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44화] 문을 여는 목걸이
질 왕궁에는 문지기가 없었다.

카자르에서 이어진 빛의 다리를 건너자 거대한 문이 저절로 양옆으로 갈라졌다. 안쪽 홀에는 향과 따뜻한 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천장 가까이 떠 있는 수정들이 햇빛 없이도 정오처럼 밝은 빛을 냈다.
마르는 그 빛이 편하지 않았다.
기둥마다 푸른 선이 뿌리처럼 얽혀 있었고, 바닥 아래에서도 같은 빛이 뛰었다. 엔하사의 샘과 카자르의 연구실, 하늘섬 아래를 떠받치던 힘이 모두 이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궁전이라기보다 거대한 몸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크로노도 같은 것을 느낀 듯 기둥에 손을 대지 않았다. 옆구리의 붕대는 새것이었지만 걸음은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었다.
에이라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냄새를 차례로 맡았다. 궁정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수군거렸지만 누구도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여기 사람, 겁 냄새 난다.”
“다들 평화롭게 보이는데?” 마르가 낮게 물었다.
“평화로운 사람, 뒤 자주 안 본다.”
에이라의 말대로 사람들은 대화 중에도 북쪽 복도를 곁눈질했다. 그곳에는 다른 문보다 크고 어두운 문이 하나 있었다. 검은 표면에 푸른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서기 2300년의 폐허에서 보았던 봉인 문과 같은 문양이었다.
마르는 무심코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저 문, 미래에도 있었어.”
크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굶주린 사람들이 살던 돔, 죽은 기계들 사이에서 끝내 열지 못한 문. 그 문양이 멸망 전의 왕궁에 새것처럼 남아 있었다.
홀 한쪽에서는 젊은 여자가 화분을 안고 서 있었다. 잎이 힘없이 처져 있었고 흙은 말라 있었다. 마르가 가까이 가자 여자는 화분을 뒤로 감췄다.

“그 꽃, 물이 부족한 것 같은데요.”
“여왕 폐하께서는 쓸모없는 생명에 힘을 낭비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꽃이 무슨 쓸모를 해야 하죠?”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뒤 목소리를 낮췄다.
“생명의 현자께서 주신 싹입니다. 지상에서도 자랄 수 있는 나무라고 하셨어요. 보슈 님이 사라진 뒤에는 이것까지 없애라는 명이 내려왔습니다.”
“버리지 마요.” 마르가 말했다.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할지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게 심어 주세요.”
여자는 북쪽 복도를 살피고 화분을 품에 더 깊이 안았다.
“당신은 하늘의 사람이 아니군요.”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인가 봐요.”
여자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종이 세 번 울렸다. 홀에 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흰 예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동쪽 복도에서 걸어 나왔다. 긴 푸른 머리카락이 어깨와 등 위로 흘렀고, 이마와 가슴에는 빛나는 장식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자 사람들이 허리를 숙였다.
사라 왕녀였다.

