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34화] 붉은 눈이 웃을 때
마르는 중앙 홀에 들어서자마자 동쪽 회랑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아이들이 웃고, 가짜 왕이 자신을 나디아라고 불렀던 길이었다. 이제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안쪽에서는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싫었다.
소이소와 싸운 뒤 크로노의 붕대를 다시 감는 동안에도 마르는 천장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붉은 눈 박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떠난 것과 같지는 않았다.
카에루가 먼저 회랑에 들어갔다.
크로노가 그 뒤를 따랐다. 걸음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몸을 크게 돌릴 때마다 오른손이 옆구리 가까이 갔다가 돌아왔다.
마르는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아프면 말해.”
크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
마르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적어도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동쪽 회랑의 벽에는 아이들이 남긴 손자국이 있었다.
작은 손바닥 모양의 검은 얼룩이 낮은 위치에서 시작해 점점 높아졌다. 마지막 자국은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은 천장까지 이어졌다. 손의 주인이 걸어간 것이 아니라 벽을 타고 기어간 듯했다.
첫 번째 방은 비어 있었다.
상자만 남아 있었다.
조금 전 아이들이 둘러앉아 손뼉을 치던 작은 상자였다. 뚜껑은 열려 있었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르가 가까이 다가가자 내부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손을 넣지 않았다.
화살 끝으로 상자를 뒤집었다.
검은 벌레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손가락만 한 몸에 사람의 이빨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역시.”
마르는 뒤로 물러나 냉기를 보냈다.
벌레들이 바닥에서 얼어붙었다.
크로노가 칼끝으로 하나를 건드렸다. 얼음 안에서 다리들이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으로 바닥을 가볍게 쳤다. 푸른 기운이 얼음을 통과하자 움직임이 멎었다.
“보물은 맞네.”
마르가 말했다.
“저쪽 기준으로는.”
다음 방에는 가짜 왕도, 크로노의 어머니도 없었다.
대신 벽 전체에 거울이 걸려 있었다.
크고 작은 거울 수십 개가 서로 다른 각도로 세 사람을 비췄다. 어떤 거울에서는 몸이 길게 늘어졌고, 어떤 곳에서는 얼굴이 납작해졌다. 오래된 은이 벗겨진 부분에는 검은 얼룩이 사람 눈처럼 남아 있었다.
마르는 자기 모습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거울은 시선을 피하기 어렵게 배치되어 있었다.
한 거울 속에서 가르디아 왕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왕좌에 앉아 문서를 읽고 있었다. 마르가 방 안에 들어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른 거울에는 크로노의 집이 보였다. 어머니가 식탁에 혼자 앉아 식은 수프를 치우고 있었다.
또 다른 거울에서는 사이러스가 검을 들고 등을 보이고 있었다.
카에루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마르는 활을 들어 가장 가까운 거울을 쐈다.
화살이 유리에 박혔다.
금이 번졌지만 깨지지 않았다.
거울 속 왕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화를 내면 진짜가 되나?”
낯선 목소리였다.
높고 낮은 음이 겹쳐 있었다.
마르가 두 번째 화살을 걸었다.
“아니.”
“그런데 왜 쏘지?”
“보기 싫어서.”
그녀는 같은 자리를 다시 맞혔다.
두 번째 충격에 거울이 깨졌다.
조각이 바닥에 쏟아지자 다른 거울들의 장면도 동시에 흔들렸다. 카에루가 그랜드리온 손잡이를 뒤집어 옆 거울을 깨뜨렸고, 크로노도 검자루로 유리를 부쉈다.
소리가 겹쳐졌다.
왕, 어머니, 사이러스의 모습이 조각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뒤에 진짜 벽이 드러났다.
검은 벽에는 붉은 선이 여러 갈래로 이어져 있었다. 모든 선은 방 가장 안쪽의 문으로 모였다.
마르가 낮게 말했다.
“우리가 뭘 보는지 확인하고 있었어.”
카에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엇을 깨뜨리는지도.”
문을 지나자 공기가 따뜻해졌다.
성 안에서 처음 느끼는 온기였다.
향 냄새가 났다. 꽃과 과일을 섞은 달콤한 냄새였지만 오래 맡으면 혀끝이 저렸다. 마르는 숨을 짧게 쉬었다.
방 가운데에는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팔과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고, 가슴도 오르내리지 않았다.
크로노가 멈췄다.
카에루가 검끝을 겨눴다.
“마요네인가.”
대답이 없었다.
마르는 활을 당긴 채 옆으로 움직였다. 바닥에는 싸운 흔적이 없었다. 피도, 긁힌 자국도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 저 자리에 조심스럽게 눕혀 놓은 것 같았다.
“죽은 척하는 건가?”
크로노가 물었다.
마르는 누워 있는 사람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끝이 검었다.
마법을 오래 쓴 사람의 화상인지, 시체가 썩은 흔적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카에루가 조금 더 다가갔다.
그 순간 사람이 일어났다.
몸을 굽히는 과정이 없었다.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상체가 곧게 세워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이 드러났다. 눈은 없었고, 검은 구멍 두 개만 있었다.
마르가 화살을 놓았다.
