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42화] 꿈을 쉬는 도시

흰 옷의 남자는 세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엔하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꿈은 혈통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그가 가리킨 도시에는 성벽도 문도 없었다. 흰 돌길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둥근 건물 사이로 이어졌다. 길 양옆의 꽃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종소리처럼 맑은 울림을 냈고, 하늘을 흐르는 물길에서는 작은 빛들이 물고기처럼 헤엄쳤다.

마르는 남자의 옷차림부터 살폈다. 얇은 천 한 겹뿐인데 추위를 탄 흔적이 없었다. 손에는 지팡이도 무기도 없었다.

“여긴 어디죠?”

“꿈의 도시 엔하사입니다.”

“그건 도시 이름이고요. 이 나라는?”

남자는 이상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질 왕국 말고 다른 나라가 있습니까?”

마르는 더 묻기 전에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이 어느 시대에서 왔는지 밝힐 수 없었다. 크로노도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에이라는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남자가 한 걸음 물러서자 그녀가 말했다.

“피 냄새 없다. 흙 냄새도 없다.”

“에이라.”

“이 사람, 사냥 안 한다.”

남자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동물을 구경하듯 에이라를 바라보았다.

“사냥은 지상의 백성들이 하지요. 우리는 생각하고, 꿈꾸고, 마법을 익힙니다.”

‘지상의 백성들’이라는 말에 마르의 표정이 굳었다.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 채 도시 안쪽을 가리켰다.

“상처가 있으시군요. 북쪽 샘에서 쉬십시오. 깨어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꿈을 꾸고 나면 몸도 한결 가벼워질 겁니다.”

그는 다시 길을 걸었다. 세 사람이 따라오든 말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엔하사 안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낮은 침상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고, 몇몇은 눈을 뜬 채 허공에 펼쳐진 빛의 글자를 읽었다. 아이들은 손끝으로 작은 구름을 만들어 새와 물고기의 모양으로 바꾸었다. 그 모든 일이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질 왕국의 꿈꾸는 도시 엔하사 - ArrPeeGeeZ
질 왕국의 꿈꾸는 도시 엔하사 - ArrPeeGeeZ

에이라는 구름 물고기 하나가 얼굴 앞을 지나자 낚아채려 했다. 손가락이 빛을 통과했고 물고기는 꼬리를 흔들며 달아났다.

“먹는 것 아니다.”

“다행이네. 잡았으면 저 아이가 울었을 거야.”

“아이, 다시 만들면 된다.”

길가의 낮은 탁자에는 과일과 빵이 놓여 있었다. 주인도 값을 받는 사람도 없었다. 에이라는 붉은 과일 하나를 집어 냄새를 맡고, 아주 조금 베어 물었다. 단맛이 강했지만 씨도 섬유도 없었다. 혀 위에서 녹은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거, 나무에서 안 났다.”

마르는 빵을 반으로 갈랐다. 속은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나 구운 껍질의 탄내가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청년이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식사는 오래전에 불편함이 되었지요. 필요한 맛과 힘만 마법으로 빚으면 됩니다.”

“아래 사람들도 이걸 먹나요?”

“아래 사람들?”

“지상에서 사냥한다는 사람들요.”

청년은 대답을 고르는 대신 빛으로 만든 잔을 들었다.

“그들은 땅의 것을 먹는 편이 몸에 맞습니다.”

에이라는 남은 과일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배 안 부르다.”

청년은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었지만, 마르는 웃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넘치는 도시에서 부족한 사람을 떠올리는 일만 금지된 듯했다.

마르는 웃으려다 크로노의 걸음이 느려진 것을 알아차렸다. 따뜻한 공기에 몸이 풀리자 옆구리의 통증이 오히려 또렷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자기 어깨에 걸쳤다.

크로노가 괜찮다는 듯 몸을 빼려 했다.

“약속했잖아. 안 숨기기로.”

그 말에 그는 순순히 무게를 맡겼다.

북쪽 샘은 천장이 열린 방 한가운데에 있었다. 물은 아래에서 솟지 않고 허공에 둥글게 맺혀 있었다. 손을 넣으면 따뜻한 물결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마르는 깨끗한 천을 얻어 크로노의 붕대를 갈았다. 상처는 깊지는 않았지만 가장자리가 부어 있었다.

엔하사 왼편의 푸른 회복 샘 - Vorxu
엔하사 왼편의 푸른 회복 샘 - Vorxu

에이라는 자기 종아리를 대충 물에 담갔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고, 입술이 가끔 움직였다.

“다 자는데 누가 지킨다?”

“무엇을 지킨다는 거죠?”

가까운 침상에서 누워 있던 여자가 눈도 뜨지 않고 대답했다.

“이곳에는 훔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요. 여왕 폐하께서 영원한 번영을 약속하셨으니까.”

“영원한 것, 없다.”

에이라의 대답에 여자는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꿈이 거친 거예요.”

그녀는 다시 잠잠해졌다.

침상 위로 투명한 풍경이 피어올랐다. 여자의 꿈인 듯했다. 눈이 녹은 지상에 푸른 나무가 자라고, 하늘섬들은 더 높이 떠올라 하나의 거대한 왕관을 만들었다. 그 중심에 얼굴 없는 여왕이 서 있었다. 여왕이 손을 들자 사람들은 늙지 않았고, 아이들은 자라지 않았다.

