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38화] 불탄 숲의 약속

라루바의 불은 비에 꺼지지 않았다.

굵은 물방울이 잿더미를 때릴 때마다 흰 김이 피어났다. 타다 남은 기둥 안쪽에서 붉은 빛이 되살아났고, 젖은 가죽과 머리카락 냄새가 낮은 골짜기에 고였다.

마르는 부러진 움막 벽을 들어 올렸다.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기침을 하며 기어 나왔다. 아이는 마르의 밝은 머리카락보다 활을 먼저 보았다. 손에 돌조각을 쥔 채 뒤로 물러나려 했다.

“괜찮아. 이오카에서 왔어.”

말이 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이라가 다가와 아이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가볍게 부딪치자 그제야 돌조각이 손에서 떨어졌다.

“이 아이 어머니?”

사람들 사이에서 다친 여자가 손을 들었다. 에이라는 아이를 안아 건넸다. 아이가 어머니의 목을 붙잡는 동안에도 주위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라루바의 늙은 지도자가 재를 밟으며 앞으로 나왔다. 한쪽 눈은 연기로 벌겋게 부어 있었고, 손에는 날이 닳은 돌창이 들려 있었다.

“아자라, 이오카 때문에 왔다.”

에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아자라, 사람 미워한다. 이오카 없어도 온다.”

“라루바 숨었다. 싸움 피했다. 그런데 에이라가 공룡 인간 물건 빼앗고, 공룡 인간 잡고, 아자라 화나게 했다.”

“빼앗긴 것 되찾았다.”

“되찾은 뒤 아자라는 약한 곳부터 태웠다.”

마르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보았다. 늙은이는 에이라를 미워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다친 사람과 빈 자리가 있었다. 숨어 살아온 판단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 지켜 온 방식도 함께 무너졌다. 그는 그 무게를 에이라 쪽으로 밀고 있었다.

에이라도 그것을 아는 듯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누가 잡혀갔나?”

늙은이는 끊어진 밧줄을 가리켰다.

“젊은 사람, 아이. 이오카 남자 하나도.”

“키노?”

대답 대신 한 여자가 키노의 목걸이를 내밀었다. 짐승 이빨 두 개를 엮은 끈은 중간에서 끊어져 있었다. 에이라는 그것을 받아 손 안에 쥐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움직임이 사라졌다.

카에루가 낮게 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갔나?”

라루바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 놀랐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이미 그날 밤 너무 많은 것을 본 얼굴들이었다. 사냥꾼 하나가 남쪽 절벽을 가리켰다.

“발자국, 큰 물 건넜다. 땅길 끝. 저 너머 돌집.”

마을 남쪽에는 검은 산줄기가 벽처럼 서 있었다. 그 너머로 아주 먼 불빛이 구름 아래에서 규칙적으로 번쩍였다. 자연의 불이라기에는 간격이 일정했다.

아자라의 요새였다.

“걸어서 갈 길 있나?” 마르가 물었다.

늙은이가 코웃음을 쳤다.

“사람 발로 못 간다. 날개 있으면 간다.”

에이라는 손 안의 목걸이를 허리끈에 묶었다.

“날개 있다.”

그녀는 북서쪽 봉우리를 가리켰다. 구름이 갈라질 때마다 뾰족한 바위들이 드러났고, 그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들이 원을 그렸다.

“프테라 둥지.”

라루바의 늙은이가 창끝으로 길을 막았다.

“에이라 또 싸우면 아자라 더 온다.”

“안 싸우면 잡혀간 사람 안 온다.”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 지킨다. 잡힌 사람도 데려온다.”

“둘 다 못 하면?”

에이라는 빗속에서 늙은이를 똑바로 보았다.

“그러면 에이라 먼저 못 돌아온다.”

그 말은 영웅의 약속이라기보다 순서를 정하는 말처럼 들렸다. 자신이 가장 앞에 서고, 실패의 대가도 먼저 받겠다는 뜻이었다.

크로노가 두 사람 사이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끊어진 밧줄 옆에 무릎을 꿇었다. 진흙에 남은 흔적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공룡 인간의 발톱 자국 사이에 사람 발자국이 있었고, 그중 하나는 오른발이 깊고 왼발이 얕았다. 다친 사람이 끌려간 흔적이었다.

발자국은 남쪽으로 가다가 돌바닥에서 사라졌지만, 바위 옆의 낮은 잎에는 같은 높이로 피가 묻어 있었다.

크로노는 에이라를 불러 그 흔적을 보여 주었다.

“키노 아니다.”

에이라는 한 번 보고 말했다.

“키노 발 크다. 이 사람 라루바.”

그녀는 주변을 더 살폈다. 바위 표면에 긁힌 얕은 선을 찾아 손끝으로 문질렀다.

“공룡 인간, 잡힌 사람 걸어서 데려가다 여기서 큰 짐승에 태웠다. 땅길 막힌 곳까지 간다. 그다음 돌집 아래 길 있다.”

“그러면 프테라로 성 위에 내리는 것만이 길은 아니겠군.” 카에루가 말했다. “그들이 포로를 옮긴 통로를 찾으면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

에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는 부상자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출발하면 새벽 전에 산기슭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크로노의 붕대는 다시 붉어지고 있었고, 카에루는 라루바 사람의 물통을 들어 주다가 손에서 한 번 놓쳤다.

“먼저 상처를 정리해야 해.”