얼음 화살이 가슴에 박혔다.
사람의 몸이 뒤로 밀리지 않았다.
대신 입이 벌어졌다.
검은 연기가 쏟아졌다.
카에루가 물을 일으켜 연기를 옆으로 밀었다. 크로노는 낮게 들어가 무릎을 베었다. 칼날이 살을 가른 감촉이 아니라 마른 천을 찢는 느낌을 냈다.
몸이 무너졌다.
흰옷 안에서 사람 대신 짚과 가는 뼈가 쏟아졌다.
마르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가짜.”
천장에서 박수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날갯짓이었다.
붉은 눈 박쥐가 기둥 위에서 내려왔다.
마르가 즉시 활을 들었다.
이번에는 화살이 먼저였다.
박쥐는 날개를 접어 화살을 피했다. 그대로 바닥 가까이 내려오더니 검은 연기 속으로 몸을 던졌다.
형체가 길어졌다.
작은 날개가 망토가 되고, 발톱은 손가락으로 갈라졌다. 붉은 눈이 사람의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연기가 걷혔을 때 기둥 앞에는 마른 체격의 사람이 서 있었다.
긴 머리카락은 한쪽으로 흘러내렸고, 얼굴에는 짙은 화장이 번져 있었다. 옷은 전투복이라기보다 무대 의상에 가까웠다. 손끝마다 작은 금속 장식이 달려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울렸다.
“드디어 쏘네.”
그가 웃었다.
마르는 활을 내리지 않았다.
“네가 마요네구나.”
“이제야 인사를 하는군.”
마요네는 치맛자락처럼 넓은 옷자락을 한 번 돌렸다.
“성 입구부터 줄곧 같이 있었는데.”
카에루의 눈이 좁아졌다.
“환영도 네 짓인가.”
“전부라고 하면 비네가 섭섭해하겠지.”
마요네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나는 조금 도왔을 뿐이야. 사람이 무엇을 보고 멈추는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거든.”
그의 시선이 마르에게 닿았다.
“왕이 사과하면 화가 나는 공주.”
크로노에게 옮겨갔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못 하는 소년.”
마지막으로 카에루를 보았다.
“죽은 친구가 기다린다는 말에 칼을 놓을 뻔한 기사.”
마르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관찰은 잘했네.”
“칭찬 고마워.”
“근데 하나 틀렸어.”
“뭐가?”
“우리가 멈춘 곳만 봤지, 다시 움직인 건 못 봤잖아.”
마요네의 웃음이 잠깐 멎었다.
마르가 화살을 놓았다.
동시에 크로노와 카에루가 좌우로 갈라졌다.
마요네는 손뼉을 쳤다.
방 전체에 바람이 일었다.
화살이 방향을 잃었다. 크로노의 붉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고, 카에루의 망토가 뒤집혔다. 향 냄새가 한꺼번에 짙어졌다.
마르는 숨을 멈췄다.
바닥이 기울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기둥이 옆으로 누웠고 천장이 발밑으로 내려왔다. 크로노가 벽을 향해 달리는 것처럼 보였고, 카에루는 거꾸로 서 있었다.
“눈을 믿지 마!”
마르가 외쳤다.
자기 목소리조차 오른쪽과 왼쪽에서 동시에 들렸다.
마요네의 웃음이 방 전체를 돌았다.
“그럼 뭘 믿을 건데?”
마르는 눈을 감았다.
바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얼굴에 닿는 방향, 머리카락이 끌리는 방향, 장화 아래 돌바닥의 단단함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활을 낮추고 손바닥을 바닥에 댔다.
냉기를 퍼뜨렸다.
얇은 서리가 원을 그리며 바닥을 덮었다.
눈을 뜨자 세상이 여전히 기울어져 있었지만, 서리 위의 발자국은 똑바로 찍혀 있었다.
마요네의 발자국도 보였다.
“거기.”
마르가 화살을 쐈다.
겉으로 보이는 마요네는 반대편에 있었지만 화살은 빈 공간으로 날아갔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허공에서 피가 튀었다.
환영이 흔들렸다.
진짜 마요네가 기둥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팔에 화살이 스쳐 있었다.
“재미없게 구네.”
그가 손을 휘둘렀다.
붉은 빛이 마르의 얼굴을 덮쳤다.
순간 냄새가 바뀌었다.
천년제의 설탕 냄새였다.
눈앞에 크로노가 보였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검이 아니라 왕실 경비병의 창이 들려 있었다.
마르를 향하고 있었다.
“나디아.”
목소리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마르는 본능적으로 활을 들었다.
크로노의 가슴이 화살 끝에 들어왔다.
손가락이 시위를 놓으려는 순간, 그의 왼손이 보였다.
손등에 작은 상처가 있었다.
소이소의 칼을 막다 생긴 상처였다.
환영은 얼굴과 목소리를 바꿨지만, 방금 생긴 상처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마르는 활을 옆으로 틀었다.
화살이 크로노의 어깨를 지나 뒤쪽으로 날아갔다.
마요네가 피했다.
“왜 안 쐈지?”
“진짜 크로노는 그렇게 길게 말 안 해.”
