다. 마왕성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을 그 그림자 위에 겹쳐 보려는 순간, 높은 곳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내가 기다리라 한 손님은 아닌데.”
질 여왕은 등을 곧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 손가락마다 낀 보석보다 손목의 가는 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계단 양옆으로 흐르는 빛이 그 손 가까이에서 모였다 흩어졌다. 사라는 한 단 아래에 서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는 있지만 어깨에 손을 얹기에는 먼 자리였다.
예언자가 몸을 돌렸다.
“말씀드렸던 방해자들입니다.”
“문을 열었군.”
여왕의 시선은 크로노의 검을 지나 마르의 가슴에 멎었다. 마르는 펜던트를 옷깃 안에 넣으려던 손을 멈췄다. 이미 보았다면 감춰도 소용없었다.
“그 돌을 어디서 구했느냐?”
“어머니가 남기셨어요.”
“네 어머니의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다.”
사라가 입술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여왕은 딸을 보지 않고 손바닥을 폈다. 마르가 다가가 물건을 올려놓기를 기다리는 손이었다. 마르는 그 손에서 자기 아버지의 식탁을 떠올렸다. 무엇을 내놓아야 대화가 시작되는지 먼저 정해져 있던 자리들. 이곳에서는 목걸이를 내려놓은 뒤에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돌 때문에 왔지만, 먼저 말씀드릴 게 있어요. 해저 신전에 마도기를 옮기시면 안 돼요.”

왕좌 옆 수정에서 낮은 소리가 났다. 사라의 손이 예복의 주름을 움켜쥐었다.
“누가 그런 말을 시켰느냐?”
“누가 시킨 게 아니에요. 저희는 라보스가 깨어난 뒤의 세상을 봤어요.”
예언자가 반걸음 움직였다. 크로노는 검을 뽑으려던 손에 힘을 주었다가 멈췄다. 남자가 바라보는 곳은 마르의 펜던트가 아니라 입이었다.
마르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도시가 무너지고, 땅에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아요. 남은 사람들은 배고픈 줄도 잊으려고 기계 속에 들어가요. 이 나라에서 끌어 쓰는 게 그런 일을 일으킬 힘이에요.”
“그렇다면 더욱 내 손안에 두어야겠구나.”
여왕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너희가 보았다는 곳에 이 하늘이 있었느냐? 내 궁전이 있었느냐? 사람들을 먹이고 잠재울 힘조차 없는 자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째서 내가 책임져야 하지?”
마르는 대답을 찾다가 여왕 곁의 창을 보았다. 바깥에는 구름뿐이었다. 광산에서 끌어낸 사람과 열에 들떠 있던 소녀는 이 창에서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굶어요.”
“곧 신전이 완성된다.”
“그때까지 죽으면요?”
사라가 고개를 들었다. 여왕의 펼쳐진 손이 천천히 닫혔다.
“나는 한 사람의 겨울이 아니라 이 나라의 영원을 생각한다.”
에이라가 마르 옆에 섰다. 진흙 묻은 발이 밝은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겨울 못 넘으면 그다음 없다.”
여왕은 처음으로 에이라를 똑바로 보았다. 뒤쪽 문이 열리고 달톤이 들어왔다. 그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문턱에 남은 흙과 세 사람의 위치를 확인했다. 웃음은 그 뒤에 떠올랐다.
“제가 치우겠습니다, 폐하.”
사라가 계단을 내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 사람들은—”
“사라.”
여왕은 딸의 이름만 불렀다. 사라는 한 걸음을 더 내려오지 못했다. 마르는 그 발밑을 보았다. 아무것도 붙들고 있지 않은데도 신발 끝이 계단에 박힌 것 같았다.
달톤이 두 팔을 벌렸다. 세 사람과 출입문 사이의 공기가 움푹 꺼졌다. 검은 테두리 안에서 먼저 둥근 손이 나왔고, 뒤이어 짧은 다리와 거대한 몸통이 떨어졌다. 돌바닥이 울리며 크로노의 발끝까지 충격이 전해졌다.
괴물은 천장 가까운 수정들을 올려다보았다. 두꺼운 피부와 불룩한 배, 그에 비해 작고 멍한 눈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 듯했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세 사람의 퇴로를 정확히 가로막았다.
