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41화] 눈 아래의 하늘

시간의 문은 세 사람을 땅 위가 아니라 바위 속으로 토해 냈다.

크로노가 먼저 젖은 돌바닥에 어깨를 부딪쳤고, 그의 손을 잡고 있던 마르가 뒤따라 굴렀다. 마지막으로 에이라가 두 사람 위에 떨어졌다. 푸른빛이 동굴 벽을 한 번 훑고 지나간 뒤, 갈라져 있던 공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닫혔다.

어둠이 돌아왔다.

잠시 들리는 것은 거친 숨뿐이었다. 크로노는 몸을 일으키려다 옆구리를 누르고 다시 한쪽 무릎을 짚었다. 티라노 요새에서 돌바닥을 구른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마르는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먼저 자기 왼팔을 살폈다. 화상 위에 감아 둔 천은 그대로였고 손가락도 움직였다.

“에이라?”

“여기 있다.”

에이라가 어둠 속에서 일어났다. 목소리는 멀쩡했으나 오른발을 디딜 때마다 무릎이 조금씩 굽었다. 종아리의 상처에서 피가 다시 배어나오고 있었다.

마르는 허리춤을 더듬어 작은 부싯돌을 꺼냈다. 두 번은 불꽃만 튀었고 세 번째에 마른 섬유가 붉게 살아났다. 약한 불빛 아래로 낮은 동굴이 드러났다. 천장은 서리가 하얗게 덮고 있었고, 입구로 보이는 틈에서는 가느다란 눈가루가 안쪽까지 밀려들었다.

세 사람이 떨어진 자리에는 문도, 빛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가 손바닥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목걸이가 가슴에서 흔들렸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카에루한테 돌아갈 길이 없어.”

에이라는 닫힌 바위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 너머에는 불타는 숲과 키노, 그리고 혼자 남은 카에루가 있었다.

“개구리 강하다. 키노도 있다.”

그 말은 위로라기보다 에이라 자신이 붙드는 약속에 가까웠다.

크로노는 바닥에 떨어진 짧은 검을 주워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마르가 들고 있던 불씨를 가리킨 뒤 동굴 입구로 손을 뻗었다. 머물 수 있는 곳인지부터 살펴야 했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바람 소리는 커졌다. 마지막 굽이를 돌자 흰빛이 세 사람의 눈을 찔렀다.

세상 전체가 눈이었다.

낮인지 저녁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눈보라에 지워져 있었다. 멀리 솟은 산들은 윗부분이 구름에 잘려 나갔고, 골짜기마다 얼음이 굳은 파도처럼 포개졌다. 나무도 풀도 짐승의 발자국도 없었다. 방금 떠나온 세계의 뜨거운 재와 붉은 하늘이 한순간에 꿈처럼 멀어졌다.

마르는 동굴 처마 아래에 선 채 눈밭을 오래 보았다. 티라노 요새에서 아자라가 예고했던 추위가 떠올랐다. 라보스가 떨어진 뒤 먼지와 재가 하늘을 덮었다면, 햇빛이 약해져 이런 세계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바로 다음 날인지, 수천만 년이 흐른 뒤인지 알 길은 없었다. 다만 눈 아래 묻힌 검은 돌조각 몇 개는 충돌 구덩이에서 본 것과 닮아 있었다.

그녀가 돌 하나를 주우려 하자 크로노가 손목을 잡았다. 검은 표면에는 바늘처럼 가는 붉은 선이 살아 움직였다. 크로노가 검끝으로 건드리자 선이 안쪽으로 숨어 버렸다.

에이라가 돌을 발로 눈 속에 밀어 넣었다.

“라보스 찌꺼기.”

“그럴지도 모르겠네.”

“모르면 안 만진다.”

마르는 그 단순한 결론에 웃었다. 웃는 동안 입김이 얼굴 앞에서 하얗게 얼었다. 크로노가 놓은 손목에는 따뜻한 압력이 잠깐 남았다.

