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31화] 마법만이 닿는 곳
동굴은 닫혀 있던 세월을 냄새로 간직하고 있었다.
마르는 코와 입을 소매로 가렸다. 차가운 먼지, 축축한 돌, 오래전에 썩은 가죽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등 뒤에서는 갈라진 암벽이 아직도 낮게 울리고 있었다.
크로노가 횃불에 불을 붙였다.
불빛이 앞쪽 벽을 핥으며 번졌다.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아니었다. 바닥은 사람이 걷기 좋게 평평했고, 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움푹 팬 자리가 있었다. 횃불이나 등잔을 놓던 곳 같았지만 모두 비어 있었다.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뽑은 채 앞장섰다.
영웅의 표식이 걸음마다 가슴에 부딪혔다. 그 소리는 작았으나 마르에게는 이상하게 또렷이 들렸다. 조금 전 절벽 앞에서 그가 밝힌 이름도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글렌.
마르는 그 이름을 바로 부르지 않았다.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오래 숨겨 온 시간을 한순간에 건너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장에서 날갯짓이 났다.
횃불을 들자 붉은 눈의 작은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입구에서 보았던 놈이었다. 빛이 닿자 날개를 펴고 더 안쪽으로 날아갔다.
“우리를 보고 있었어.”
마르가 활시위를 당겼다.
카에루가 고개를 저었다.
“사역마라면 쓰러뜨리는 순간 주인이 알아챌 수도 있네.”
“이미 산을 갈랐는데 아직 모를까?”
크로노가 물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화살을 아껴야지.”
마르는 시위를 놓았지만 박쥐가 사라진 방향을 기억해 두었다.
통로는 곧 세 갈래로 나뉘었다. 왼쪽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났고, 오른쪽에는 녹슨 철문이 반쯤 내려와 있었다. 정면 바닥에는 긁힌 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크로노가 무릎을 꿇고 자국을 살폈다.
“끌려간 흔적.”
자국 사이에는 가르디아 병사의 갑옷에서 떨어진 푸른 칠 조각이 박혀 있었다.
카에루가 정면을 택했다.
“성에 들어가려다 붙잡힌 병사일 수 있네.”
몇 걸음 가지 않아 통로 양쪽의 돌무더기가 움직였다.
처음에는 쥐인 줄 알았다. 길쭉한 귀와 마른 팔다리를 가진 회색 괴물들이 돌 틈에서 네 발로 기어 나왔다. 손에는 깨진 단검과 뼈 조각을 들고 있었다. 놈들은 횃불의 불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첫 번째 놈이 크로노에게 뛰어들었다.
크로노가 짧은 검을 비스듬히 올려 베었다. 칼날은 분명 어깨를 통과했으나 피가 나오지 않았다. 회색 피부가 연기처럼 벌어졌다가 곧 원래 모양으로 돌아왔다.
놈의 단검이 크로노의 옆구리를 향했다.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으로 쳐 냈다. 충격이 놈을 벽까지 밀었지만, 이번에도 몸은 찢어지지 않았다.
“쇠가 닿지 않아!”
마르가 화살을 놓았다.
화살촉에 모인 냉기가 놈의 가슴에서 터졌다. 회색 몸 전체에 흰 서리가 번졌다. 놈은 한 걸음 더 내딛다가 유리처럼 갈라져 바닥에 흩어졌다.
나머지 셋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크로노가 검을 바닥에 꽂고 손을 들었다. 푸른 번개가 좁은 통로를 가르며 앞선 두 마리를 꿰뚫었다. 타는 냄새와 함께 회색 형체가 무너졌다.

마지막 한 마리가 천장으로 뛰었다.
카에루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자 벽의 습기가 가는 물줄기로 모였다. 물은 놈의 발목을 감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마르가 얼음을 겹쳐 움직임을 멈췄다.
카에루의 그랜드리온이 얼음 한가운데를 찔렀다.
