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35화] 백 번째 발소리

빛이 사라졌을 때 크로노의 발밑에는 바닥이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돌판이 느리게 뒤로 흘렀다. 양옆에는 높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가 벌어져 있었고, 천장에서는 굵은 쇠사슬이 여러 줄 내려와 흔들렸다. 중앙 홀과 이어져 있던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마르가 균형을 잡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또 다른 층이야?”

카에루는 대답하지 않고 그랜드리온으로 움직이는 바닥을 짚었다. 칼끝이 돌판의 이음새를 따라 밀렸다.

“성의 안쪽이겠지.”

크로노는 벽을 보았다.

방금 지나온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보랏빛 벽 한가운데에는 얼굴만 한 검은 원이 있었고, 그 안에서 비네의 눈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어서 오라고!”

목소리가 천장과 바닥에서 동시에 울렸다.

“검사와 마법사를 이겼다고 내가 기다리고만 있을 줄 알았나?”

앞쪽에서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크로노가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칼날이 천장에서 떨어졌다.

그는 마르의 어깨를 밀었다. 셋이 동시에 옆으로 몸을 던졌다. 칼날은 움직이는 돌판 한가운데를 찍었다. 불꽃이 튀고, 바닥은 멈추지 않은 채 칼 아래로 흘러갔다.

두 번째 칼날이 앞에서 내려왔다.

이번에는 피할 공간이 좁았다.

카에루가 손을 들었다.

바닥 가장자리에서 습기가 모였다. 물이 칼날 옆면에 얇게 붙었다. 거대한 쇳덩이를 멈출 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내려오는 방향을 아주 조금 틀었다.

칼끝이 돌판 모서리에 박혔다.

크로노는 그 사이를 지나갔다.

마르가 뒤따랐다.

움직이는 바닥 끝에는 작은 발판이 있었다. 세 사람이 올라서자 뒤쪽 돌판이 그대로 구덩이 안으로 사라졌다.

비네의 웃음이 들렸다.

“아깝군!”

마르가 위를 향해 활을 겨눴다.

“얼굴 보이면 먼저 쏠 거야.”

“공주님답지 않게 성급하군!”

“너 때문에 배웠어.”

대답은 없었다.

대신 앞문이 열렸다.

좁은 복도 너머로 여러 형체가 서 있었다.

사람 키만 한 둥근 몸에 긴 팔다리가 달린 괴물들이었다. 얼굴에는 흰색과 검은색이 반씩 칠해져 있었다. 손에는 무기가 없었지만 허리와 어깨에 작은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크로노는 한 놈을 알아보았다.

마법 동굴에서 죽어 있던 가르디아 병사가 피로 남긴 경고가 떠올랐다.

같은 방식으로 계속 덤비지 마라.

공격을 받을 때마다 방어를 바꾼다.

광대.

첫 번째 놈이 발을 끌며 다가왔다.

카에루가 검을 세웠다.

크로노는 손을 들어 막았다.

“내가 먼저.”

그는 짧은 검으로 놈의 어깨를 베었다.

칼날이 살을 가르지 못했다.

표면이 갑자기 돌처럼 단단해졌다. 검이 튕겨 나오며 손목이 울렸다.

광대의 얼굴에서 검은 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르가 냉기를 쏘았다.

이번에는 통했다.

얼음이 가슴부터 번지며 몸을 굳혔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표면의 돌빛이 사라지고 얇은 보랏빛 막이 올라왔다. 냉기가 막에 닿자 흩어졌다.

카에루가 말했다.

“바뀌었네.”

크로노가 다시 검을 넣었다.

이번에는 칼날이 깊이 들어갔다.

놈이 비명을 질렀다.

뒤에 있던 둘이 동시에 움직였다.

마르는 한 발 뒤로 물러나 활시위를 당겼다.

“한 번씩 바꿔.”

카에루가 물을 바닥에 흘렸다.

광대 하나가 물 위를 밟았다. 몸 표면에는 아직 물리 공격을 막는 단단한 빛이 남아 있었다.

