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24화] 붉은 돌과 사라진 열쇠

처음 세 그릇까지는 크로노도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붉은 돌을 걸고 크로노와 에이라가 벌이는 먹기 대결 - Vorxu
붉은 돌을 걸고 크로노와 에이라가 벌이는 먹기 대결 - Vorxu

아이오카의 국물은 진하고 매웠지만 맛은 괜찮았다. 문제는 에이라였다. 그녀는 그릇 수가 늘어도 첫 그릇과 같은 속도로 먹었다. 네 번째부터 크로노의 씹는 횟수가 길어지자 마르가 뒤에서 외쳤다.

“멈추면 더 배불러져! 계속 먹어!”

“그게 무슨 근거야?” 루카가 물었다.

“응원에는 근거 필요 없어!”

루카는 결국 경기까지 분석했다. “에이라는 한입 크기가 일정해. 작게, 같은 속도로.”

그 조언이 통했다. 여섯 번째부터 크로노가 다시 따라붙자 아이오카 사람들의 응원도 둘로 갈렸다. 아홉 번째가 끝났을 때 두 사람 모두 처음으로 배를 두드렸다.

열 번째 그릇은 거의 동시에 비었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떨어진 뒤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무승부였다.

“그럼 한 그릇 더?” 루카가 물었다.

크로노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자 루카는 말을 고쳤다. “아니면 다른 방식도 있고.”

에이라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로노의 어깨를 잡았다. 크로노는 반사적으로 몸을 버텼지만, 배가 움직이자 얼굴이 굳었다.

에이라는 더 웃었다.

“크로노 안 진다. 에이라도 안 진다. 그러면 둘 다 강하다.”

마르가 물었다.

“그럼 돌은?”

에이라는 족장 움막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두 손으로 큰 붉은 돌을 들고 돌아왔다.

불빛이 표면을 훑자 안쪽의 붉은 결이 살아 움직였다. 낮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깊은 색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웃음도 조금 잦아들었다.

에이라는 돌을 바로 건네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이오카 돌, 손님에게 준다.”

몇몇 표정이 굳자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 부러진 검 고친다. 강한 적 확인한다. 지금 우리한테 돌아오는 건 없다.”

잠시 침묵한 뒤 에이라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도 준다. 아이오카 힘은 돌에만 있는 거 아니다. 친구 필요할 때 안 주면, 나중에 우리 필요할 때 누가 주나.”

돌칼을 만들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족장이 정하면 족장이 책임진다.”

“응. 에이라 책임.”

그제야 에이라는 붉은 돌을 크로노에게 내밀었다.

크로노는 두 손으로 받았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돌은 따뜻했다. 불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인지, 원래 그런 성질인지 알 수 없었다. 손바닥을 통해 미세한 울림이 전해졌다. 시간의 문이나 그랜드리온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땅속 깊은 곳에서 오래 눌린 열이 남은 감각이었다.

루카가 옆에서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마르가 에이라를 보았다.

“고마워.”

에이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검 고치면 보여 줘.”

“가능하면.”

“가능하게 해.”

그 말은 명령보다 부탁에 가까웠다.

잔치는 그 뒤로도 오래 계속되었다. 밤의 숲은 위험했고 크로노도 당장은 제대로 걷기 어려웠다.

마르는 그 사실을 놀리다가 에이라가 “마왕 나쁜 사람?”이라고 묻자 표정이 달라졌다. 루카는 가르디아와 전쟁 중인 적이라고 답했지만, 에이라는 다시 물었다.

“싸우기 전에 왜 싸우는지 안다?”

마르가 불을 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알려고 해.”

에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적은 이유도 강할 때 있다.”

밤이 깊어지자 사람들은 하나씩 불 주변에 누웠다. 움막으로 돌아가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죽을 깔고 그대로 잠들었다. 아이들은 낮에 처음 본 크로노의 검과 루카의 고글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었고,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낮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루카는 시간의 문 열쇠를 가방에서 꺼내 점검했다.

“이상 없음.”

그녀는 일부러 마르를 보며 말했다.

“가방 안쪽. 잠금끈 두 번. 내 머리 옆.”

마르가 웃었다.

“왜 나한테 보고해?”

“누가 문 안 잃어버린다고 장담했으니까.”

“좋아. 내가 증인.”

크로노는 드림스톤을 가죽에 싸서 자기 곁에 두었다. 에이라는 그것을 보고 족장 움막으로 가져가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받은 순간부터 돌은 그들의 책임이었다.

불은 점점 낮아졌다.

크로노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배가 불러서만은 아니었다.

하늘이 너무 낯설었다.

별의 위치가 자신이 알던 것과 달랐다. 익숙한 별자리는 찾을 수 없었고, 밤하늘 한쪽에는 유난히 밝은 붉은 별 하나가 낮게 걸려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가도 오래 보면 조금씩 위치가 바뀌는 듯했다.

그는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옆에서 누군가 발소리를 죽이고 지나갔다.