칼날을 따라 푸른 빛이 흘렀다. 이번에는 검이 회색 몸을 그대로 통과하지 않았다. 물이 길을 만들고, 검의 힘이 그 길을 따라 안쪽까지 닿았다. 괴물은 짧은 신음과 함께 잿가루가 되었다.
동굴이 다시 조용해졌다.
바닥에 남은 잿가루는 바람도 없는데 벽 쪽으로 흘렀다. 가루가 돌 틈에 스며들자 희미한 보랏빛이 잠깐 번지고 사라졌다. 마르는 화살촉으로 홈을 따라가 보았다. 같은 홈이 천장과 바닥을 그물처럼 이어 주고 있었다.
“여기서 태어난 것들이야.”
그녀가 말했다.
“아니면 쓰러질 때마다 동굴로 돌아가거나.”
크로노가 뒤쪽을 보았다. 갈라진 입구는 굽은 통로 너머로 이미 보이지 않았다.
카에루는 벽의 빛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다면 이곳 전체가 성문이자 경비병이군. 오래 머물수록 같은 놈을 다시 만날 수 있네.”
쉬어 갈 시간은 길지 않았다.
카에루는 손에 남은 물을 바라보았다.
“쇠가 아니라 그 안의 힘을 밀어 넣어야 하는군.”
“스페키오가 살아서 연습하랬지?”
마르가 숨을 고르며 웃었다.
“아주 친절한 연습 상대들이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크로노가 바닥에서 검을 뽑다가 옆구리를 감쌌다.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숨이 한 박자 늦어졌다. 니즈벨에게 부딪친 자리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탓이었다.
마르는 그의 손을 치웠다.
“아까 루카가 뭐라고 했더라?”
“안다고 했어.”
“그러니까 네가 안다는 말은 못 믿겠다는 거였어.”
옷 아래 멍은 누렇게 옅어졌지만 가장자리가 다시 붉어져 있었다. 마르는 약초 주머니를 꺼내려 했다.
카에루가 먼저 무릎을 꿇었다.
“내가 해 보겠네.”
그는 크로노의 옆구리에 손을 대지 않고 조금 띄웠다. 손바닥 아래에 얇은 물막이 생겼다. 동굴의 찬물이 아니라 체온과 비슷한 온도였다.
마르는 조금 전 스페키오 앞에서 보았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카에루는 상처를 억지로 닫으려 하지 않았다. 멍 주변에 고인 열과 굳은 근육을 물결처럼 천천히 풀었다.
크로노의 호흡이 고르게 돌아왔다.
“다 나은 건 아니네.” 카에루가 말했다. “통증을 덜었을 뿐이야.”
“그 정도가 좋아.”
마르가 붕대를 넓게 둘러 주었다.
“안 아프다고 또 무리하면 곤란하니까.”
세 사람은 정면 통로를 계속 갔다.
붉은 눈의 박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앞에서 날갯짓이 들렸다가, 돌아보면 어느새 뒤쪽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마르가 화살을 들 때마다 돌기둥 너머로 몸을 숨겼다.
두 번째 방은 아래로 깊게 파여 있었다. 건너편 출구까지 좁은 돌다리 하나만 이어졌다. 다리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물이 빠르게 흘렀다.
크로노가 먼저 발을 올렸다.
중간에 닿자 천장 구멍에서 회색 괴물들이 떨어졌다. 두 마리는 앞을 막고, 한 마리는 뒤쪽의 마르를 향했다.
마르는 몸을 돌려 화살을 쏘았다. 냉기가 놈의 팔 하나를 얼렸지만 좁은 다리 때문에 옆으로 피할 수 없었다. 깨진 단검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물줄기가 다리 아래에서 솟구쳤다.
카에루가 양손을 벌리자 물은 벽처럼 세 사람의 허리 높이까지 올라왔다. 괴물들은 발을 잃고 흔들렸지만, 크로노와 마르의 발목 아래에서는 물이 갈라져 돌바닥이 그대로 남았다.