마르가 물을 얼렸다.

발이 붙었다.

놈의 몸에 보랏빛 막이 생겼다.

크로노가 달려들어 옆구리를 베었다.

다른 놈은 반대로 크로노의 첫 공격을 받아 몸을 굳혔다. 카에루가 손바닥에서 물줄기를 만들어 얼굴을 때렸다. 마법을 막는 막이 생기자 마르가 화살을 그대로 쏘았다.

화살촉이 목에 박혔다.

세 사람은 말이 줄었다.

한 번 보고, 바뀐 것을 확인하고, 다른 방식으로 공격했다.

병사가 남긴 글은 짧았지만 살아 있는 사람 하나만큼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가 직접 이 복도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그의 실패가 세 사람의 다음 발을 옮기고 있었다.

마지막 광대가 쓰러졌다.

마르는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 경고, 가져오길 잘했네.”

카에루가 검에 묻은 검은 액체를 털었다.

“그러라고 남긴 것이겠지.”

크로노는 대답 대신 앞문을 열었다.

그 뒤부터 비네는 모습을 더 자주 드러냈다.

다음 방에서는 높은 발판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여기까지는 잘 왔군!”

그가 손잡이를 당기자 벽 양쪽에서 철판이 튀어나왔다.

세 사람은 가운데에 갇혔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괴물 둘이 떨어졌다. 카에루가 한 놈을 받아 내는 동안 크로노는 벽의 철판을 살폈다. 닫히는 속도는 느렸지만 힘으로 밀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마르가 위를 가리켰다.

“저 사슬.”

철판은 천장의 톱니와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크로노가 괴물의 공격을 피하며 사슬 아래로 들어갔다. 칼로 자르려 했지만 두께가 손목만 했다.

카에루가 물을 뿌렸다.

마르가 얼렸다.

사슬 연결부가 하얗게 굳었다.

크로노가 칼자루로 힘껏 쳤다.

얼어붙은 금속이 깨지며 한쪽 철판이 멈췄다.

반대편도 같은 방식으로 끊었다.

비네는 이미 다음 문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성을 부수면 수리비를 청구하겠다!”

마르가 화살을 쐈다.

화살이 문틀에 박혔다.

비네의 갑옷 끝이 간신히 사라졌다.

“다음에는 맞아!”

“그 말 세 번째다!”

카에루가 마르를 보았다.

“세고 있었나?”

“괴물은 안 세도 저건 세고 있어.”

크로노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마왕성 안에 들어온 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음 방에서 웃음은 사라졌다.

바닥이 없었다.

정확히는 바닥처럼 보이는 검은 판들이 여러 장 떠 있었다. 그 사이에는 아래가 보이지 않는 틈이 있었다. 방 반대편에서 비네가 손을 흔들었다.

“가장 안전한 길을 골라 보라고!”

그가 발끝으로 자기 앞의 판을 두드렸다.

“물론 내가 알려 줄 생각은 없지만.”

크로노가 첫 판에 발을 올렸다.

카에루가 팔을 잡았다.

“잠깐.”

그는 손끝에서 물방울 하나를 만들었다.

방 안쪽으로 던졌다.

물방울은 첫 번째 판에 떨어져 튀었다. 두 번째 판에서도 같은 소리가 났다. 세 번째 판에 닿는 순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판이 아래로 떨어졌다.

검은 구덩이가 입을 벌렸다.

마르가 여러 개의 얼음 조각을 만들어 바닥에 던졌다.

안전한 판에서는 조각이 남았고, 가짜 판은 무게를 받는 순간 떨어졌다.

“이래서 마법사를 둘이나 데려왔군.”

비네가 투덜거렸다.

“아니면 검사가 셋인가?”

카에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전한 판을 골라 움직였다.

중간쯤 갔을 때 비네가 손가락을 튕겼다.

남아 있던 판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크로노의 발밑 판이 기울었다.

옆구리에 통증이 올라오는 것보다 먼저 마르가 손을 뻗었다. 손끝의 냉기가 판 가장자리를 옆 판과 붙였다.

