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37화] 붉은 하늘 아래
추락에는 끝이 없었다.
크로노는 마르의 팔을 잡고 있었다. 반대편 손에는 카에루의 손가락이 걸려 있었다. 셋을 잇는 힘은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검은 틈이 몸을 잡아당길 때마다 손과 손 사이에서 무게가 옮겨 갔다.
마왕성의 푸른 촛불이 뒤집힌 채 멀어졌다. 돌바닥과 의식의 원, 한쪽 무릎을 꿇었던 마왕의 그림자가 얇은 조각으로 찢어졌다. 그 뒤에서 여러 시대의 빛이 한꺼번에 흘렀다. 눈 덮인 벌판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쇠로 된 폐허의 벽이 세 사람의 발밑을 스쳤다. 축제의 종소리와 짐승의 울음이 같은 거리에서 들렸다.
마르의 손이 미끄러졌다.
크로노는 옆구리가 찢어지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팔을 당겼다. 손목까지 내려갔던 손가락이 다시 그녀의 팔꿈치에 걸렸다. 카에루가 몸을 비틀어 두 사람 쪽으로 붙으려 했으나, 검은 틈 속에서는 몸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다른 방향으로 밀려났다.
“빛을 보게!”
카에루의 목소리는 멀고 낮게 찌그러져 들렸다.
붉은 하늘이 세 사람 아래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색이 아니라 공기가 먼저 닿았다. 뜨겁고 젖은 바람이었다. 흙과 짓이겨진 잎, 오래된 피와 꽃가루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찔렀다. 검은 틈이 갑자기 닫히며 세 사람을 뱉어 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있었다.
크로노의 어깨가 잎이 넓은 가지를 부러뜨렸다. 마르의 몸이 덩굴에 걸려 한 바퀴 돌아갔고,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은 채 다른 가지를 발로 찼다. 낙하가 꺾일 때마다 손에 걸린 무게가 달라졌다.
마지막 가지가 부러졌다.
세 사람은 축축한 비탈 위로 떨어졌다. 붉은 진흙이 등을 받았다가 그대로 아래로 흘려보냈다. 크로노는 마르를 놓치지 않으려 몸을 돌렸고, 카에루는 검이 땅에 박히지 않게 칼등을 세웠다. 셋은 뒤엉킨 채 고사리 숲을 밀고 내려가 얕은 물웅덩이에서 멈췄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잠시 사라졌다.
크로노는 숨을 들이마시려 했으나 옆구리에서 단단한 손이 폐를 움켜쥔 듯했다. 입안에 흙맛이 났다. 마르의 손이 아직 자신의 소매를 잡고 있다는 것만 확인한 뒤 눈을 감았다.
멀리서 무언가가 나무 위를 달려왔다.
발소리는 사람보다 빨랐고 짐승보다 규칙적이었다. 잎 사이로 황금빛 머리카락이 한 번 번쩍였다.
“크로!”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크로노는 비로소 추락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짚을 엮은 천장이 보였다.
천장 한가운데 난 구멍으로 붉은 저녁빛이 들어왔다. 낮은 화덕에서는 쓴 풀 냄새가 나는 물이 끓고 있었고, 문가에는 처음 보는 돌도끼와 익숙한 활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활의 몸체에는 흠집이 늘었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젖은 시위는 풀려서 따로 말리고 있었다.
크로노가 몸을 일으키자 옆구리의 새 붕대가 당겼다.
“누워.”
마르가 화덕 옆에서 곧바로 말했다. 왼팔에는 화상 위로 풀잎을 얹은 천이 감겨 있었고 얼굴의 작은 상처는 진흙을 닦아 낸 뒤 더 선명해져 있었다.
“네 상처, 다시 열렸어. 에이라가 약초를 발라 줬는데 피가 완전히 멎은 건 아니야.”
카에루는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랜드리온은 손 닿는 곳에 놓여 있었고, 영웅의 표식도 목에 남아 있었다. 어깨의 상처에는 두꺼운 짐승 가죽 조각이 덧대어졌다. 손끝은 여전히 가늘게 떨렸다.
크로노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낯선 움막은 아니었다. 벽에 걸린 짐승 뿔의 배열과 화덕 옆의 붉은 돌절구를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드림스톤을 구하러 왔던 날, 이곳에서 밤새 북소리와 웃음이 이어졌다. 그때는 돌아갈 문이 있었고 다음 목적지도 알고 있었다. 같은 장소인데도 지금은 바깥의 숲이 훨씬 넓고 어둡게 느껴졌다.
마르는 화덕 가까이에 놓인 붉은 돌조각을 집어 들었다. 드림스톤의 부스러기였다. 그녀는 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어깨에서 힘을 조금 뺐다.
“정말 그때 그곳이야.”
시간의 틈에서 본 붉은 하늘만으로 짐작했던 시대가 사물의 기억으로 확정되었다. 기원전 육천오백만 년. 라보스가 마왕보다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말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마왕은 없었네.” 카에루가 먼저 말했다. “우리가 떨어진 산과 주변 숲을 에이라가 살폈지만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군.”
문밖에서 무거운 것을 끄는 소리가 났다. 에이라가 통나무만 한 짐승 다리를 어깨에 멘 채 들어왔다. 그녀는 세 사람을 차례로 보고, 마지막에 크로노가 일어난 것을 확인했다.
“크로, 튼튼하다. 산에서 떨어지고도 벌써 앉는다.”
