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32화] 문이 열려 있던 성
마왕성의 문은 밀 필요조차 없었다.
사람 셋이 나란히 지나갈 만큼 열린 틈 사이로 검은 홀이 보였다. 경첩에는 녹이 없었고 문턱에도 먼지가 쌓이지 않았다. 누군가 조금 전까지 손질해 둔 문처럼 깨끗했다.
카에루는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장화가 대리석 바닥에 닿자 소리가 높은 천장까지 올라갔다. 한 번의 발소리가 여러 사람의 걸음처럼 겹쳐 돌아왔다.
불이 없는 성인데도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벽과 기둥 사이에서 보랏빛 기운이 새어 나왔다. 어디서 시작되는 빛인지 찾으려 하면 바로 옆의 그림자가 더 짙어졌다.
크로노와 마르가 뒤따라 들어왔다.
붉은 눈의 박쥐도 문 위를 스쳐 홀 안으로 날아갔다. 카에루가 검을 뽑으려 했을 때 놈은 천장 장식 뒤로 사라졌다.
“들어오자마자 공격하지 않는군.”
마르가 낮게 말했다.
“환영한다는 뜻은 아니겠지.”
크로노는 열려 있던 성문을 돌아보았다.
문은 그대로였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바깥의 죽은 나무 그림자가 문턱 위에서 흔들렸다.
중앙 홀 끝에는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꼭대기의 문은 검은 돌판으로 막혀 있었고, 그 앞 바닥에는 원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좌우로는 긴 회랑이 하나씩 뻗어 있었다.

카에루는 서쪽 회랑을 보았다.
열 해 전 비네가 웃으며 서 있던 방향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먼저 이쪽을 살피세.”
회랑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가르디아 농부 차림의 노인, 찢어진 갑옷을 입은 병사, 맨발의 젊은 여자가 벽을 보고 나란히 서 있었다. 피부는 밀랍처럼 희었고 누구도 일행의 발소리에 돌아보지 않았다.
마르가 여자에게 가까이 가려 하자 카에루가 팔을 막았다.
“숨을 쉬지 않네.”
그 말이 들렸는지 여자의 고개가 조금 기울었다.
“끝내 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벽 안에서 나온 것 같았다.
조금 앞의 병사도 중얼거렸다.
“집에…… 보내 줘.”
카에루는 그 갑옷의 문장을 알아보았다. 열 해 전에 사라진 가르디아 남부 수비대의 표식이었다. 병사의 얼굴은 젊었으나 뺨 한쪽이 말라붙어 뼈가 드러나 있었다.
“죽은 자들인가?” 마르가 물었다.
“그렇게 보이네.”
“그런데 왜 덤비지 않지?”
카에루는 답하지 못했다.
죽은 이들의 눈은 그들이 아니라 회랑 끝의 문을 향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자세였다.
세 사람은 누구에게도 손대지 않고 지나갔다.
첫 번째 방에는 긴 탁자와 빈 잔들이 놓여 있었다. 잔 안에는 검붉은 액체가 굳어 있었고, 의자마다 먼지 하나 없었다. 벽난로 위에는 가르디아 병사들의 휘장이 찢긴 채 걸려 있었다.
두 번째 방에는 높은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 앞에 흰옷을 입은 여자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카에루의 발이 멈췄다.
머리카락을 묶은 방식도, 어깨에 걸친 푸른 천도 익숙했다.
“리네 님.”
여자가 돌아보았다.
리네의 얼굴이었다.
열 해 전, 성문에서 사이러스와 글렌을 배웅하던 때의 얼굴. 지금의 왕비보다 젊고, 걱정이 적었다.
“글렌.”
그녀가 미소 지었다.
“무사했군요.”
카에루의 손이 칼자루에서 떨어졌다.
여자는 한 걸음 다가왔다.
“이제 돌아와요. 사이러스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 때문에 카에루는 정신을 차렸다.
리네라면 하지 않을 말이었다. 사이러스가 어디에서 기다리는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왕비께서는 나를 글렌이라 부른 적이 거의 없으시네.”
여자의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
크로노가 짧은 검을 들었다. 마르도 활을 겨눴다.
그러나 가짜 리네는 공격하지 않았다. 고개를 다시 돌려 높은 의자 앞에 섰을 뿐이었다.
“사이러스가 기다리고 있어요.”
같은 말이 등을 통해 흘러나왔다.
카에루는 검을 뽑지 않은 채 방을 나왔다.
중앙 홀로 돌아왔을 때도 위층 문은 닫혀 있었다. 바닥의 원형 문양은 빛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동쪽 회랑으로 향했다.
입구 가까운 방에는 아이 넷이 작은 상자 주위에 앉아 있었다. 모두 등을 돌리고 손뼉을 치고 있었다. 손바닥이 마주칠 때마다 소리는 나지 않았고, 상자 안에서만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같이 놀래?”
아이 하나가 목을 돌렸다. 몸은 그대로인데 얼굴만 등 뒤를 향했다.
마르가 화살을 들자 아이들이 동시에 웃었다.
“우리 보물 줄게.”
“필요 없어.”
마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옆으로 지나갔다.
다음 회랑에는 익숙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로노의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른 채 서 있었다. 축제 날 아침처럼 머리를 한쪽으로 묶고 있었다.

“크로노, 어디 갔었니?”
크로노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 옆에는 가르디아 왕이 있었다. 왕은 마르가 집을 나가기 전보다 피곤해 보였다. 굽힌 어깨와 굳은 입가까지 너무 정확했다.
“나디아.”
그 이름이 나오자 마르의 활끝이 흔들렸다.
“내가 틀렸다. 성으로 돌아오너라.”
