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36화] 검은 바람을 부르는 자
카에루가 눈을 뜨자 촛불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푸른 불이었다.
양쪽 벽에 늘어선 촛대가 세 사람이 걷는 속도에 맞춰 차례로 살아났다. 불꽃에는 열이 없었다. 마법 동굴의 횃불도, 가르디아 성의 등잔도 아닌 빛이 검은 복도를 길게 밀어 냈다.
앞에서는 심장 같은 소리가 계속 울렸다.
둥.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바닥이 발바닥 아래에서 아주 조금 떨렸다.
마르는 활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성 전체가 울리는 것 같아.”
크로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옆구리에 새로 감은 붕대 위로 손이 잠깐 갔다가 검자루로 돌아왔다.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들었다.
검의 붉은 이음선이 심장 소리에 맞춰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그는 그 반응이 싫었다.
검이 라보스를 아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복도 끝에는 문이 없었다.
검은 장막이 바닥까지 내려와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천이 천천히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카에루가 장막을 걷었다.
그 너머에는 거대한 원형 방이 있었다.
처음에는 천장이 없는 줄 알았다.
고개를 들어도 검은 어둠만 이어졌다. 벽은 원형으로 휘어 있었고, 바닥에는 수십 겹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보랏빛 선과 붉은 선, 푸른 선이 서로 겹치며 방 가운데로 모였다.
중앙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망토.
긴 푸른 머리.
손에는 낫처럼 굽은 칼날이 들려 있었다.
열 해 전 데나도로 산에서 보았던 모습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마왕.
카에루의 발이 멈췄다.
사이러스가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던 장면이 기억보다 먼저 몸에 돌아왔다. 손가락이 굳고, 목 안쪽이 마르고, 바닥이 비에 젖은 산길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밀지 않았다.
앞에서도 누군가 대신 서지 않았다.
마르는 오른쪽에 있었다.
크로노는 왼쪽에 있었다.
카에루는 가운데에 서 있었다.
마왕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결국 왔군.”
목소리는 낮았다.
비네처럼 크게 웃지도, 소이소처럼 자세를 재지도, 마요네처럼 마음속을 헤집지도 않았다.
그는 카에루의 얼굴보다 검을 먼저 보았다.
“그랜드리온.”
붉은 이음선이 한 번 크게 빛났다.
마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시 붙였나.”
카에루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부러지지 않을 걸세.”
“검은 그렇겠지.”
마왕의 시선이 카에루의 목으로 내려갔다.
영웅의 표식이 걸려 있었다.
“그걸 네가 달고 있을 줄은 몰랐군, 글렌.”
본명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마르는 잠깐 카에루를 보았다.
카에루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사이러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내가 먼저 꺼낸 적은 없다.”
마왕은 낫을 바닥에 세웠다.
“너희가 과거를 짊어지고 여기까지 온 것뿐이지.”
크로노가 방 가운데의 마법진을 보았다.
붉은 선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바깥에서 안쪽으로 뛰고 있었다. 서기 2300년 기록에서 보았던 라보스의 충돌 흔적과 닮은 문양이었다.
마르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라보스를 부르는 거야?”
마왕의 눈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향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지?”
“미래에서.”
방 안의 공기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마왕의 표정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낫을 쥔 손가락이 아주 조금 굳었다.
“미래.”
그는 그 단어를 확인하듯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면 그날을 보았겠군.”
마르의 활끝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서기 1999년.”
“연도까지.”
마왕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성가신 시간 여행자들이군.”
카에루가 검을 세웠다.
“그 괴물을 불러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자가 할 말은 아니지.”
마왕의 시선이 돌아왔다.
“멸망시키려 한다?”
그가 아주 작게 웃었다.
비웃음이라기보다 어이없다는 반응에 가까웠다.
카에루는 그 뜻을 물을 틈이 없었다.
마법진의 붉은 선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마왕이 낫을 휘둘렀다.
검은 바람이 방을 가로질렀다.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으로 막았다.
충격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열 해 전 검이 부러지던 소리가 귀 안에서 다시 들리는 듯했다.
이번에는 칼날이 버텼다.