크로노는 눈을 돌렸다.

불빛 바깥에 사람 그림자가 있었다. 마을 사람 중 하나였다. 키가 크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다. 그림자는 에이라가 누운 쪽을 보다가, 크로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곧 뒤로 물러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크로노는 몸을 일으키려다 멈췄다.

마을 안이었다. 경계하는 사람 하나쯤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에이라가 족장의 돌을 낯선 이들에게 준 밤이라면 더 그랬다.

그는 다시 누웠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가죽에 싼 드림스톤이었다.

손끝에 닿았다.

그다음 기억은 아침 햇빛이었다.

아이오카의 아침은 조용하지 않았다.

새가 아니라 거대한 짐승의 울음이 평원에서 들려왔고, 움막 사이에서는 사람들이 벌써 불을 피우고 있었다. 마르는 머리카락에 붙은 풀잎을 떼며 일어났고, 에이라는 누운 자리에서 눈도 뜨지 않은 채 옆의 물그릇부터 찾았다.

루카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한 손이 빈 가방 위에 놓여 있었다.

크로노가 몸을 일으켰다.

루카가 가방을 뒤집었다.

공구가 쏟아졌다.

전선, 집게, 작은 망치, 부품 주머니, 발사기의 여분 축전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시간의 문 열쇠는 없었다.

잔치 다음 날 아침 족장의 움막에 모인 일행 - Vor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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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의 표정에서 잠이 사라졌다.

“어제 분명히—”

“안쪽에 넣었어.”

루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잠금끈도 닫았고.”

그녀는 가방의 끈을 살폈다. 잘린 흔적은 없었다. 매듭이 풀린 뒤 다시 대충 묶여 있었다.

누군가 손으로 열었다.

크로노는 드림스톤을 확인했다.

그것은 그대로였다.

마르가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굳었다.

“돌을 두고 열쇠만 가져갔어.”

“가치를 알고 훔친 게 아니야.” 루카가 말했다. “반짝이는 물건을 노렸다면 이쪽을 가져갔겠지. 열쇠를 골랐다는 건 어제 내가 쓰는 걸 본 사람이야.”

에이라가 몸을 일으켰다.

숙취가 있는지 한쪽 눈을 찌푸렸지만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가 가져갔어?”

“그걸 찾는 중이야.”

크로노는 밤에 본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는 사람의 키와 머리 길이를 손으로 표시했다.

에이라의 얼굴이 굳었다.

“키노.”

그녀는 바로 공터 반대편의 움막으로 달려갔다.

문을 걷어 올리자 안은 비어 있었다.

침상에는 누운 흔적이 있었고, 바닥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뒤쪽 출구의 가죽막이 열려 있었다.

에이라는 밖으로 나가 무릎을 굽혔다.

진흙 위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의 발자국이 남쪽으로 이어졌다.

그 위를 다른 자국들이 덮고 있었다.

세 갈래 발가락.

레프타이트였다.

루카가 발자국 옆에 앉았다.

“사람 발자국이 먼저야. 그다음 레프타이트가 따라왔어.”

에이라는 이미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르가 팔을 잡았다.

“잠깐. 키노가 누구야?”

“아이오카 사람.”

“그건 알아. 너랑 어떤 사이인데?”

에이라는 잠시 멈췄다.

“에이라 다음 족장 될 사람.”

“가족?”

“가족 아니다. 같이 컸다. 키노, 에이라 좋아한다.”

마르는 상황을 이해했다.

“어젯밤에 크로노 때문에 질투한 거야?”

에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질투가 뭐야?”

루카가 짧게 설명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더 마음을 주는 것 같아서 화나는 거.”

에이라는 생각하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면 멍청한 거다.”

“대체로 그래.” 루카가 말했다.

에이라는 발자국을 따라가려 했다.

크로노가 그녀 앞을 막고 드림스톤을 가리켰다.

“이건?”

레프타이트를 쫓으면서 들고 가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무엇보다 잃어버리면 그랜드리온을 고칠 방법도 사라진다.

마르가 돌을 받아 들었다.

“내가 남을게.”

루카가 그녀를 보았다.

“괜찮겠어?”

“에이라가 길을 알아. 너는 열쇠를 알아. 크로노는 둘 다 앞에서 싸울 수 있고.”

마르는 드림스톤을 품에 안았다.

“나는 여기서 이걸 지키고, 혹시 레프타이트가 마을 쪽으로 돌아오면 사람들을 도울게.”

에이라가 말했다.

“마르 물 잘 쓴다. 상처도 씻는다. 여기 있어도 강하다.”

마르는 웃었다.

“이번엔 손힘 약하다는 말 안 하네.”

“그건 그대로.”

“취소.”

짧은 웃음 뒤에 세 사람은 남쪽으로 달렸다.

키노의 발자국 위로 레프타이트의 자국이 겹쳐 있었다. 숲 입구에서 피가 보이자 에이라가 먼저 달려가려 했지만 크로노가 막았다. 피는 많지 않았고, 사람 손자국 뒤로 다시 달린 흔적이 이어졌다.