그녀의 뒤에는 엔하사에서 본 소년과 검은 고양이가 따랐다. 소년은 세 사람을 발견하자 걸음을 멈췄다. 고양이가 먼저 크로노 쪽을 보고 낮게 울었다.
사라도 동생의 시선을 따라왔다. 그녀의 눈이 마르의 목걸이에 닿는 순간 표정이 흔들렸다.
“그 펜던트는…….”
그녀가 다가오려 했으나 북쪽에서 시종이 급히 달려왔다.
“왕녀님, 여왕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예언자님도 이미 알현실에 드셨습니다.”
사라의 손이 가슴의 펜던트를 감쌌다. 마르의 것과 같은 푸른 돌이 박혀 있었다. 모양은 조금 달랐지만 빛이 움직이는 방식까지 닮았다.
소년이 누나의 소매를 잡았다.
“가지 마.”
“쟈키.”
“어머니 목소리, 이제 어머니 것 아니야.”
시종이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사라는 무릎을 굽혀 동생과 눈높이를 맞췄다.
“금방 돌아올게. 알파드와 방에서 기다려.”
“누나는 늘 그렇게 말해.”
소년은 손을 놓았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사라는 그의 뺨을 쓰다듬고 일어났다. 세 사람을 다시 바라볼 때에는 왕녀의 침착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왕궁을 떠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라보스 때문에 그래요?” 마르가 물었다.
사라의 발이 멈췄다.
홀의 모든 소리가 멀어진 듯했다. 시종은 숨을 들이켰고, 쟈키는 누나가 아니라 마르를 보았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아시죠?”
“떨어지는 걸 봤어요. 아주 오래전, 하늘에서 땅으로.”
사라의 눈에 의심보다 두려움이 먼저 떠올랐다. 그녀는 질문을 더 하려 했지만 북쪽에서 종이 다시 울렸다.
“왕녀님.”
시종의 재촉에 사라는 돌아섰다. 몇 걸음 뒤 검은 문 앞에 서서 가슴의 펜던트를 들어 올렸다.
푸른 돌에서 빛 한 줄기가 뻗었다. 문에 새겨진 문장이 살아나며 물결처럼 퍼졌다. 이음매조차 없던 검은 표면이 갈라지고, 안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흘러나왔다.
사라는 문 너머로 들어갔다. 문은 곧 다시 닫혔다.
마르는 자기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엄마가 남긴 게 왜 저 사람 것과 같지?”
크로노가 문 가까이 다가갔다. 문양의 중심에는 펜던트가 닿았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가 마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르는 목걸이를 들어 같은 자리에 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돌은 같아도 힘이 비어 있군요.”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라색 옷을 입은 큰 남자가 계단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높이 묶었고, 입가에는 상대를 이미 얕잡아보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사라 님의 펜던트는 마도기의 힘을 받았지. 값비싼 보석을 흉내 낸다고 문까지 속지는 않아.”
“당신이 달톤?” 마르가 물었다.
남자의 눈썹이 올라갔다.
“지상의 야만인치고는 아는 것이 많군.”
에이라가 한 걸음 나섰다.
“너, 검은 가짜 새 탄다?”
“검은새호를 말하는 거라면 내가 지휘한다. 그리고 가짜 새가 아니라 이 시대 최고의—”
“새보다 느려 보인다.”
달톤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손끝에 붉은 불꽃이 맺혔다.
크로노가 에이라 앞을 막고 칼자루를 잡았다. 마르는 활을 들었으나 화살통이 비었다는 사실을 달톤도 알아차렸다.
그는 세 사람을 한 번 훑어보고 코웃음을 쳤다.
“예언자께서 낯선 자들을 보면 알리라 하셨지. 하지만 저 문도 못 여는 자들이 무슨 위협이겠어.”
불꽃이 꺼졌다.
“마도기는 서쪽 회랑에 있다. 구경하고 싶다면 해 봐. 가까이 가기도 전에 타 버리지 않는다면 말이지.”
달톤은 일부러 길을 가르쳐 준 뒤 웃으며 북쪽 계단으로 사라졌다.
마르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우릴 시험하는 거야.”
에이라가 주먹을 폈다 쥐었다.
“시험, 이기면 된다.”
크로노는 서쪽 회랑과 닫힌 검은 문을 번갈아 보았다. 예언자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 나라가 라보스의 힘을 끌어올리고 있었고, 그 힘은 마르의 목걸이와 이어져 있었다.
서쪽 회랑 끝에는 푸른 로브를 입은 누가 길을 막고 있었다. 둥근 몸과 짧은 팔다리, 얼굴을 가득 채운 입 때문에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기 어려웠다. 에이라가 머리를 기울이자 누도 똑같이 기울였다.
“마도기는 지금 작동 중입니다.” 누가 말했다. “가까이 가면 마음속의 꿈까지 빨려 나갈 수 있어요.”
“꿈 없어지면 사람 어떻게 되지?” 에이라가 물었다.
“가벼워지겠죠.”
“빈 사람 된다.”
누는 잠시 생각하더니 옆으로 비켜섰다.
“그 답이 마음에 드네요.”
회랑 너머의 방은 왕궁 전체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수십 개의 금속 고리가 허공에서 천천히 돌고 있었고, 중심에는 붉은 수정과 검은 금속으로 만든 거대한 기계가 서 있었다. 기계 아래로 뻗은 관들은 바닥을 뚫고 보이지 않는 깊이까지 내려갔다.

박동이 방을 울렸다.
쿵.
크로노의 옆구리가 함께 뛰었다.
쿵.
에이라는 두 손으로 귀를 막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이를 드러냈다.
“라보스. 아래 있다.”
마르는 기계 앞에 다가갔다. 목걸이가 가슴에서 들려 올라가듯 팽팽해졌다. 푸른 돌 안쪽으로 지금까지 없던 붉은 빛이 번졌다.
“이걸 대면 문을 열 수 있어.”
“그리고 저것도 널 열 수 있겠지.”
마르는 크로노를 돌아보았다. 그가 드물게 먼저 말을 꺼낸 탓에 눈이 커졌다.
크로노는 기계를 보며 한 손을 내밀었다.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혼자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에이라가 마르의 다른 손을 잡았다.
“셋이 한다.”
마르는 두 사람의 손을 힘껏 맞잡고 펜던트를 붉은 수정 가까이 가져갔다.
빛이 폭발했다.
눈앞에 낯선 장면들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바다 밑에서 솟는 검은 궁전. 무너지는 하늘섬. 눈을 감은 채 빛 속에 갇힌 사라. 그리고 새빨간 머리카락이 흰 눈 위에 펼쳐지는 모습.
마르가 비명을 삼켰다. 크로노가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고 에이라가 펜던트의 사슬을 잡아 기계에서 떼어 냈다.
방의 빛이 가라앉았다.
푸른 돌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중심에 작은 별 같은 불꽃이 뛰고 있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검은 문으로 돌아갔다.
마르가 펜던트를 문양에 대자 이번에는 빛이 퍼졌다. 검은 표면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안쪽에는 길고 어두운 알현실이 놓여 있었다.
가장 먼 곳의 높은 자리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 곁에 사라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계단 아래에는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문이 열리기 전부터 그곳을 보고 있었다.
창가에서 보았던 어깨선.
마왕성에서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상처 입은 짐승처럼 고요한 자세.
얼굴의 절반은 두건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크로노가 칼자루를 잡는 순간, 남자의 입가에 아주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드디어 왔군.”
예언자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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