붉은 이음선이 밝아졌다.
크로노가 옆으로 파고들었다.
짧은 검이 마왕의 옆구리를 향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쳤다.
푸른 빛이 원형으로 번졌다.
크로노가 뒤로 튕겨 나갔다.
마왕의 손끝에서 번개가 솟았다.
방 전체가 흰빛으로 찼다.
카에루는 몸을 낮췄다.
번개가 어깨를 스쳤다. 피부가 타는 냄새가 났다.
마르는 기둥 뒤로 몸을 피했지만 바닥을 타고 흐른 전류가 장화를 때렸다.
“장벽이 있어!”
그녀가 외쳤다.
카에루도 보았다.
마왕의 몸 주위에 푸른 막이 있었다. 크로노의 검을 튕겨 낸 바로 그 빛이었다.
그런데 번개가 지나간 뒤 막의 색이 달라졌다.
푸른빛 안쪽에 흰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크로노가 손을 들었다.
자신의 손끝에도 번개가 모였다.
마르가 이해했다.
“같은 힘으로?”
크로노가 번개를 쏘았다.
이번에는 막이 튕기지 않았다.
전기가 장벽을 통과해 마왕의 어깨를 때렸다.
마왕의 몸이 반 걸음 밀렸다.
그는 크로노를 보았다.
“그 힘까지 배웠나.”
장벽이 다시 흔들렸다.
흰 전기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푸른 물결이 표면을 돌았다.
마왕이 손을 들었다.
허공에서 얼음 조각 수십 개가 생겼다.
마르가 눈을 크게 떴다.
“숙여!”
얼음이 비처럼 쏟아졌다.
카에루는 물을 끌어올려 앞을 막았다. 얼음 조각이 물막이에 박혔다. 마르는 냉기를 반대로 밀어 들어오는 얼음을 서로 붙였다.
크로노가 몸을 굴려 피했다.
공격이 멎자 마르는 바로 화살을 걸었다.
화살촉에 냉기를 모았다.
“이번엔 내 쪽이야.”
얼음 화살이 마왕의 장벽을 뚫었다.
푸른 막이 크게 흔들렸다.
카에루도 손바닥에서 물줄기를 쏘았다.
같은 성질의 힘이 장벽 안으로 들어갔다.
마왕은 낫으로 물줄기를 갈랐지만 한쪽 소매가 젖었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의 무관심이 사라지고 있었다.
“장벽이 바뀐다.”
카에루가 말했다.
마르는 마왕의 몸 주위를 보았다.
“공격받을 때마다.”
마법 동굴에서 죽은 병사의 경고가 떠올랐다.
광대는 공격을 받을 때마다 방어를 바꾼다.
이 성의 마법은 서로 닮은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왕이 낫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불이 일었다.
검은 방 안에서 붉은 불기둥이 솟았다.
마르는 반사적으로 냉기를 쏘려 했다가 멈췄다.
장벽 표면에도 붉은 불이 돌고 있었다.
그들에게 불을 다루는 사람은 없었다.
루카는 시간의 끝에 남아 있었다.
마왕의 불길이 좁혀 왔다.
크로노가 카에루를 보았다.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쥐었다.
마법이 없다면 검으로 장벽을 바꾸면 된다.
그는 앞으로 뛰었다.
마왕의 낫이 내려왔다.
그랜드리온으로 받아 냈다.
두 칼날이 부딪친 순간 높은 음과 낮은 음이 동시에 울렸다.
마왕의 눈이 크게 뜨였다.
붉은 이음선에서 빛이 터졌다.
장벽이 흔들렸다.
다른 공격과 달랐다.
그랜드리온이 닿자 장벽의 겉면뿐 아니라 안쪽의 빛까지 한순간 얇아졌다.
마왕이 즉시 뒤로 물러났다.
“그 검이…….”
카에루가 한 걸음 더 들어갔다.
“기억났나?”
마왕의 낫이 옆으로 베어 왔다.
카에루는 검으로 막고 몸을 낮췄다. 열 해 전처럼 힘의 차이에 밀려나지 않았다. 완전히 대등한 것도 아니었다. 마왕의 한 번 한 번이 팔을 저리게 했고, 발밑 돌이 갈라졌다.