처음에는 평화로운 그림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도 나뭇잎은 흔들리지 않았고, 웃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 시간이 사라진 세계였다.

마르가 침상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꿈의 가장자리에서 검은 가시 하나가 솟아 나무뿌리를 감쌌다. 다음 순간 여자가 몸을 뒤척였고 풍경은 물거품처럼 터졌다.

“좋은 꿈이었는데.”

여자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에이라가 답했다.

“안 움직이는 꿈, 죽은 것과 같다.”

마르는 샘물을 손에 받아 냄새를 맡았다. 물 자체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아주 약한 단맛 뒤로 금속 같은 맛이 남았다. 목걸이의 푸른 돌도 물 가까이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크로노는 샘 바닥을 가리켰다. 물 아래에 가느다란 빛줄기가 박동하고 있었다. 섬 밑에서 본 빛과 같았다.

“이 도시 전체로 이어진 것 같아.” 마르가 속삭였다. “아래에서 뭔가를 끌어올리고 있어.”

“땅 힘 훔친다.” 에이라가 말했다.

세 사람은 충분히 쉬기 전에 샘을 나왔다.

도시 중심에는 책이 가득한 홀이 있었다. 책장은 벽을 따라 둥글게 이어졌고, 책 몇 권은 받침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 가까이 가면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물방울이나 불꽃을 만들어 냈다.

엔하사 북동쪽 탁자에 놓인 물의 책 - Vorxu
엔하사 북동쪽 탁자에 놓인 물의 책 - Vorxu

마르는 물이 피어나는 책 앞에 멈췄다. 글자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림은 알아볼 수 있었다. 바다 아래로 내려가는 긴 관, 관 끝에 놓인 기계, 그리고 땅속 깊은 곳에서 웅크린 가시 돋친 형체.

페이지가 넘어가기 전에 그녀가 책장을 붙잡았다.

빛으로 만든 그림은 손가락 사이에서 흐트러졌다.

“이게 뭐예요?”

근처에서 글을 읽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해저 신전의 설계 초안이군요. 오래된 것입니다. 지금은 훨씬 우아한 방식으로 마력을 끌어올립니다.”

“어디서 끌어올리죠?”

“별이 준 선물에서.”

노인은 그 말을 상식처럼 내놓았다.

“라보스?”

마르의 입에서 이름이 먼저 튀어나왔다.

홀의 공기가 달라졌다. 잠들어 있던 사람 몇이 눈을 떴고, 노인의 미소가 잠깐 멎었다.

“지상의 사람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압니까?”

크로노가 마르 앞을 반걸음 막았다. 에이라는 노인의 두 손을 보았다. 무기는 없었지만 손끝에 희미한 빛이 모이고 있었다.

마르는 급히 책의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쓰인 걸 읽었어요.”

노인은 그녀와 책을 번갈아 보았다. 마침 뒤쪽에서 종소리가 울리자 손끝의 빛이 사라졌다.

“그 이름은 궁정 밖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왕 폐하께서 선택하신 힘이지만, 모든 이가 그 소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누가 싫어하죠?”

“현자 보슈께서는 걱정이 많으시고, 왕녀님은 마음이 여리십니다. 하지만 예언자께서 오신 뒤로 여왕 폐하의 뜻은 더욱 굳어졌지요.”

“예언자?”

“얼마 전 나타나 미래를 꿰뚫어 본 분입니다. 그분 덕에 불길한 일은 모두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미래를 안다는 말에 크로노의 눈빛이 달라졌다.

노인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책으로 돌아갔다.

세 사람은 홀을 가로질렀다. 출구 가까이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에이라의 발앞을 지나갔다. 에이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지만 고양이는 도망치지 않았다. 꼬리를 세우고 홀 구석의 소년에게 걸어갔다.

소년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두운 옷을 입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과 푸른 머리카락 때문에 그림자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그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채 고양이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엔하사 북서쪽 탁자에 놓인 바람의 책 - Vorxu
엔하사 북서쪽 탁자에 놓인 바람의 책 - Vorxu

마르는 그 앞에 앉았다.

“그 고양이, 네 친구야?”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양이만 마르의 손을 냄새 맡고 다시 소년 곁으로 붙었다.

“우리는 궁전에 가려고 해. 길을 아니?”

“왜?”

처음 나온 목소리는 나이에 비해 낮고 지쳐 있었다.

“왕녀와 예언자에게 물어볼 게 있어.”

소년의 손이 멈췄다.

“누나를 만나지 마.”

“왕녀가 네 누나야?”

소년은 대답 대신 크로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얼굴에서 멈추지 않고 옆구리의 붕대, 칼집, 손끝을 차례로 훑었다. 그러고는 마르와 에이라까지 보았다.

마치 세 사람 뒤에 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세는 눈이었다.

고양이가 낮게 울었다.

소년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일어났다.

“돌아가.”

“돌아갈 수가 없어.” 마르가 말했다.

소년의 얼굴에는 놀람도 동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늦었네.”

그는 크로노 곁을 스쳐 지나가다 한 번 더 멈췄다.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너희 셋 중 하나는 곧 죽어.”

소년이 홀 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검은 고양이의 울음은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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