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43화] 빛으로 세운 나라
“너희 셋 중 하나는 곧 죽어.”
소년의 말은 엔하사를 떠난 뒤에도 따라왔다.
마르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꿈을 읽는다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서 자란 아이니, 낯선 이를 겁주려고 들은 말을 흉내 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입으로 그렇게 설명할수록 소년의 눈이 떠올랐다. 아이는 겁을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하듯 무심했을 뿐이었다.
에이라는 앞장서 걷다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어두운 아이 말, 머리에 계속 둔다?”
“조금.”
“죽음 온다. 아직 안 왔다.”
“그건 위로야?”
“지금 살아 있다는 말.”
마르는 피식 웃었다. 크로노도 입가를 아주 조금 올렸다. 에이라의 말은 거칠었지만, 적어도 꿈이나 예언처럼 붙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하늘길은 섬의 남쪽에 있었다. 빛의 받침대가 세 사람을 구름 아래로 내려놓자 따뜻한 바람이 칼날 같은 눈보라로 바뀌었다. 아래쪽 건물에는 하늘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들은 두꺼운 모피를 겹겹이 입고, 등에 광석과 마른 식량이 든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다.

맨 앞의 노인이 손바닥을 벽의 문양에 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흰 옷을 입은 관리가 지팡이 끝으로 노인의 자루를 가리켰다.
“오늘 공물은 이것뿐인가?”
“서쪽 굴이 무너졌습니다. 두 사람이 아직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구조가 끝난 뒤 다시 오게. 하늘길의 힘은 아무에게나 쓸 수 없어.”
“아이 약이라도—”
“카자르의 약은 마력을 지닌 자를 위한 것이네.”
관리의 손짓 한 번에 바닥의 문양이 꺼졌다.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줄에서 물러났다.
에이라가 그의 자루를 들어 올렸다. 노인이 놀라 돌아보기도 전에 그녀는 자루를 자기 어깨에 멨다.
“굴 어디?”
“에이라, 우리 갈 곳이—” 마르가 말을 멈췄다.
크로노는 이미 노인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노인이 가리킨 곳은 눈 덮인 비탈 아래였다. 세 사람은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무너진 굴로 갔다. 입구에는 어린 소녀가 담요를 두른 채 앉아 있었다. 열이 오른 얼굴로 아버지와 형이 안에 있다고 되풀이했다.
굴은 얼음과 돌이 함께 내려앉아 막혀 있었다. 에이라가 큰 바위를 들어내는 동안 크로노가 작은 돌을 잘라 길을 넓혔다. 마르는 무너진 틈에 냉기를 흘려 보냈다. 얼음이 더 생기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갈라진 물기를 한 덩어리로 붙여 천장이 다시 내려앉지 않게 하려는 일이었다.
안에서는 두 사람이 발견되었다. 한 사람은 다리가 돌에 깔렸고 다른 사람은 그를 끌어내려다 손을 다친 상태였다. 에이라가 돌을 받치고 크로노가 몸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르는 밖에서 얼음 기둥이 금 가는 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의 발을 잡아당겼다.
네 사람이 굴 밖으로 빠져나오자 입구가 다시 무너졌다.
소녀는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노인은 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에이라가 팔을 잡아 세웠다.
“배고프다. 먹을 것 있나?”
노인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었다.
그들의 거처는 바위틈을 넓힌 낮은 동굴이었다. 불은 작았고 음식은 뿌리와 질긴 말린 고기뿐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가진 것을 나누었다. 에이라는 고기를 씹으며 이제야 이곳 냄새가 사람 사는 곳답다고 말했다.
마르는 소녀의 이마에 젖은 천을 올렸다.
“하늘 사람들은 약도 안 줘요?”
소녀의 어머니가 불을 보며 대답했다.
“마법을 못 쓰는 사람은 질의 백성이 아니래요. 우리는 땅에 붙어 사는 자들이지.”
“그 사람들이 먹는 것도 당신들이 올려 보내는 거잖아요.”
“하늘은 지식을 주고, 우리는 손을 보태는 거래요.”
그 말에는 믿음보다 오래된 체념이 묻어 있었다.
크로노는 동굴 벽에 기대어 쉬면서도 아래쪽 바위를 손끝으로 짚었다. 땅속에서 아주 약한 진동이 전해졌다. 일정한 박자가 아니었다. 멀리서 숨을 쉬는 것처럼 느렸다가, 갑자기 두 번 빨라졌다.
노인은 그의 손짓을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들어 땅이 자주 웁니다. 왕궁에서 큰 기계를 돌린 뒤부터라는 이도 있고, 별 아래 잠든 신이 꿈을 꾼다는 이도 있지요.”
“마도기 말인가요?” 마르가 물었다.
노인의 얼굴이 굳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습니까?”
“엔하사에서요.”
“하늘 사람들은 입이 가볍군.”
그는 바깥의 관리가 듣지 못하는지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보슈 님은 그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왕녀 사라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예언자가 온 뒤로 두 분의 말은 여왕께 닿지 않습니다. 보슈 님이 요즘 보이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어요.”
마르는 크로노와 시선을 나눴다. 현자의 이름은 엔하사에서도 들었다. 꿈의 돌을 다루는 대장장이. 자신들이 알던 보슈와 같은 이름이었다.
“왕궁으로 가려면 카자르를 지나야 합니다.” 노인이 길을 그려 보였다. “동쪽 하늘길을 타십시오. 다만 예언자 앞에서는 미래를 안다는 듯 말하지 마세요. 그자는 그런 말을 싫어합니다.”
“자기는 미래를 본다면서?”
마르의 물음에 노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미래는 더 싫은가 보지요.”
그들은 소녀의 열이 조금 내리는 것을 확인한 뒤 동굴을 나왔다. 노인은 공물로 바칠 예정이던 모피 한 장을 에이라에게 억지로 둘러 주었다. 에이라는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목에 걸고 있던 작은 짐승 이빨을 소녀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 있으면 강해진다.”
“정말요?”
“에이라 믿으면.”
세 사람은 눈보라 속을 다시 걸었다.
동쪽 하늘길 위에는 아까의 관리 대신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세 사람의 모피에 묻은 돌가루와 피를 보고도 묻지 않았다. 다만 마르의 목걸이를 발견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그 펜던트는 왕가의 물건입니까?”
마르가 손으로 푸른 돌을 감쌌다.
“어머니가 남긴 거예요.”
“이상하군요. 사라 왕녀님의 것과 닮았습니다.”
여자는 더 캐묻지 않고 받침대를 열어 주었다. 빛이 세 사람을 다시 구름 위로 밀어 올렸다.
카자르는 엔하사보다 작았지만 훨씬 분주했다. 둥근 방마다 유리관과 금속 고리가 떠 있었고, 색색의 불꽃이 손짓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학자들은 잠을 자는 대신 끊임없이 기록하고 논쟁했다. 한쪽 방에서는 돌조각에 빛을 가두었고, 다른 방에서는 식물의 성장을 한순간에 앞당겼다.