그러나 그랜드리온이 닿을 때마다 장벽은 얇아졌다.
마르가 그것을 보았다.
“카에루, 한 번 더!”
카에루가 검을 올렸다.
마왕은 장벽을 바꿨다.
불빛이 사라지고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방 안의 촛불이 모두 꺼졌다.
어둠 속에서 땅이 내려앉는 느낌이 왔다.
크로노의 숨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렸다가 멀어졌다.
마르가 이름을 불렀다.
“크로노!”
대답이 없었다.
카에루는 검을 바닥에 세웠다.
그랜드리온의 붉은 선만 어둠 속에서 보였다.
마왕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사이러스가 죽던 날에도 그렇게 서 있었나?”
카에루의 몸이 굳었다.
“친구가 죽는 동안 뒤에서 검을 들고.”
목소리는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누구 뒤에 숨을 생각이지?”
카에루는 눈을 감았다.
마요네의 환영과 달랐다.
지금 들리는 말은 거짓 기억이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이 수없이 스스로에게 해 온 말이었다.
그래서 더 깊이 들어왔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발밑의 물기를 찾았다.
마왕의 얼음이 녹아 바닥에 남은 물.
마르가 만든 서리.
크로노의 피 한 방울.
자신의 젖은 소매.
물은 어둠 속에서도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르는 빈곳이 있었다.
마왕이 서 있는 자리였다.
카에루가 몸을 돌렸다.
그랜드리온을 휘둘렀다.
쇳소리가 났다.
어둠이 갈라졌다.
장벽의 검은 빛이 흔들리며 다른 색으로 바뀌었다.
흰 전기였다.
크로노의 번개가 바로 날아왔다.
마왕이 미처 막지 못했다.
빛이 어둠을 찢었다.
마르도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한쪽에 작은 상처가 있었지만 서 있었다.
“숨은 사람 없네.”
그녀가 말했다.
카에루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한 것인지 마왕에게 한 것인지 묻지 않았다.
전투는 길어졌다.
마왕의 장벽은 번개, 물과 얼음, 불, 어둠 사이를 계속 바꿨다.
크로노와 마르는 자신들이 닿을 수 있는 성질을 기다렸다.
닿을 수 없는 장벽이 나타나면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으로 억지로 균열을 만들었다.
그때마다 마왕의 반격이 왔다.
불이 바닥을 태웠고, 얼음이 기둥을 부쉈으며, 번개가 천장에서 내려왔다. 검은 파동은 피부를 베지 않았지만 몸 안의 힘을 조금씩 빼앗았다.
카에루는 세 번 치유를 사용했다.
첫 번째는 마르의 팔에 난 화상을 식혔다.
두 번째는 크로노의 옆구리에서 다시 번지는 피를 눌렀다.
세 번째에는 자기 손목의 감각을 되돌렸다.
그 뒤에는 물을 모아도 손끝이 떨렸다.
“더 하지 마.”
마르가 말했다.
“그대도 상처가 있네.”
“움직일 수 있어.”
카에루가 그녀를 보았다.
마르는 바로 덧붙였다.
“괜찮다는 뜻은 아니고.”
그 말에 카에루는 아주 짧게 웃었다.
마왕이 낫을 들어 올렸다.
장벽이 다시 물빛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카에루가 공격하지 않았다.
마르가 먼저 냉기를 보냈다.
푸른 빛이 장벽을 통과했다.
마왕이 얼음을 낫으로 깨뜨리는 순간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으로 들어갔다.
검이 장벽을 찢었다.
크로노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짧은 검이 마왕의 옆구리를 스쳤다.
처음으로 피가 났다.
붉은 피였다.
마왕도 그 색을 잠깐 바라보았다.
카에루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열 해 동안 머릿속에서 마왕은 사람보다 재난에 가까웠다. 검을 부수고, 사이러스를 죽이고, 자신의 몸을 바꾼 검은 힘.
그런 존재에게도 피가 있었다.
그 사실이 복수를 쉽게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렵게 만들었다.
