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30화] 검이 연 길
시간의 끝에는 아침이 없었다.
저주받은 숲을 떠날 때 분명 해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기둥의 빛을 지나오자 낡은 가로등 아래에는 언제나 같은 어둠이 놓여 있었다. 카에루는 돌바닥에 발을 디딘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발밑에는 아무 땅도 이어져 있지 않았다. 난간 너머의 검은 공간에 별 같은 빛이 흘렀고, 멀리 놓인 문들은 벽 없이 서 있었다. 그중 하나에서는 그가 방금 지나온 서기 육백 년의 숲 냄새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여기가…… 시간의 끝인가.”
가스파가 가로등 아래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부르고 있지. 이름을 붙인다고 이해하기 쉬워지는 곳은 아니지만.”
노인의 눈은 카에루보다 그의 허리에 찬 검을 먼저 보았다. 그랜드리온의 붉은 이음선이 어둠 속에서 가늘게 빛났다. 가스파는 가까이 와서 살피지 않았다.
“결국 들기로 했군.”
카에루가 물었다.
“이 검을 아나?”
“여기 앉아 있으면 여러 시대의 이야기가 들려오네.”
그 말은 답이었지만 설명은 아니었다.
루카가 끼어들었다.
“마왕성에 들어가기 전에 카에루가 확인할 게 있어요. 그 안에 마법을 쓰는 자들이 많다면, 검술만으로는 부족할 테니까.”
가스파는 난간 쪽의 문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저 친구에게 가 보게.”
문 안쪽에서 둥근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스페키오는 볼 때마다 모습이 달라졌다. 크로노에게는 작은 짐승처럼 보였다가, 마르에게는 뿔 달린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에루가 보는 지금은 몸집 작은 검투사였다. 팔과 다리는 짧았지만 어깨에는 물방울 같은 푸른 빛이 맺혀 있었다.

그가 카에루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별난 몸이군. 겉은 물가의 것이고, 속에는 칼이 들어 있어.”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시비를 거는 것인가.”
“보이는 걸 말했을 뿐이야. 눈을 감아 봐.”
“그대 앞에서?”
“마법을 배우려면 네 눈으로 보는 걸 잠깐 포기해야 해.”
카에루는 크로노를 보았다. 크로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가로등의 열기와 루카가 공구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만 느껴졌다. 곧 다른 감각이 열렸다. 마르의 숨에 섞인 습기, 돌 틈에 오래 고인 물 한 방울, 자신의 피부 아래를 흐르는 피. 멀리 시간의 문 저편에서 내리는 비까지 하나의 가는 선으로 이어졌다.
스페키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끌어오지 마. 물은 이미 네 곁에 있어.”
카에루가 손을 폈다.
돌 틈의 물방울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떨리는 구슬 하나였으나 손목을 돌리자 가는 띠가 되었다. 너무 세게 붙들려 하자 물이 흩어졌다.
“검처럼 다루지 말게.”
가스파가 멀리서 말했다.
스페키오가 콧방귀를 뀌었다.
“내 수업인데 왜 참견이야.”
카에루는 다시 손을 폈다. 이번에는 물이 가려는 방향을 막지 않았다. 푸른 띠가 팔을 한 번 감고 손바닥 위에서 둥글게 모였다.
눈을 뜨자 마르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 상태로 내 손을 잡아 봐.”
그녀의 손등에는 숲에서 장작을 쪼개다 생긴 가느다란 상처가 있었다. 카에루가 물을 얹자 상처 주위가 서늘해졌다. 피가 멎고 벌어진 피부가 천천히 붙었다.
카에루는 놀라 손을 거두었다.
“물을 다루는 힘이 상처에도 닿는군.”
손끝에는 아직 마르의 체온과 물의 떨림이 함께 남아 있었다. 사람의 몸이었을 때는 빗속에 서 있어도 옷이 젖는 감각밖에 몰랐다. 지금은 피부가 닿지 않은 물방울의 위치까지 알 수 있었다.
열 해 동안 혐오한 몸이 새 힘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사실이 카에루를 기쁘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저주가 빼앗은 것만 헤아리는 동안, 이 모습으로 살아남으며 얻은 감각도 분명 생겨 있었다.
“응. 나도 처음엔 얼리는 것만 생각했어.”
마르는 손등을 움직여 보았다.
“같은 힘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져.”
스페키오가 카에루의 등을 세게 쳤다.
“이제 시작은 했어. 나머지는 살아서 연습해.”
카에루는 비틀거리다 자세를 바로잡았다. 돌아보았을 때 작은 검투사는 이미 문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로보가 난간 쪽에서 다가왔다. 수리한 오른손을 움직일 때 아주 미세한 지연이 남아 있었지만, 걸음은 안정되어 있었다.
“마왕성 주변의 기록을 이 시대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서기 육백 년에서 유입되는 부상병의 증언을 종합하면, 성으로 이어지는 산에는 외부에서 확인 가능한 입구가 없습니다.”
카에루가 그랜드리온을 내려다보았다.
“입구를 만들 검은 있네.”
“그리고 통과할 사람은 셋이야.”
루카가 말했다.
카에루가 그녀를 보았다.
“그대는 가지 않는가?”
루카는 오른손목의 붕대를 풀어 보였다. 화상 자국은 옅어졌지만 손가락을 굽히자 손목 안쪽이 떨렸다.
“전기 맞은 손으로 불을 제대로 겨눌 자신은 없어. 좁은 동굴에서 빗나가면 적보다 아군이 먼저 타.”
말투는 담담했으나 공구 가방의 끈을 놓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르가 그녀 옆에 섰다.
“내가 갈게. 카에루와 물의 성질도 맞고, 상처를 돌볼 사람도 필요해.”
크로노는 말없이 보슈가 준 짧은 검의 매듭을 조였다.
루카가 그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크로노의 몸이 아주 조금 굳었다.
“아직 다 안 나았어. 크게 베는 동작을 반복하면 다시 아플 거야.”
“알아.”
“안다는 얼굴이 아닌데.”
루카는 작은 주머니를 마르에게 건넸다. 붕대와 약초, 얇은 금속선, 불씨를 막는 가루가 들어 있었다.
“이건 손목이 멀쩡해도 내가 직접 쓰는 게 좋지만, 이번에는 맡길게.”
마르가 주머니를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가스파는 세 사람을 기둥 앞까지 배웅했다.
“마왕을 쓰러뜨리면 라보스에 관한 답을 얻을 거라고 생각하나?”
카에루가 먼저 대답했다.
“그자가 라보스를 부르려 한다고 들었네.”
“들은 것과 아는 것은 다르지.”
“그래서 직접 확인하러 가는 거야.”
마르의 말에 가스파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대답이면 충분하군.”
빛이 세 사람을 감쌌다.
서기 육백 년의 바람은 시간의 끝보다 차가웠다.
그들은 트루스 협곡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데나도로 산 동쪽의 황무지로 향했다. 마왕성으로 이어진다고 전해지는 산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검은 벽 같았다. 나무도 풀도 자라지 않았고, 절벽 아래에는 무너진 투구와 창대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마르가 부러진 창을 들어 올렸다.
“가르디아 병사들이 여기까지 왔었나 봐.”
창날에는 싸운 흔적이 없었다. 절벽을 두드리다 끝이 뭉개졌을 뿐이었다.
카에루는 바위벽 앞에 섰다.
표면에는 문도 이음새도 없었다. 손을 대자 산 안쪽에서 낮은 진동이 전해졌다. 마법으로 굳힌 암벽이었다. 그랜드리온도 칼집 안에서 같은 진동으로 울렸다.
그는 칼을 뽑으려다 멈췄다.
주머니 속 영웅의 표식이 손등에 닿았다.
그 순간 황무지의 바람이 오래전 여름 바람으로 바뀌었다.
어린 글렌은 숲 가장자리의 흙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또래 아이 셋이 그의 나무 검을 빼앗아 서로 던지고 있었다.
“되찾아 가 봐.”
글렌이 일어서지 못하자 아이 하나가 신발 끝으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아픈 것보다 맞서면 더 크게 다칠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때 사이러스가 숲길에서 뛰어왔다.
아이들은 이름을 듣기도 전에 달아났다. 사이러스는 나무 검을 주워 흙을 털고 글렌에게 내밀었다.
“언제까지 맞고만 있을 거야?”
“맞으면 아프잖아.”
“누구나 아파.”
“너는 안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사이러스는 잠시 생각하다 자기 팔에 든 멍을 보여 주었다.
“나는 아픈데도 한 걸음 더 가는 연습을 하는 거야.”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제난 다리 난간에 나란히 앉았다. 아래 강물이 저녁 햇빛을 쪼개며 흘렀다.