“골렘이다.” 달톤이 말했다. “마법을 쓴다고 하니 얼마나 배웠는지 보자.”
크로노는 계단과 두 줄의 기둥 사이를 재었다. 오른쪽 기둥 뒤에는 시종 하나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왼쪽에는 창이 있었으나 그 바깥은 허공이었다. 싸울 수 있는 곳은 가운데뿐이었다.
그가 손짓하자 마르는 오른쪽으로, 에이라는 왼쪽으로 벌어졌다. 골렘의 눈이 세 사람을 차례로 쫓았다. 에이라가 낮게 달려들어 옆구리를 치자 둔탁한 소리가 났다. 두꺼운 몸이 기울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 머리 위에 쇠구슬이 생겼다.
에이라는 올려다보자마자 옆으로 몸을 던졌다. 다친 종아리가 버티지 못해 발이 늦게 떨어졌다. 쇠구슬은 그녀를 따라 방향을 바꾸더니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살갗을 뚫지는 않았다. 대신 온몸의 무게가 갑자기 배로 늘어난 듯 에이라가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짚은 손가락이 벌어졌다.
크로노가 칼을 뽑아 달려들었다. 골렘의 팔이 마르 쪽으로 돌아가기 전에 시선을 돌려야 했다. 날이 두꺼운 팔뚝을 가르자 작은 상처가 벌어졌다. 곧 그의 머리 위에도 검은 구슬이 맺혔다.
몸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벗어나지 못했다. 충격이 어깨에서 다리까지 훑고 지나갔다. 크로노는 쓰러지지 않으려 검끝을 바닥에 댔으나 옆구리가 접히며 숨이 끊겼다. 골렘이 입을 벌렸다. 안쪽에서 붉은 불덩이가 부풀었다.
마르의 냉기가 그 얼굴을 때렸다.
불덩이가 틀어지며 왼쪽 기둥에 부딪쳤다. 돌이 터지고 뜨거운 가루가 세 사람 위로 쏟아졌다. 크로노는 팔로 눈을 가린 채 굴러 나왔다. 마르는 다시 힘을 모으려다가 골렘의 몸에 퍼지는 서리를 보았다. 자신이 맞힌 곳에서 시작한 흰 무늬가 배와 어깨를 지나 양손에 맺혔다.
“크로노, 거기서 나와!”
기둥을 돌아서는 그의 뒤로 얼음이 쏟아졌다. 마르가 불러낸 것보다 크고 거친 덩어리들이었다. 깨진 얼음 하나가 뺨을 스쳤다. 그녀는 따끔한 자리에 손을 대지 않고 괴물의 손부터 보았다.
에이라가 몸을 일으키며 으르렁거렸다.
“마르 것, 가져갔다.”
크로노가 손끝에 번개를 모았다. 짧은 빛줄기가 골렘의 어깨를 꿰뚫자 서리가 녹고 푸른 불꽃이 피부를 타고 돌았다. 괴물은 바로 반격하지 않았다. 마치 새로 생긴 감각을 살피듯 팔을 들었다.
마르는 그 잠깐의 멈춤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찬 기운을 밀어 넣자 손끝에서 번지던 전류가 사라지고 골렘의 입김이 희어졌다.
“마지막에 맞은 걸 돌려줘. 바뀌는 동안 틈이 있어.”
달톤의 웃음이 낮아졌다. 그는 기둥에 등을 기댔지만 세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크로노가 검을 내렸다. 자신과 에이라가 계속 때리면 저 무거운 구슬이 다시 생길 터였다. 냉기를 견디며 마르에게 맡기는 편이 나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돌판을 발로 밀어 기둥과 기둥 사이에 세웠다. 얼음이 날아오자 판이 갈라졌다. 파편을 피하려던 시종이 뒤에서 작은 비명을 질렀다.
마르가 그를 보았다.
“뒤쪽 문으로 가세요. 지금!”

시종은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허락을 기다리는 동안 골렘의 가슴에 다시 서리가 맺혔다. 크로노가 시종의 옷깃을 잡아 옆 통로로 밀었다. 다음 순간 얼음이 그가 서 있던 바닥을 쓸었다. 크로노의 등에서 외투가 찢어졌다.