죽일 수 있는 대상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마왕이 뒤로 물러났다.
장벽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다른 색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는 낫을 양손으로 잡았다.
방 바닥의 모든 마법진이 동시에 빛났다.
카에루는 위험을 느꼈다.
“막이 없어졌네.”
마르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게 좋은 거 아니야?”
마왕 주위의 공기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촛불이 꺼진 자리에서 검은 입자들이 떠올랐다. 천장 없는 어둠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크로노가 고개를 들었다.
마왕이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벽을 유지하던 힘까지 모두 한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아니.”
카에루가 말했다.
“저걸 쓰려고 막을 버린 거야.”
마왕의 낫 위에 검은 구체가 생겼다.
작은 점이 순식간에 사람보다 커졌다.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빛을 삼키는 덩어리였다.
마르가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막아?”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보았다.
검도 답을 주지 않았다.
크로노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마왕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마르의 앞에 섰다.
카에루도 두 사람 옆으로 갔다.
혼자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카에루가 남은 물을 모두 끌어올렸다.
마르는 그 물의 바깥을 얼렸다.
두꺼운 얼음벽이 세 사람 앞에 생겼다.
크로노가 검을 얼음 바닥에 꽂았다.
번개가 칼날을 따라 퍼졌다.
물과 얼음 사이에서 푸른 전류가 그물처럼 번졌다.
마왕이 낫을 내렸다.
검은 구체가 떨어졌다.
소리가 사라졌다.
충돌 순간에는 폭발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카에루는 몸이 뒤로 날아가는 감각만 느꼈다.
얼음벽이 부서졌다.
물이 증발했다.
번개가 검은 덩어리 안에서 휘어졌다.
세 사람은 바닥을 굴렀다.
카에루의 등과 어깨가 돌에 부딪쳤다.
숨이 나오지 않았다.
귀가 먹먹했다.
한동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마르의 기침이 들렸다.
크로노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카에루는 그 사실부터 확인했다.
마왕도 서 있었다.
그러나 낫을 든 팔이 내려가 있었다.
숨이 거칠었다.
장벽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에루가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랜드리온을 지팡이처럼 짚었다.
마왕이 그를 보았다.
“아직도 일어나나.”
카에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크로노가 옆에 섰다.
마르도 활을 다시 들었다. 남은 화살은 많지 않았다.
셋은 동시에 움직였다.
마르의 마지막 냉기가 마왕의 발밑을 얼렸다.
크로노가 정면으로 들어갔다.
마왕의 낫이 그를 막으러 움직였다.
카에루가 반대편에서 그랜드리온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검과 낫이 맞부딪치지 않았다.
크로노의 짧은 검이 낫의 자루를 아래에서 밀어 올렸다.
카에루의 그랜드리온이 빈 길을 따라 들어갔다.
칼끝이 마왕의 가슴 앞에서 멈췄다.
마왕의 낫도 카에루의 목 가까이에 있었다.
둘 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서로를 벨 수 있었다.
카에루는 사이러스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랜드리온을 더 밀었다.
마왕이 몸을 틀었다.
칼날이 옆구리를 깊게 베었다.
동시에 낫이 카에루의 어깨를 스쳤다.
두 사람이 반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마왕이 먼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카에루는 검을 놓치지 않았다.
크로노와 마르가 움직이려 했지만 손을 들어 막았다.
그는 스스로 일어섰다.
마왕도 고개를 들었다.
“끝내러 왔나, 글렌.”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들었다.
검끝이 마왕을 향했다.
열 해 동안 수없이 상상한 순간이었다.
사이러스의 무덤 앞에서.
저주받은 숲의 어두운 집에서.
비 오는 밤마다.
마왕을 쓰러뜨리고 검을 목에 대는 장면을 생각했다.
그때의 자신은 언제나 혼자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상상과 실제 사이에는 하나가 더 보였다.
방 가운데의 마법진.
여전히 뛰고 있었다.
둥.
바닥이 흔들렸다.
카에루의 시선이 잠깐 아래로 갔다.
마왕이 그걸 보았다.
“늦었다.”
마르가 활을 겨눴다.
“뭐가?”