크로노가 그녀를 보았다.
“맞아.”
그 한마디에 마르는 웃을 뻔했다.
마요네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카에루가 달려들었다.
그랜드리온이 가슴을 향했다.
마요네는 손끝으로 푸른 불을 만들었다. 검과 마법이 부딪치자 카에루의 몸이 뒤로 튕겼다.
“검은 내게 안 맞아.”
마요네가 말했다.
“마법도 마찬가지겠지.”
마르가 냉기를 쏘았다.
푸른 빛이 마요네의 몸에 닿자 그대로 흡수되었다. 오히려 그의 주위 바람이 더 세졌다.
카에루가 낮게 말했다.
“마법을 먹는군.”
“그렇다고 검이 안 닿는 건 아니야.”
크로노가 앞으로 나갔다.
그는 번개를 쓰지 않았다.
짧은 검으로만 공격했다.
마요네가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마르의 서리 때문에 발이 미끄러졌다. 카에루가 반대편에서 검등으로 길을 막았다.
마요네는 바람으로 두 사람을 밀어냈다.
마르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냉기를 적에게 보내지 않고 방의 네 기둥에 쏘았다.
기둥 표면에 얼음이 번졌다.
바람이 차가운 기둥 사이를 지나며 하얀 안개를 만들었다.
보이지 않던 흐름이 눈앞에 드러났다.
마요네가 바람으로 몸을 옮길 때마다 안개가 갈라졌다.
“왼쪽!”
크로노가 방향을 바꿨다.
마요네가 나타나기도 전에 검이 들어갔다.
그는 망토로 칼을 감아 막았지만 카에루가 뒤에서 손목을 쳤다. 금속 장식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요네가 비명을 질렀다.
바람이 폭발하듯 퍼졌다.
마르는 뒤로 넘어졌다. 활이 손에서 빠졌다.
눈을 뜨자 카에루가 자신을 향해 검을 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이러스의 얼굴이었다.
“네가 있어서 글렌이 약해졌다.”
환영이 말했다.
마르는 바닥의 활을 찾지 않았다.
대신 얼음이 낀 돌조각을 집어 던졌다.
사이러스의 얼굴이 깨졌다.
그 뒤의 마요네가 눈을 크게 떴다.
“남의 기억으로 말하는 것치고는 대사가 별로야.”
마요네가 손을 들었다.
크로노의 검이 먼저 닿았다.
손목 장식이 잘려 나갔다.
카에루의 그랜드리온이 반대편에서 망토를 벽에 박았다.
마르는 활을 주워 마지막 화살을 걸었다.
화살촉에 냉기를 모으지 않았다.
그냥 쐈다.
화살은 마요네의 어깨 옆 벽에 박혔다.
그가 피하려 몸을 틀었을 때 크로노의 칼자루가 복부를 쳤다.
숨이 끊겼다.
카에루가 검을 거두며 발을 걸었다.
마요네가 바닥에 쓰러졌다.
바람이 멎었다.
향 냄새도 빠르게 사라졌다.
마요네는 팔꿈치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가 포기했다.
“정말 재미없는 셋이군.”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보고 싶은 걸 보여 줬는데도.”
마르가 다가갔다.
“보고 싶은 것과 믿고 싶은 건 달라.”
“다르다고?”
“응.”
마르는 활을 내렸다.
“보고 싶어도 거짓이면 버려야 할 때가 있어.”
마요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웃었다.
이번 웃음에는 조금 전까지의 여유가 없었다.
“마왕 님 앞에서 그 말 기억해 둬.”
검은 연기가 몸을 감쌌다.
마르가 뒤로 물러났다.
연기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작아졌다. 손과 발이 사라지고, 망토가 날개가 되었다.
붉은 눈 박쥐가 바닥을 스치듯 날아올랐다.
크로노가 검을 들었지만 놈은 이미 천장 가까이 올라가 있었다.
박쥐는 문 앞에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검은 벽 속으로 사라졌다.
이번에도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방의 거울들이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동쪽 회랑 전체에서 유리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마르가 카에루를 보았다.
“저쪽도 끝난 거겠지?”
“적어도 이 길은.”
크로노가 문을 가리켰다.
중앙 홀 쪽에서 푸른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세 사람이 돌아가자 계단 앞의 원형 문양이 달라져 있었다.
서쪽에서 붉은 선 하나가, 동쪽에서 보랏빛 선 하나가 바닥을 따라 들어와 원 안에서 만났다.
마르는 그 모습을 보고 시간의 끝의 기둥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번 빛에는 길을 열어 주는 친절함이 없었다.
무언가가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원형 문양 한가운데에 검은 점이 생겼다.
점은 천천히 넓어졌다.
그 안에서 비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 다 지나왔나?”
웃음 뒤로 쇠사슬과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겹쳤다.
“그럼 이제 진짜 성을 보여 주지!”
푸른 원이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바람이 아래가 아니라 위에서 불었다.
크로노가 마르의 팔을 잡았다.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을 바닥에 세웠다.
세 사람 앞에서 중앙 홀의 계단과 벽이 빛 속으로 접히기 시작했다.
마왕성은 아직 절반도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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