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29화] 비가 남긴 이름

비는 열 해 전에도 이렇게 내렸다.

카에루는 탁자 앞에 앉아 그랜드리온을 무릎 위에 놓았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질 때마다 칼날 속의 붉은 선이 등불을 받아 짧게 살아났다. 그 옆에는 영웅의 표식이 있었다. 오래 닳은 금속판 위로 사자 문양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손을 뻗으면 둘 다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먼저 집어 든 것은 검도 표식도 아니었다. 탁자 밑에 감춰 둔 낡은 가죽끈이었다. 사람의 허리에 맞게 길었던 끈은 여러 번 접혀 있었고, 한쪽 끝에는 빗물에 번진 검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사이러스가 그랜드리온의 칼집을 매던 끈이었다.

카에루는 눈을 감았다.

가르디아 성의 아침 종이 들렸다.

열 해 전, 서기 오백구십 년의 종은 전쟁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훈련을 마친 기사들이 안뜰에서 창을 세웠고, 열린 성문 너머로 여름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사이러스는 여행용 망토의 매듭을 조이고 있었다.

“정말 오늘 떠나려는가.”

가르디아 왕이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물었다. 왕관도 쓰지 않은 채였다.

사이러스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빼앗긴 영웅의 표식을 되찾겠습니다. 전설의 검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왕국에는 자네가 필요하네.”

왕의 말이 끝나기 전에 리네가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에게도 필요해요. 반드시 돌아와요, 사이러스.”

가르디아 왕과 리네 왕비 앞에서 출정을 고하는 사이러스 - ちょろ
가르디아 왕과 리네 왕비 앞에서 출정을 고하는 사이러스 - ちょろ

사이러스는 언제나처럼 웃었다. 위험을 몰라서가 아니라, 상대가 두려움을 오래 품지 않게 하려고 짓는 웃음이었다.

“이 몸에 숨이 붙어 있는 한 돌아오겠습니다.”

그가 일어서자 안뜰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세웠다. 갑옷과 칼날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글렌은 그 뒤에서 여행 짐을 등에 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이러스의 이름을 불렀고, 그의 곁에 선 젊은 종자의 이름은 거의 부르지 않았다.

리네만은 글렌을 보았다.

“글렌도 조심해요.”

그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두 분 모두 평안하시길 빕니다.”

성문을 나서자 사이러스가 걸음을 늦춰 그의 옆에 섰다.

“얼굴이 왜 그러냐. 장례식에 가는 것도 아닌데.”

“전하께 너무 큰 약속을 했잖아.”

“돌아오겠다는 약속?”

“숨이 붙어 있는 한이라는 부분.”

사이러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자네가 내가 숨을 쉬는지 잘 보고 있게.”

글렌은 따라 웃지 못했다. 대신 친구의 망토가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 출정이 될 수 있다는 생각보다, 사이러스가 또 말을 너무 크게 했다는 걱정이 앞섰다.

두 사람은 남쪽 숲에서 영웅의 표식을 되찾았다.

늪을 차지한 거대한 개구리 왕은 사자 문양의 금속판을 목에 걸고 있었다. 사이러스는 진창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지면서도 끝내 놈의 혀를 밟고 뛰어올라 칼자루로 정수리를 쳤다. 개구리 왕은 표식을 진흙에 내던지고 달아났다.

글렌과 함께 거대한 개구리 왕을 마주한 사이러스 - ちょろ
글렌과 함께 거대한 개구리 왕을 마주한 사이러스 - ちょろ

글렌이 진흙 묻은 금속판을 닦아 내밀자 사이러스는 받지 않았다.

“자네가 가지고 있게.”

“네가 되찾았잖아.”

“나는 자꾸 물건을 흘리니까.”

그 말은 절반만 농담이었다. 글렌은 표식을 자기 가슴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데나도로 산을 올랐다.

전설의 검은 산 깊은 곳에 있었다. 처음 그랜드리온을 뽑았을 때, 글렌은 칼날 안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숨을 들이쉬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사이러스도 들었는지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칼집에 넣었다.

“좋은 검이군.”

그것뿐이었다. 영웅의 검을 손에 넣은 사람치고는 소박한 감상이었다.

산을 내려오던 날 저녁, 구름이 봉우리를 삼켰다.

길 한가운데 비네가 서 있었다. 넓은 몸을 갑옷으로 감싸고, 웃음을 참지 않는 얼굴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편 높은 바위에는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가 있었다.

마왕.

그 이름을 그때의 글렌도 알고 있었다. 마족을 모으고 가르디아의 변방을 무너뜨린 자. 그러나 멀리서 듣던 이름과 눈앞의 사람은 달랐다. 마왕 주위에서는 비가 곧게 떨어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열에 밀린 것처럼 빗줄기가 비스듬히 휘었다.

사이러스가 그랜드리온을 뽑았다.

“내 뒤에 있어.”

“둘을 상대로 혼자 싸우겠다고?”

“혼자가 아니지.”

사이러스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글렌은 그 말이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에 답하려고 검을 뽑았다. 그러나 첫 번째 충돌에서 자신이 얼마나 잘못 생각했는지 알았다.

비네가 쏜 불덩이가 바위에 부딪혀 터졌다. 글렌은 몸을 숙였지만 폭발의 힘에 옆으로 날아갔다. 젖은 비탈을 구르며 검을 놓쳤다. 일어서려 했을 때 마왕의 손끝에서 검은 빛이 뻗었다.