카에루가 물줄기로 크로노의 손목을 감았다.

크로노는 두 사람의 힘을 받아 다시 올라왔다.

비네가 혀를 찼다.

“서로 잡아당기느라 참 바쁘군.”

카에루가 처음으로 그를 향해 웃었다.

“혼자 떨어지는 것보다 낫지.”

비네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그는 문을 세게 닫고 사라졌다.

세 사람은 방을 건넜다.

그다음에는 계단이 이어졌다.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벽의 장식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마족의 문장과 가르디아에서 빼앗은 방패가 섞여 있었지만, 깊이 갈수록 사람의 흔적은 줄고 검은 원과 별 모양 문양이 많아졌다.

크로노는 한 문양 앞에서 멈췄다.

가운데에서 붉은 선이 바깥으로 뻗어 있었다.

서기 2300년 아리스 돔에서 본 기록 화면의 라보스 충돌 흔적과 닮아 있었다.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땅 아래에서 위로 퍼지는 모양은 기억하고 있었다.

마르도 알아본 듯 얼굴이 굳었다.

“저거…….”

카에루가 돌아보았다.

“무엇인가?”

“미래에서 봤어.”

마르는 손가락을 문양 가까이 가져갔다가 닿기 전에 멈췄다.

“라보스가 땅에서 올라온 뒤 남은 기록이랑 비슷해.”

카에루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비네가 말한 ‘중요한 일’이 처음으로 형태를 얻었다.

마왕은 정말 라보스를 부르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양 아래 문이 열렸다.

비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달아나지 않았다.

넓은 원형 방 한가운데, 투명한 얼음 같은 구체 안에 들어가 있었다. 구체 표면에는 푸른 빛이 여러 겹 돌고 있었다.

“여기가 끝이다.”

그가 말했다.

마르가 활을 겨눴다.

“네가?”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비네가 두 팔을 벌렸다.

얼음 장벽에 빛이 번졌다.

크로노가 먼저 달려들었다.

짧은 검이 장벽에 닿았다.

튕겨 나왔다.

팔 전체가 저렸다.

카에루의 그랜드리온도 같은 결과였다. 붉은 이음선이 빛났지만 얼음은 금조차 가지 않았다.

마르가 냉기를 쏘았다.

장벽이 오히려 두꺼워졌다.

“내가 이런 것도 준비 안 했을 것 같았나?”

비네가 웃었다.

“소이소와 마요네에게 시간을 벌게 한 이유가 있지!”

그의 손에서 검은 구슬이 만들어졌다.

장벽 바깥으로 그대로 튀어나왔다.

카에루가 물막이를 만들었다.

구슬이 물에 닿자 폭발했다.

세 사람이 뒤로 밀렸다.

마르가 이를 악물었다.

“안에서는 공격하고, 밖에서는 못 때려?”

“완벽한 방어지!”

크로노는 비네를 보지 않았다.

방을 봤다.

원형 방 가장자리에는 네 개의 쇠사슬이 바닥으로 내려가 있었다. 각각의 사슬은 얼음 장벽 아래의 원형 받침대와 이어져 있었다. 벽에는 커다란 손잡이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비네가 크로노의 시선을 따라갔다.

“어딜 보는 거냐!”

검은 구슬이 다시 날아왔다.

크로노는 옆으로 피했다.

첫 번째 손잡이 쪽으로 달렸다.

“거긴 건드리지 마!”

그 말이 답이었다.

크로노가 검을 손잡이에 걸고 힘껏 내렸다.

금속이 돌아갔다.

방 한쪽 바닥이 열렸다.

비네의 얼음 구체가 아주 조금 기울었다.

“멍청한 놈! 그 구멍에 떨어지는 건 너희다!”

카에루가 두 번째 손잡이로 달렸다.

비네가 검은 구슬을 쏘았다.

마르의 화살이 구슬을 정면에서 맞혔다. 냉기가 검은 빛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방향을 틀었다. 구슬은 벽에 부딪쳐 터졌다.