에이라가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았다. 손바닥에서 녹은 물을 혀끝으로 맛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하늘 물, 차갑다.”

“눈이야.” 마르가 대답했다. “너희 시대에도 이제 생길 거야. 아주 많이.”

에이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갈 수 없는 바위벽이 그 말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마르는 활집을 열었다가 바로 닫았다. 화살은 부러진 것들뿐이었다. 활은 당길 수 있어도 날려 보낼 것이 없었다. 크로노의 검과 에이라의 두 주먹이 전부였다.

그들은 동굴 안쪽에서 쓸 만한 천 조각과 마른 이끼를 찾았다. 크로노는 찢어진 외투 한쪽을 잘라 에이라의 종아리에 감았다. 에이라는 자기 어깨에 걸친 가죽을 반으로 접어 마르의 화상 난 팔을 덮었다. 누구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세 사람 모두 괜찮지 않았고, 이제는 그것을 숨길 이유도 없었다.

눈보라 속으로 나가기 전에 마르가 부싯불을 껐다. 불씨는 작은 금속통에 남겼다.

첫 열 걸음만에 바람이 몸을 밀었다.

에이라는 허리를 낮춰 버텼다. 선사시대의 폭풍은 나무와 흙냄새를 함께 몰고 왔지만, 이 바람에는 냄새가 없었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콧속이 얼어붙었다. 마르는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바위 능선을 찾았고, 크로노는 가장 앞에서 발끝으로 얼음의 두께를 확인했다.

그들은 서로의 발자국을 밟았다. 맨 앞의 크로노가 빠지면 뒤의 둘이 멈췄고, 에이라가 미끄러지면 마르가 가죽끈을 잡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방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 사람이 흩어지지 않는 일이 전부가 되었다.

비탈 하나를 넘었을 때 얼음 밑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크로노가 돌아가자는 손짓을 하기도 전에 눈층이 꺼졌다. 마르의 한쪽 다리가 허벅지까지 빠졌고, 밑에서 검은 물이 솟구쳤다. 에이라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함께 미끄러졌다.

크로노는 엎드려 검을 가로로 눕히고 두 사람에게 칼집을 내밀었다. 옆구리에서 통증이 터졌으나 팔을 놓지 않았다. 마르가 칼집을 붙잡고, 에이라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밀었다. 세 사람은 얼음 가장자리가 다시 무너지기 직전에 단단한 눈 위로 굴러 나왔다.

젖은 바짓단이 곧 뻣뻣해졌다. 마르는 이를 부딪치며 크로노의 외투를 들췄다. 붕대에 붉은 점이 번져 있었다.

“다음에는 돌아가자고 하기 전에 잡아.”

크로노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가 쓰러지면 둘 다 빠져. 그것도 기억해.”

에이라가 두 사람의 팔을 자기 어깨 위에 올렸다.

“셋, 하나처럼 걷는다. 그러면 한 명만 안 빠진다.”

크로노가 갑자기 멈췄다.

눈발 사이로 반듯한 선이 보였다. 자연적으로 갈라진 바위가 아니었다. 흰 벌판 한가운데에 검은 돌기둥 두 개가 서 있었고, 그 사이로 눈이 쌓이지 않은 길이 이어졌다.

기원전 12000년 설원에서 하늘길로 향하는 동굴과 길 - Vorxu
기원전 12000년 설원에서 하늘길로 향하는 동굴과 길 - Vorxu

세 사람은 기둥에 붙어 바람을 피했다. 표면에는 소용돌이와 별을 닮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홈마다 푸른빛이 아주 약하게 흐르고 있었다.

“사람 만든 것.” 에이라가 손끝으로 홈을 훑었다. “사람 어디?”

마르는 기둥 너머를 바라보았다. 길 끝에는 눈에 반쯤 묻힌 둥근 건물이 있었다. 돌로 지었지만 이음매가 보이지 않았고, 지붕 위의 뾰족한 장식은 바람을 맞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문은 손을 대기 전에 열렸다.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세 사람은 잠깐 서로를 보았다. 함정이어도 밖에 남는 것보다는 나았다.