“지금!”
크로노의 번개가 물벽 안으로 떨어졌다.
빛이 방 전체를 하얗게 채웠다. 물에 붙들린 괴물들이 안쪽부터 타들어 갔다. 카에루는 번개가 세 사람 쪽으로 번지기 전에 물줄기를 다리 아래로 흩어 버렸다.
마지막 놈이 도망치려 하자 마르의 화살이 등을 꿰뚫었다. 이번 화살에는 카에루가 보낸 물이 얇게 감겨 있었다. 회색 몸이 얼어붙으며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소리가 한참 뒤에야 사라졌다.
카에루가 돌난간을 붙잡고 숨을 골랐다.
“번개가 물을 타고 흐른다는 것은 미리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르가 크로노를 보았다.
“루카가 있었다면 열 번쯤 설명했을 거야.”
크로노는 짧게 말했다.
“잘했어.”
카에루는 잠시 그를 보다 웃었다.
“자네의 설명보다는 길군.”
돌다리 너머에서는 길이 아래로 꺾였다. 벽의 움푹 팬 자리마다 검은 초가 놓여 있었다. 최근에 탄 심지가 남아 있었다. 마왕성의 누군가가 이 길을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르는 횃불을 낮췄다.
바닥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가르디아 병사의 푸른 망토는 검게 굳어 있었고, 갑옷 앞부분은 발톱에 찢긴 듯 벌어져 있었다.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났으나 오른손은 벽을 향해 뻗어 있었다.
손가락 끝의 피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글씨는 절반쯤 번졌지만 뜻은 남아 있었다.
마왕성의 광대는 공격을 받을 때마다 방어를 바꾼다. 같은 방식으로 계속 덤비지 말라.
그 아래에는 이름도 부대도 없었다.
카에루가 눈을 감고 병사의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영웅의 표식이 시신의 갑옷에 닿아 작은 소리를 냈다.
“이 사람도 입구를 찾았던 거겠지.” 마르가 말했다.
“찾았고, 돌아가지 못했네.”
카에루는 병사의 짧은 검을 뽑아 벽에 기대 놓았다.
“우리가 경고를 가져가세.”
그 뒤의 길은 더 좁고 가팔랐다. 회색 괴물들은 두 번 더 나타났지만 세 사람은 처음처럼 검을 헛되이 휘두르지 않았다. 마르가 냉기로 움직임을 묶고, 카에루가 물로 마법의 길을 만들면, 크로노가 번개와 검을 번갈아 밀어 넣었다.
몸을 맞추는 데에는 말보다 몇 번의 실패가 필요했다.
카에루의 물이 너무 빨리 흩어져 마르의 화살이 빗나가기도 했고, 크로노가 앞서 나가 셋의 간격이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싸움에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마지막 계단 위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썩은 공기가 아닌 눈과 돌 냄새가 섞인 밤바람이었다.
세 사람은 동굴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달이 없었다. 남쪽을 돌아보면 숲과 들판 위로 저녁빛이 남아 있었는데, 이 산 북쪽만은 깊은 밤에 잠겨 있었다.
마왕성은 그 어둠의 중심에 서 있었다.

검은 탑들이 서로 등을 기대고 솟아 있었고, 가장 높은 지붕에는 날개 달린 석상이 북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창문에는 불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성벽 위로 지나가는 구름만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붉은 눈의 박쥐가 세 사람 머리 위를 한 바퀴 돌았다.
이번에는 성 쪽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가까운 죽은 나무에 매달린 채 그들을 기다렸다.
마르는 활에 화살을 걸었다.
“저건 동굴에 사는 박쥐가 아니야.”
“처음부터 아니었겠지.”
크로노가 성을 보며 대답했다.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칼집에 넣었다. 칼날 속 두 음은 잠잠했지만 영웅의 표식이 아주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성문까지 이어진 돌길에는 경비병도 횃불도 없었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마치 그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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