마르는 불꽃을 다루는 연구자에게 다가갔다.
“마법은 누구나 배울 수 있나요?”
“재능이 있다면요. 하지만 지상의 자들은 원래 그릇이 다릅니다.”
그가 에이라를 힐끗 보았다. 에이라는 옆 탁자의 금속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연구자 셋이 마법으로도 찌그러뜨리지 못하던 구가 움푹 들어갔다.
“그릇, 약하다.”
연구자는 입을 다물었다.
크로노는 방 중앙에 매달린 지도 앞에 섰다. 빛으로 그린 세계 지도에는 하늘섬들과 지상의 동굴, 북쪽 왕궁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도 아래에는 또 다른 구조가 있었다. 바다 밑으로 뻗은 거대한 계단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궁전이었다.

한 학자가 설명했다.
“해저 신전입니다. 마도기를 라보스 가까이 옮기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지요. 날씨도, 수명도, 꿈도 뜻대로 다룰 수 있을 겁니다.”
“그 힘이 라보스를 깨우면요?” 마르가 물었다.
“깨운다니요? 그것은 의식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끝없는 동력원이지요.”
크로노의 손이 칼자루에 닿았다.
그는 서기 1999년의 하늘을 기억했다. 땅이 갈라지고 불기둥이 도시를 삼키던 순간, 라보스는 잠에서 깬 짐승처럼 움직였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땅속의 힘을 쓰는 줄 알았다.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었다. 라보스가 이 나라의 욕망을 먹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건물 밖에서 낮은 굉음이 울렸다.
구름 사이로 검은 배 한 척이 떠올랐다. 날개 없는 거대한 새처럼 길고 매끄러운 몸체가 햇빛을 가렸다. 배 아래의 푸른 고리들이 회전할 때마다 공기가 떨렸다.
“검은새호다.” 학자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현자 가슈가 만든 하늘의 배지. 달톤 님이 지휘하십니다.”
에이라는 배가 지나간 자리를 노려보았다.
“새 아닌데 새 이름 쓴다.”
검은 배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너머 구름 위로 질 왕궁이 솟아 있었다. 여러 개의 탑이 한가운데의 높은 첨탑을 둘러싸고, 탑 사이에는 물과 빛이 폭포처럼 흘렀다.
왕궁으로 이어진 길에서는 작은 수정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떠 있었다. 세 사람이 하나를 지날 때마다 맑은 음이 울렸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소리였으나 왕궁에 가까워질수록 한 곡처럼 이어졌다. 너무 정확해서 바람도, 발소리도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마르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숨이 막혔다. 이 나라는 우연히 자란 것과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듯했다.
에이라는 길 밖으로 뻗은 풀 한 포기를 찾아 발끝으로 건드렸다. 풀은 곧 빛의 테두리 안으로 곧게 돌아갔다. 그녀는 더 건드리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여기, 풀도 명령 듣는다.”
크로노는 왕궁의 가장 높은 창을 올려다보았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그 안에 있을 터였다.
해가 기울자 왕궁의 창들이 하나씩 붉게 물들었다.
크로노는 그 빛 속에서 검은 형체 하나를 보았다.
가장 높은 창가에 누군가 서 있었다. 거리가 멀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길게 늘어진 망토와 어깨의 선이 낯설지 않았다.
다음 순간 검은새호가 시야를 가렸다.
배가 지나간 뒤 창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