에이라가 바로 반대하려 했으나 마르는 크로노가 아니라 그녀를 가리켰다. 에이라의 오른쪽 종아리에도 긴 상처가 나 있었다. 이오카에서 북쪽 숲까지 달려오는 동안 잎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왔다.

“너도.”

“이건 작은 상처.”

“작은 상처를 계속 밟으면 큰 상처가 돼.”

에이라는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크로노의 옆구리, 카에루의 어깨, 마르의 팔을 차례로 보았다.

“너희 시대 사람, 상처 많다.”

“이번에는 시대 탓이 아니야.”

마르는 타다 남은 움막 안에 자리를 만들었다. 라루바 사람들에게 깨끗한 천과 약초를 구하고, 빗물을 넓은 잎에 받아 끓였다. 카에루는 물의 힘을 쓰지 않았다. 대신 상처 주변을 씻고 붕대가 눌러야 할 위치를 잡아 주었다. 그의 손은 떨렸지만 매듭은 느슨하지 않았다.

크로노의 붕대를 풀자 옆구리 상처가 길게 벌어져 있었다. 마왕성에서 여러 번 억눌렀던 피가 추락 충격으로 다시 스민 상태였다.

“산을 오를 수는 있어.” 마르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앞장서면 안 돼. 뛰지도 말고.”

크로노가 에이라를 보았다.

“에이라 앞.”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들어 균형을 확인했다. 손목에 힘을 줄 때마다 어깨 상처가 당겼다.

“내 검은 내가 들겠네. 다만 물은 당분간 기대하지 말게.”

“그럼 나는 남은 화살을 세어 둘게.”

마르는 화살통을 엎었다. 온전한 화살은 많지 않았다. 촉이 깨진 것과 깃이 젖어 비뚤어진 것을 나누고, 부러진 화살 두 개를 이어 짧은 화살 하나로 만들었다. 에이라는 그 모습을 보다가 라루바의 사냥꾼들에게서 곧은 뼈조각을 받아 왔다.

“이거 촉. 돌보다 가볍다.”

두 사람은 불가에 앉아 화살 세 개를 더 만들었다. 마르가 깃의 방향을 맞추면 에이라가 질긴 섬유로 묶었다. 서로의 손놀림은 달랐지만 목적은 같았다.

비가 약해질 무렵, 라루바의 늙은이가 다시 찾아왔다.

그는 에이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에이라도 용서를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늙은이는 산의 동쪽 길이 비에 무너졌으며, 서쪽 절벽 아래의 고목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프테라, 사람 말 안 듣는다.”

“에이라 말 듣는다.”

“에이라 말도 가끔 안 듣는다.”

“그러면 에이라가 듣는다.”

늙은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라 부르기에는 짧았지만 적어도 창끝은 더 이상 길을 막지 않았다.

그는 타다 남은 나무판 위에 산의 모양을 그렸다. 손가락 하나로 강을, 두 손가락으로 갈라지는 절벽을 표시했다. 라루바가 숨어 온 세월 동안 싸움을 피하는 길만 익힌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오래 숲을 살폈기에 공룡 인간의 순찰이 닿지 않는 비탈과 프테라가 낮게 도는 시간을 알고 있었다.

에이라는 그 지도를 끝까지 본 뒤 나무판을 불에 넣지 않고 움막 벽에 기대 두었다. 두 사람이 택한 방식은 달랐지만, 그 밤에는 어느 쪽도 다른 쪽 없이 포로들에게 닿을 수 없었다.

새벽이 오기 전 네 사람은 라루바를 떠났다.

에이라가 선두에 섰고, 그 뒤를 마르가 따랐다. 크로노는 세 번째, 카에루는 마지막에서 발자국과 뒤쪽 숲을 살폈다. 평소라면 크로노가 먼저 위험을 향해 움직였겠지만, 이번에는 정해진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팔랐다. 나무뿌리가 바위를 움켜쥔 틈으로 붉은 물이 흘렀고, 머리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짐승들이 가지를 흔들었다. 에이라는 손으로 잡을 곳을 고르지 않았다. 발을 디딘 다음 몸이 기울기 전에 다음 돌을 붙잡았다. 마르는 그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 자신의 짧은 보폭에 맞는 길을 골랐다.

크로노가 미끄러운 뿌리 앞에서 멈추자 카에루가 뒤에서 어깨를 받쳤다.

“서두르지 말게. 오늘은 뒤에 있는 것이 내 역할인 듯하니.”

크로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턱에 이르렀을 때 아래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라루바의 연기는 비에 눌려 땅 가까이 퍼졌고, 그 너머 이오카의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두 마을 사이의 숲에는 검은 상처 같은 길이 나 있었다. 공룡 인간들이 지나간 자리였다.

마르는 더 멀리 남쪽을 보았다.

산줄기 너머로 돌로 쌓은 거대한 요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은 숲보다 높았고, 꼭대기에서는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였다. 성 주위를 도는 것은 새가 아니었다. 넓은 가죽 날개와 긴 꼬리를 가진 생물들이 바람 속을 가르고 있었다.

에이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산 위에서 같은 소리가 돌아왔다.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 경고에 가까웠다. 날카로운 울음이 바위를 타고 내려오자 작은 짐승들이 일제히 숲으로 숨었다.

에이라는 웃었다.

“프테라, 깨어 있다.”

그녀는 키노의 끊어진 목걸이를 한 번 만지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누구도 뒤에 남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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