안에는 횃불이 없었다. 벽 속에서 우윳빛이 번졌고, 바닥 중앙에는 둥근 받침대가 놓여 있었다. 받침대 주위로 같은 문양이 세 겹 겹쳐 있었다. 가장 바깥은 구름, 그 안은 날개, 중심에는 위를 가리키는 긴 선이었다.

마르는 손을 가까이 대 보았다. 목걸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시간의 문은 아니야.”

크로노는 받침대 가장자리의 눈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눈은 바깥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신발에서 녹아 떨어진 흔적이었다. 아주 오래되지 않았다.

사람이 다니는 곳이었다.

에이라가 받침대 한가운데로 올라섰다.

“에이라, 먼저 본다.”

“잠깐만.”

마르가 붙잡기도 전에 바닥의 문양이 밝아졌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에이라의 머리카락이 위로 솟았다. 그녀는 주먹을 들었지만, 빛은 공격하지 않았다. 발밑에서 솟은 푸른 기둥이 몸을 감싸더니 그대로 천장을 향해 끌어올렸다.

에이라가 사라졌다.

마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크로노는 망설이지 않고 받침대에 뛰어들었다. 마르도 그의 팔을 붙잡았다.

빛이 세상을 아래로 밀었다.

몸이 떨어지는 감각은 없었다. 오히려 땅이 멀어졌다. 돌과 얼음이 투명해지고, 그 사이로 끝없는 눈보라가 흘러내렸다. 아주 짧은 순간에 구름층이 눈앞으로 다가와 세 사람을 삼켰다.

구름 위에 떠 있는 질 왕국의 섬과 세 사람 - ArrPeeGe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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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크로노와 마르는 따뜻한 돌바닥 위로 굴러 나왔다.

“늦다.”

에이라가 먼저 도착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은 멀쩡했다.

이곳의 건물은 아래의 것과 닮았지만 벽에는 서리가 없었다. 열린 출구 너머로 햇빛이 쏟아졌다. 마르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가 말을 잃었다.

발아래에 구름이 있었다.

구름 위 섬 가장자리의 하늘길과 푸른 대지 - Vorxu
구름 위 섬 가장자리의 하늘길과 푸른 대지 - Vorxu

섬 하나가 하늘에 떠 있었다. 푸른 잔디가 바람에 눕고, 흰 꽃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투명한 물길이 허공을 따라 굽이쳤으며 그 위에는 빛으로 만든 작은 다리들이 걸려 있었다. 멀리에는 둥근 지붕과 가느다란 탑이 모인 도시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그 아래, 구름 틈으로 얼어붙은 땅이 보였다.

위에서는 봄이었고 아래에서는 세계가 얼어 죽고 있었다.

에이라가 잔디를 움켜쥐었다. 흙이 손가락 사이에서 부드럽게 부서졌다. 그녀는 살아 있는 흙을 확인하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하늘이 땅 훔쳤다.”

크로노는 도시를 보지 않고 섬의 가장자리를 살폈다. 떠 있는 땅 아래로 푸른 빛줄기들이 뻗어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뛰는 빛이었다.

마왕성의 의식실에서 들었던 울림.

라보스가 떨어진 땅에서 느꼈던 진동.

크로노가 옆구리에 손을 대자 상처 아래의 맥박과 섬의 빛이 잠시 같은 박자로 뛰었다.

그때 도시 쪽 길에서 흰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왔다. 눈보라를 뚫고 올라온 세 사람의 상처와 가죽옷을 보았지만 놀라지도, 경계하지도 않았다.

하늘길을 올라온 뒤 보이는 엔하사 입구 - Vorxu
하늘길을 올라온 뒤 보이는 엔하사 입구 - Vorxu

그는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꿈을 쉬러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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