마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앉는 것과 괜찮은 건 달라.”
“마르 말 맞다. 그래서 에이라, 크로 세 번 더 눕힌다.”
에이라는 짐승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크로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힘을 거의 쓰지 않은 듯했는데도 그는 다시 짚자리로 눕혀졌다.
카에루가 자신의 붕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우리를 모두 그 산에서 이곳까지 옮겼나?”
“한 번에 셋은 무겁다. 두 번 갔다.”
에이라는 산 위에서 검은 구멍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처음 발견한 것은 나무에 걸린 마르의 활이었고, 그 아래 비탈에서 세 사람을 찾았다. 하늘을 오래 돌며 다른 사람이 떨어지는지도 살폈지만 창백한 얼굴의 사내도, 검은 망토도 보지 못했다.
“두 번이라면 한 사람은 산에 남겨 두었다는 뜻 아닌가.”
에이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카에루를 가리켰다.
“카에루, 마지막. 큰 개구리 먹으려는 짐승 없다.”
카에루의 목에서 낮은 신음 같은 소리가 났다. 마르가 웃음을 참다가 화상 입은 팔을 건드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잠깐의 웃음은 마왕성에서 굳어 있던 숨을 조금 풀어 주었지만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문밖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에이라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바닥에 내려놓은 고기를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나갔다. 크로노도 일어나려 했으나 마르가 먼저 문 쪽으로 향했다.
이오카 마을 중앙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냥꾼 둘이 그 사이로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한 사람의 어깨에는 검은 화살촉이 박혀 있었고, 다른 사람은 그을린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아이의 눈은 떠 있었지만 울지 않았다.
“북쪽 숲, 불.”
사냥꾼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라루바 쪽. 공룡 인간 많다. 사람 잡아간다.”
마을의 소리가 한순간 낮아졌다. 누군가는 창을 찾았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움막 안으로 몰아넣었다. 에이라는 부상자의 어깨에 박힌 화살촉을 살폈다. 돌도 뼈도 아니었다. 짙은 녹색 비늘을 갈아 만든 끝이었다.
“아자라.”
그 이름은 짧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움직였다.
마르는 아이를 내려받아 화상 부위를 확인했다. 피부에 붙은 재를 물로 씻으려 손을 들었으나, 허공에서 모인 물방울은 마왕성에서보다 훨씬 적었다. 피로가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힘을 더 끌어내는 대신 화덕의 미지근한 물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카에루는 어깨에 박힌 화살을 바로 뽑지 않았다. 주변 살을 누르고, 화살촉의 갈고리 방향을 확인한 뒤 가죽끈으로 팔 위쪽을 묶었다. 물의 힘을 부르려던 손가락은 금세 떨렸다. 그는 손을 내리고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했다.
에이라는 북쪽을 보았다. 마을 밖의 나무 위로 검은 연기가 얇게 올라오고 있었다.
“에이라 간다.”
“그 몸으로 혼자?” 마르가 물었다.
“에이라 몸 멀쩡하다.”
“우리 몸 말이야.”
에이라는 그제야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크로노는 문기둥을 짚고 서 있었고, 카에루는 화살을 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르의 활은 아직 시위조차 매지 못했다.
“너희, 여기 있어도 된다.”
그 말에는 배려보다 판단이 담겨 있었다. 지금의 세 사람은 추격에 방해가 될 수 있었다.
크로노는 대답 대신 자신의 붕대를 한 번 눌렀다. 손바닥에 새 피가 묻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문가의 짧은 검을 허리에 찼다.
마르는 말린 시위를 들어 활에 걸었다. 손상된 부분을 살피고 두 번 당겨 보았다. 화상 입은 팔이 떨렸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카에루는 부상자의 화살을 뽑아 상처를 묶은 뒤 그랜드리온을 들었다. 검끝이 바닥에서 아주 조금 흔들렸다.
“우리는 라보스가 이 시대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 떨어졌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 닿자마자 전쟁의 불을 보았지. 우연이라 여겨도 지나쳐 확인할 수는 없네.”
에이라는 라보스라는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세 사람이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들었다.
“그러면 따라온다. 느리면 에이라 버린다.”
그녀는 북쪽 숲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도 뒤를 따랐다.
이오카의 불빛이 나무 뒤로 사라지자 밤은 완전히 다른 색이 되었다. 붉은 달빛 아래에서 커다란 잎들이 젖은 가죽처럼 빛났다. 멀리서 들리는 짐승의 울음은 어느 시대의 성벽보다 넓은 공간을 흔들었다.
크로노는 달릴 때마다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세어 보았다. 열 걸음마다 한 번씩 숨이 짧아졌다. 그는 숨기지 않고 손을 들어 속도를 늦췄다. 마르는 말없이 에이라에게 신호했고, 에이라는 한 번 돌아본 뒤 보폭을 줄였다.
누구도 그것을 약함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숲이 끝나는 곳에서 불빛이 보였다.
처음에는 노을이 남은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빛은 땅 아래에서 올라왔다. 나무껍질이 갈라지며 붉게 타고 있었고, 진흙 위에는 맨발 자국과 발톱 자국이 뒤엉켜 있었다.
에이라는 가장 앞의 재더미 앞에서 멈췄다.
불탄 움막들 사이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반가움보다 먼저 오래 참은 분노가 떠올랐다.
라루바 마을이었다.
그리고 마을 중앙의 기둥에는 끊어진 밧줄 여러 가닥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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