그녀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왕이 잘못을 인정하고, 공주가 아니라 딸을 불러 주는 말.
그래서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마르는 활을 내리지 않았다. 흔들리던 화살 끝이 왕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카에루는 그녀가 이를 악무는 소리를 들었다.
“진짜 아버지는 그렇게 쉽게 사과 못 해.”
왕의 환영이 눈썹을 내렸다. 상처받은 아버지의 표정까지 흉내 냈다.
“그게 좋은 말 한마디로 없던 일이 될 관계였으면, 나는 애초에 성을 나오지도 않았어.”
마르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환영은 그녀가 물러서기를 기다렸던 듯 오히려 뒤로 밀렸다.
“내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곳을 네가 어떻게 알아?”
왕의 얼굴이 웃었다.
입꼬리가 사람의 얼굴에서 가능한 것보다 길게 벌어졌다.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크로노의 어머니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크로노가 마르 앞을 막았다. 짧은 검에는 번개가 모이지 않았다. 공격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상대에게 먼저 힘을 내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가자.”
그의 한마디에 마르는 뒤로 물러났다.
가짜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다만 세 사람이 회랑 끝을 돌아설 때까지 각자의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 방은 비어 있었다.
붉은 천이 드리운 의자와 상자 세 개만 놓여 있었다. 카에루는 상자에 손대지 않고 벽과 바닥을 살폈다. 문 뒤편에는 최근 긁힌 흔적이 있었고, 천장에는 작은 발톱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박쥐가 이곳을 드나든 흔적이었다.
마르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를 양쪽으로 걷게 한 거야.”
“무엇을 보려 한 걸까?”
“어디에서 멈추는지.”
카에루의 대답에 크로노가 문 쪽을 보았다.
회랑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세 사람은 서둘러 중앙 홀로 돌아왔다.
성문은 닫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열려 있던 거대한 문이 이음새 하나 없이 검은 벽이 되어 있었다. 중앙 계단 앞의 원형 문양에서는 푸른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간의 끝에서 본 기둥의 빛과 비슷했지만, 그 안에는 찬 기운 대신 썩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시간의 문은 아니야.”
마르가 말했다.
“가까이 가지 마.”
그때 천장에서 웃음이 떨어졌다.
“여전히 겁이 많군, 글렌!”
카에루는 그 목소리를 알아보았다.
비네가 계단 위 검은 돌판을 통과해 모습을 드러냈다. 넓은 갑옷과 둥근 몸, 상대가 아직 쓰러지지 않았는데도 승리를 확신하는 웃음까지 열 해 전 그대로였다.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을 뽑았다.
“비네.”
“그 이름을 그렇게 반갑게 부르다니. 개구리 경도 예의가 늘었군.”
비네의 시선이 검으로 내려갔다. 붉은 이음선을 본 순간 웃음이 아주 잠깐 끊겼다.
“부러진 장난감을 붙여 왔나? 게다가 사이러스 대신 새 친구들까지 데려왔군.”
카에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르가 그의 옆에 섰다.
“대신이 아니야.”
크로노도 반대편에 섰다.
비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다시 웃었다.
“상관없지. 마왕 님은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을 준비 중이시다. 너희를 상대할 시간 따위 없어.”
그가 양팔을 벌리자 좌우 회랑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나와 검의 달인 소이소, 마법의 달인 마요네를 지나야 그분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이 성을 채운 백 마리 괴물의 먹이가 되겠지만!”
푸른 원형 문양이 갑자기 밝아졌다.
카에루가 검으로 빛을 가르려 했으나 마르가 그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문양 한가운데에서 검은 손들이 솟아올랐다. 손에 이어 해골의 머리와 썩은 갑옷이 바닥을 뚫고 나왔다.
서쪽 회랑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벽 너머의 소리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수십 개의 발소리가 함께 다가왔다.
비네는 돌판 안으로 몸을 숨겼다.
“천천히 올라오라고, 글렌. 지난번처럼 도망치지 말고!”
카에루는 그를 쫓지 않았다.
해골 병사 셋이 먼저 중앙 홀로 뛰어들었다. 검과 창에는 검은 불이 붙어 있었다. 그 뒤로 조금 전까지 농부와 병사,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것들이 길쭉한 뼈와 발톱을 드러내며 몰려왔다.
“계단을 등져!”
카에루의 말에 세 사람은 원형 문양을 피해 반원으로 섰다.
크로노가 첫 창을 검등으로 흘렸다. 옆구리를 비틀지 않고 한 걸음 안으로 파고들어 해골의 손목을 잘랐다. 마르의 화살이 두 번째 놈의 무릎을 얼렸다.
세 번째 놈이 그녀에게 칼을 내리쳤다.
카에루의 검이 사이를 막았다.
그랜드리온과 검은 불이 부딪치자 붉은 선이 밝아졌다. 높은 음과 낮은 음이 홀 전체를 울렸다. 해골의 칼에 붙은 불이 갈라지고, 카에루가 밀어낸 물결이 뼈 사이로 파고들었다.
마르가 물결을 얼렸다.
크로노의 번개가 얼음 위로 떨어졌다.
세 해골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그러나 회랑 안쪽의 발소리는 줄지 않았다.
카에루는 서쪽과 동쪽을 번갈아 보았다. 서쪽 끝에는 검을 든 자의 기척이 있었다. 동쪽에서는 붉은 눈의 박쥐가 날아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이소와 마요네.
마왕에게 가려면 두 길을 모두 지나야 했다.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의 피를 털었다. 목에 건 영웅의 표식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열 해 전처럼 발이 굳지는 않았다.
“서쪽부터 간다.”
그는 사이러스가 없는 쪽으로 먼저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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