사이러스가 그랜드리온으로 막았다.

쇳소리가 아니라 비명이 났다.

칼날 한가운데에 금이 번지고, 다음 순간 검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부러진 칼끝이 글렌의 발치에 박혔다.

마왕과 비네 앞에서 부러진 그랜드리온을 든 사이러스 - ちょろ
마왕과 비네 앞에서 부러진 그랜드리온을 든 사이러스 - ちょろ

비네가 크게 웃었다.

“검이 없으면 영웅도 별것 없군!”

사이러스는 부러진 칼자루를 버리지 않았다. 숨을 고르며 글렌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왼쪽 어깨에서는 피가 빗물보다 진하게 흘렀다.

“글렌, 내려가.”

“같이 가.”

“내가 막겠다.”

“그럴 수 없어.”

사이러스가 그제야 돌아보았다.

웃고 있지 않았다.

“여기 남으면 둘 다 죽는다.”

글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계산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 남으면 다른 한 사람은 살아서 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사라면 해야 하는 계산.

그래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왕의 손에 어둠이 다시 모였다.

“가!”

사이러스가 글렌을 밀어 냈다.

검은 빛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사이러스는 쓰러지면서도 마왕 쪽을 향했다. 한쪽 무릎이 먼저 바닥에 닿았고, 부러진 검으로 몸을 받쳤다. 글렌이 기어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사이러스.”

친구의 숨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아주 얕고 짧았다.

“리네 님을…….”

피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부탁한다.”

그 말 뒤에는 숨이 없었다.

글렌은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마왕이 바위에서 내려왔다. 그의 장화가 사이러스의 피와 빗물을 함께 밟았다.

“다음은 너인가.”

글렌은 검을 찾았다. 손에 잡힌 것은 진흙뿐이었다.

비네가 몸을 숙여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사이러스 뒤에 숨던 겁쟁이에게는 더 어울리는 모습이 있겠지.”

마왕은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차가운 빛이 글렌의 몸을 감쌌다.

뼈가 안쪽으로 접히고 피부가 찢어지는 듯했다. 목구멍이 먼저 닫혔다.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사람의 목소리 대신 젖은 공기가 터져 나왔다. 손가락은 짧아지고 발은 넓어졌다. 눈앞의 바위와 두 사내가 갑자기 너무 커졌다.

마왕의 저주에 쓰러진 글렌과 이를 지켜보는 비네 - ちょろ
마왕의 저주에 쓰러진 글렌과 이를 지켜보는 비네 - ちょろ

비네의 웃음이 산을 울렸다.

마왕은 작은 몸이 된 글렌을 발끝으로 비탈 아래 밀었다.

그는 빗물과 함께 굴러 떨어졌다.

나뭇가지가 등을 때리고 돌이 머리를 스쳤다. 마지막에는 차가운 계곡물이 몸을 삼켰다. 짧아진 팔로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물 위가 멀었다.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남았다.

눈을 뜬 곳은 산 아래 갈대밭이었다. 손을 땅에 짚었을 때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물에 비친 얼굴도 글렌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물 위의 얼굴을 몇 번이나 흐트러뜨렸다. 다시 잔잔해질 때마다 같은 둥근 눈과 젖은 피부가 돌아왔다. 사이러스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목에서 나온 소리는 갈대밭의 개구리 울음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이 산에서 떨어진 뒤에도 계속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저주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는 해가 질 때까지 갈대밭을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라도 자신을 발견하면 도움을 청해야 했지만, 사람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물속으로 숨었다. 겁이 나면 몸부터 감추던 어린 글렌의 버릇은 모습이 바뀐 뒤에도 남아 있었다.

가슴 안쪽에서 딱딱한 것이 눌렸다.

영웅의 표식이었다.

그것을 꺼내 든 순간, 그는 사이러스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더 견디기 어려워했다.

등불이 꺼질 듯 흔들렸다.

카에루는 눈을 떴다.

열 해가 지나 있었다.

그동안 그는 사이러스의 마지막 부탁을 지켰다. 리네를 구했고, 가르디아의 병사들과 제난 다리를 지켰다. 그러나 전투가 끝날 때마다 숲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영웅이라 부를까 두려워 이름도 얼굴도 숨겼다.

그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는 죽은 사람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신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다.

문밖에서 젖은 장작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크로노와 마르, 루카가 처마 아래에서 불을 지키고 있었다. 검을 고치는 길에서 돌아간 사람들을 보았다는 소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돌아간 사람들.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을 뽑았다.

하나가 된 칼날에는 오래된 흠집이 남아 있었다. 부러졌던 곳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도 지워지지 않았다. 고쳐졌다는 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칼집을 허리에 맸다.

영웅의 표식은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목에 걸지는 않았다.

새벽빛이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비가 멎자 숲의 작은 소리들이 하나씩 돌아왔다. 카에루는 문을 열었다.

처마 기둥에 기대 잠들어 있던 크로노가 먼저 눈을 떴다. 마르와 루카도 담요를 걷었다.

카에루는 세 사람 앞에 섰다.

“실패할 수도 있네.”

루카가 붕대 감은 손목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건 새 소식이 아니야.”

마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젖은 치맛자락을 털었다.

“그래도 갈 거지?”

카에루는 그랜드리온의 칼자루를 잡았다.

이번에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마왕성으로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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