에이라가 쓰러지는 돌판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녀는 그것을 적에게 던지지 않았다. 두 사람 쪽으로 기울여 낮은 벽을 만들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한쪽 어깨가 떨렸지만 놓지 않았다.
“마르, 뒤에 있다. 에이라 받는다.”
마르는 손바닥을 펴고 호흡을 골랐다. 화상 난 팔 안쪽이 당겼다. 힘을 크게 쓰면 한 번 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물기를 좁게 모아 괴물의 무릎에 냉기를 박았다. 한쪽 발이 굳었다. 골렘이 그것을 떼려 몸을 기울일 때 크로노가 번개를 흘려 넣었고, 마르는 전류가 손에 모이기 전에 다시 얼음을 덧씌웠다.
거대한 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르는 이대로 두 번만 더 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생각이 앞선 만큼 다음 숨이 늦었다. 왼팔이 떨려 손바닥의 물기가 흩어졌다. 크로노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힘을 거두려 했지만 번개는 이미 닿은 뒤였다.
골렘의 양손 사이가 푸르게 벌어졌다.
“숙여!”
에이라가 돌판을 밀어 올렸다. 번개는 돌의 가장자리를 타고 갈라져 바닥과 기둥을 때렸다. 크로노가 마르를 붙들어 옆으로 넘겼다. 팔꿈치부터 어깨까지 감각이 사라지고, 귀 안에는 가느다란 소리만 남았다.
먼저 일어난 것은 에이라였다. 그녀는 이제 돌판을 잡지 못했다. 손바닥에 피가 묻어 있었고 오른발은 바닥에 끌렸다. 그래도 골렘이 두 사람에게 가는 길을 막았다.
크로노가 검을 더듬었다. 손잡이가 바로 앞에 있는데 손가락이 제대로 오므라들지 않았다. 마르가 그의 손등을 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서둘러 일어나지 않고 팔꿈치로 몸을 끌어 에이라 옆까지 갔다. 세 사람의 어깨가 거의 맞닿았다.
왕좌 쪽에서 박수가 한 번 울렸다.
“그만하면 됐다.”
여왕이 일어섰다. 골렘의 움직임이 멎었다. 달톤은 무언가 덧붙이려다가 여왕이 든 손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바닥의 푸른 선이 세 사람 아래로 모여들었다.
마르는 목걸이를 쥐었다. 문이 열릴 때와는 달랐다. 돌에서 나온 빛이 아니라 바닥에서 올라오는 힘이었다. 발이 떨어지고, 구부린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투명한 벽이 몸을 감쌌다. 가까이 있던 에이라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두 손 사이에서 손가락이 밀려났다.

크로노는 여왕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투명한 벽 너머의 빛이 휘면서 왕좌가 멀어졌다. 사라가 계단 끝까지 내려왔다는 것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언자의 목소리였다. 여왕을 말리는 것인지 다른 목적이 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럼 살아 있게 두지.”
여왕은 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마르는 이제 그 눈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빛 속에 떠 있는 몸을 살피는 시선은 카자르의 학자가 금속구를 돌려 보던 시선과 닮아 있었다.
“사라, 신전으로 가자.”
사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왕이 돌아본 뒤에야 손을 내렸다. 예복 끝이 깨진 얼음과 돌가루 위를 지나갔다. 마르는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소리가 벽 밖으로 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멀어지던 사라가 문 앞에서 잠깐 고개를 돌렸다.
그 짧은 틈에 그녀의 눈이 마르와 마주쳤다. 마르는 입술을 움직이는 대신 손바닥을 투명한 벽에 댔다. 사라도 자기 손을 조금 들었다가 소매 안으로 감췄다.
문이 닫혔다.
크로노의 검은 아래에 남아 있었다. 칼집에서 멀지 않은 곳, 마르가 만들어 낸 얼음이 녹아 가는 물속이었다. 크로노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르가 눈을 뜨고 있었다. 그 너머에서는 에이라가 벽을 밀던 손을 멈추고 자기 숨을 가다듬었다.
세 사람은 서로가 보이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상대의 숨이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