마왕은 웃지 않았다.
“너희는 내가 라보스를 만든 자라고 생각했나?”
카에루의 검끝이 멈췄다.
크로노가 마왕을 보았다.
마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이 답이었다.
마왕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을 누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바닥의 붉은 선이 한꺼번에 밝아졌다.
“나는 불렀을 뿐이다.”
마르의 얼굴이 굳었다.
“뭐?”
“라보스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세계에 있었다.”
카에루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마왕을 쓰러뜨리면 미래의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헤케란의 말, 서기 2300년의 기록, 마왕성의 문양. 모든 것이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 방향이 갑자기 꺾였다.
“그럼 왜 부르는 거지?”
마르가 물었다.
마왕의 눈이 그녀에게 갔다가 다시 마법진으로 내려갔다.
“그것은—”
말이 끝나지 않았다.
땅 아래에서 울음이 올라왔다.
소리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산 전체가 목구멍이 되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카에루의 몸이 굳었다.
그랜드리온이 손 안에서 미친 듯이 떨렸다.
마왕도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직 아니다.”
그가 일어서려 했다.
“의식이 끊겼는데 왜—”
바닥 한가운데가 검게 꺼졌다.
마법진의 선들이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르는 뒤로 물러났다.
“시간의 문?”
크로노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아는 문과 달랐다.
푸른 소용돌이도, 빛의 길도 없었다.
검은 구멍 가장자리에서 여러 시대의 색이 동시에 번쩍였다. 천년제의 햇빛, 서기 2300년의 회색 하늘, 선사시대의 붉은 노을이 한순간씩 나타났다 사라졌다.
시간 자체가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마왕이 마법진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물러서!”
그가 처음으로 세 사람에게 명령하듯 외쳤다.
이미 늦었다.
검은 구멍에서 바람이 솟았다.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이었다.
마르의 발이 미끄러졌다.
크로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을 바닥에 꽂았다.
칼날이 돌을 파고들었지만 바닥 자체가 갈라지고 있었다.
마왕의 망토가 먼저 들렸다.
그도 구멍 쪽으로 끌려갔다.
카에루는 그 모습을 보았다.
마왕은 이 현상을 통제하고 있지 않았다.
그 사실만은 분명했다.
“마왕!”
카에루가 외쳤다.
“라보스가 무엇이지!”
마왕이 대답하려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바닥이 갈라졌다.
그의 몸이 검은 빛 속으로 떨어졌다.
한순간 푸른 머리카락과 검은 망토만 보였다.
곧 사라졌다.
“카에루!”
마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랜드리온이 바닥에서 빠졌다.
카에루의 몸도 앞으로 끌려갔다.
크로노가 손을 뻗었다.
카에루는 그 손을 잡았다.
마르는 크로노의 반대편 팔을 붙들고 있었다.
세 사람이 한 줄로 버텼다.
이번에도 혼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잡을 바닥이 없었다.
원형 방 전체가 안쪽으로 무너졌다.
푸른 촛불이 하나씩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갔다.
기둥과 돌, 비네가 새겨 놓은 문장, 마왕의 낫까지 허공에서 회전했다.
크로노의 발밑이 사라졌다.
세 사람은 함께 떨어졌다.
빛이 뒤집혔다.
카에루는 마르의 손이 크로노의 팔을 놓치지 않는 것을 보았다.
크로노도 자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랜드리온은 다른 손에 있었다.
영웅의 표식이 목에서 떠올라 얼굴을 쳤다.
어디선가 라보스의 울음이 다시 들렸다.
그 소리 사이로 열 해 전의 비가 잠깐 스쳤다.
사이러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기억이 카에루를 뒤로 끌지 않았다.
그는 떨어지는 동안 앞을 보았다.
검은 시간의 틈 너머로 붉은 하늘이 번쩍였다.
익숙한 색이었다.
아주 오래된 시대의 하늘.
세 사람의 몸이 그 빛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왕성의 돌바닥도, 마법진도, 쓰러진 마왕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한 문장뿐이었다.
라보스는 마왕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더 짧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처음으로, 적의 얼굴 뒤에 있던 세계의 크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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