“기사가 될 생각이야.”
사이러스가 말했다.
글렌은 놀라지 않았다.
“잘 어울려.”
“너도 같이 들어와.”
“나는 안 돼.”
“나보다 검을 잘 쓰면서?”
글렌은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해쳐야 할 때 멈출 것 같아. 그러다 누군가를 더 위험하게 만들겠지.”
사이러스는 억지로 설득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나무 검을 가리켰다.
“그럼 왜 아직 연습해?”
그날 글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황무지의 바람이 돌아왔다.
카에루는 손 안의 표식을 보았다. 이것은 사이러스가 영웅이었다는 증명이 아니었다. 겁을 모르는 사람에게 주는 물건도 아니었다.
아파도 한 걸음 더 간 사람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는 가죽끈을 목에 걸었다.
영웅의 표식이 가슴 한가운데에 놓였다. 사람의 몸이던 시절보다 넓어진 목과 짧아진 어깨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더는 사이러스의 자리를 흉내 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크로노가 그랜드리온의 칼집을 잡아 주었다.
카에루는 칼을 완전히 뽑았다.
높은 음과 낮은 음이 절벽 앞에서 겹쳤다. 붉은 선을 따라 빛이 달리고, 산 안쪽의 진동이 검으로 모였다. 바람이 한순간 멎었다.
“내 이름은 글렌.”

그는 처음으로 두 사람 앞에서 그 이름을 말했다.
“사이러스의 뜻과 이 검을 이어받은 자다.”
마르가 한 걸음 물러나 활을 들었다. 크로노도 몸을 낮췄다.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머리 위로 들었다.
칼날이 내려왔다.
바위를 베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산 전체가 숨을 내쉬었다. 절벽 한가운데에 붉은 선이 생기더니 위아래로 뻗었다. 선이 벌어지며 거대한 암벽 두 쪽이 천천히 갈라졌다. 안쪽에서 오래 갇혀 있던 찬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돌가루가 가라앉은 자리에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그 안은 빛이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
카에루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이제 길은 열렸네.”
세 사람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 천장 어딘가에서 붉은 눈 두 개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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