카에루가 손잡이를 내렸다.

두 번째 바닥이 열렸다.

원형 받침대의 한쪽이 허공에 걸렸다.

비네의 얼굴이 굳었다.

“잠깐.”

마르가 세 번째 손잡이를 겨눴다.

화살을 쏴 손잡이 위의 잠금핀을 부쉈다. 크로노가 달려가 아래로 당겼다.

세 번째 구멍이 열렸다.

비네의 구체가 더 크게 흔들렸다.

“그만!”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마지막 손잡이는 비네의 바로 뒤쪽에 있었다.

장벽과 구덩이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나야 했다.

카에루가 크로노를 보았다.

“내가 막겠네.”

비네가 연속으로 구슬을 만들었다.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바닥에 세우고 물을 넓게 펼쳤다. 검은 구슬들이 물막이에 닿을 때마다 폭발했다. 물이 증기로 변하고 카에루의 팔이 밀렸다.

“빨리!”

크로노가 달렸다.

옆구리가 당겼다.

세 번째 발에서 통증이 깊게 찔렀다.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마르가 뒤에서 얼음을 바닥에 얇게 깔았다. 크로노는 얼음 위로 몸을 낮춰 미끄러졌다. 큰 회전을 하지 않고도 마지막 손잡이까지 거리를 줄였다.

비네가 손을 뻗었다.

“하지 마!”

크로노가 손잡이를 내렸다.

마지막 바닥이 열렸다.

원형 받침대의 지지점이 전부 사라졌다.

잠깐의 정적 뒤에 얼음 구체가 아래로 떨어졌다.

비네의 얼굴이 위로 멀어졌다.

“마왕 니이이임—!”

목소리가 구덩이 안으로 길게 늘어졌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닥이 너무 깊었다.

마르는 구멍 가장자리로 다가갔다가 고개를 저었다.

“죽었을까?”

카에루가 아래를 보았다.

“저자는 그런 기대를 하면 돌아오는 종류로 보이네.”

마르가 입을 다물었다.

크로노는 손잡이에 기대 숨을 골랐다.

카에루가 다가오려 하자 손을 들어 막았다.

“조금.”

이번에는 먼저 말했다.

마르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좋아. 최소한 말은 하네.”

그들은 방 한쪽에서 잠시 쉬었다.

마르는 약초를 조금만 사용했다. 붕대는 피가 번진 부분만 덧댔다. 카에루는 물의 힘을 상처를 닫는 데 쓰지 않고 주변 근육을 천천히 풀었다.

치유가 끝났을 때 크로노의 얼굴빛은 조금 돌아왔지만, 누구도 다 나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비네가 떨어진 자리 맞은편에 푸른 원 두 개가 나타났다.

하나는 잔잔했다.

다른 하나는 안쪽으로 빛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르는 원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하나는 쉬는 곳 같고.”

카에루가 다른 원을 보았다.

“하나는 길이겠지.”

크로노는 잔잔한 원 옆에 앉아 한동안 숨을 골랐다. 성 안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적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정적 속에서 아주 먼 북소리가 들렸다.

둥.

한 번.

잠시 뒤 다시.

둥.

마르는 고개를 들었다.

“들었어?”

카에루는 이미 서 있었다.

그랜드리온의 붉은 이음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북소리가 아니었다.

너무 크고 느린 심장 소리였다.

크로노는 검을 집어 들었다.

세 사람은 안쪽으로 빛이 빨려 들어가는 원 앞에 섰다.

마르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이거 들어가면 바로 마왕일까?”

카에루가 말했다.

“아니길 바랄 이유는 없네.”

크로노가 먼저 발을 내디뎠다.

빛이 발목을 삼켰다.

마르와 카에루도 뒤따랐다.

세 사람의 몸이 사라지기 직전, 성 어디선가 마지막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더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소리가 한꺼번에 멎었다.

비네가 약속한 백 마리의 끝에서, 성은 처음으로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 아래에서 거대한 심장만 계속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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