“살아 있어.”

에이라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숲 안에서는 발자국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루카가 열쇠 장치의 수정 반응을 잡는 작은 금속 막대를 꺼냈고, 끝이 왼쪽 길에서 약하게 떨렸다.

세 사람은 쓰러진 나무와 가시덤불을 넘으며 그 방향을 따라갔다. 루카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 시대는 길이라는 개념이 없어?”

“있다.”

“어디?”

“우리가 만드는 중.”

한참 뒤 앞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라!”

에이라는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달렸다.

나무뿌리 사이의 작은 공터에 키노가 앉아 있었다.

숲의 작은 공터에서 키노를 꾸짖는 에이라 - RPGClassics
숲의 작은 공터에서 키노를 꾸짖는 에이라 - RPGClassics

그는 팔에 긁힌 상처가 있었고, 한쪽 발목을 잡고 있었다. 에이라가 다가오자 안도와 두려움이 동시에 얼굴에 나타났다.

“에이라, 나—”

손바닥이 먼저 날아갔다.

에이라는 키노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아!”

“멍청이!”

두 번째는 때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와 팔, 다리를 빠르게 확인했다. 큰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화를 냈다.

“왜 훔쳐!”

키노는 크로노를 보았다가 눈을 피했다.

“에이라, 저 사람 좋아한다.”

“좋아한다. 강하다. 친구다.”

“키노보다?”

에이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왜 줄 세워?”

키노는 입을 다물었다.

루카가 끼어들었다.

“열쇠는?”

그제야 키노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키노 가져왔다. 반짝이는 거, 크로노 것인 줄 알았다.”

“내 거야.”

루카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키노는 움츠러들었다.

“미안. 버리려고 안 했다. 숨기려 했다. 그런데 레프타이트 왔다.”

“빼앗겼어?”

키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노 싸웠다. 많이 왔다. 열쇠 가져가고 남쪽 갔다.”

루카는 눈을 감았다.

화를 낼 상대가 눈앞에 있었지만, 열쇠는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에이라가 키노 앞에 쭈그려 앉았다.

“크로노 강하다고 키노 약한 거 아니다.”

키노가 고개를 숙였다.

“에이라가 다른 사람 보고 웃는다고 키노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그의 발목을 한 번 눌러 보았다. 키노가 얼굴을 찌푸렸다.

“걸을 수 있어?”

“할 수 있다.”

“마을 돌아가.”

“나도 간다.”

“안 돼.”

“내가 잃어버렸다.”

에이라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그래서 살아 돌아가서 잘못 말했다. 도망가서 또 다치면 잘못 두 개 된다.”

키노는 반박하지 못했다.

크로노는 그 말을 들으며 카에루를 떠올렸다.

실패한 뒤 스스로를 전장에서 지운 사람. 잘못을 갚는 방식이 반드시 같은 위험 속으로 다시 뛰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에이라는 아주 단순하게 하고 있었다.

루카가 바닥의 흔적을 가리켰다.

레프타이트 발자국이 숲 더 깊은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금속 막대 끝도 같은 방향으로 약하게 떨렸다.

“열쇠가 저쪽에 있어.”

에이라가 일어섰다.

“레프타이트 둥지.”

“아자라가 있는 곳?”

“아자라 가끔 온다. 큰 짐승도 있다.”

루카가 발사기를 확인했다.

“좋아. 열쇠만 찾고 나오자.”

에이라가 그녀를 보았다.

“레프타이트 만나면?”

“가능하면 안 싸우고.”

“만나면?”

크로노가 검을 뽑아 날을 확인했다.

루카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 생각해.”

키노가 뒤에서 불렀다.

“에이라.”

에이라가 돌아보았다.

“미안.”

이번에는 변명도 비교도 붙지 않았다.

에이라는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서 마르한테도 말해.”

키노는 절뚝이며 왔던 길로 돌아갔다.

세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숲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키노가 기다리는 입구에서 레프타이트 둥지까지 이어지는 숲 미로 지도 - ArrPeeGeeZ
키노가 기다리는 입구에서 레프타이트 둥지까지 이어지는 숲 미로 지도 - ArrPeeGeeZ

나무줄기에는 날카로운 발톱 자국이 늘었고, 진흙 위의 발자국은 더 이상 작은 정찰대의 것이 아니었다. 수십 마리가 같은 길을 오간 흔적이 겹쳐 있었다.

멀리서 돌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잠시 멈춘 뒤 세 번.

동물의 울음이 아니었다.

신호였다.

에이라가 몸을 낮췄다.

“여기부터 레프타이트 땅.”

루카가 열쇠 반응을 확인했다.

금속 막대가 이전보다 분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크로노는 숲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드림스톤은 얻었다.

돌아갈 문을 여는 열쇠는 잃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으려면, 이 시대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과 땅을 두고 싸우고 있는 또 하나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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