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22화] 가장 오래된 바람
시간의 끝에서는 오래전과 아주 오래전의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빛나는 기둥들은 같은 간격으로 서 있었고, 안쪽에서 흔들리는 풍경도 손바닥만 한 창처럼 작았다. 서기 600년의 젖은 숲과 서기 2300년의 회색 폐허가 나란히 떠 있는 곳에서 몇천 년은 거리라기보다 기둥 하나의 차이처럼 보였다.
루카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기둥 사이를 두 번이나 걸었다.
“보슈가 말한 조건만으로는 범위가 너무 넓어. 인간이 쇠를 쓰기 전이라고 해도 지역마다 다르고, 드림스톤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잖아.”
가스파는 화로 앞에서 작은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러니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시대를 찾는 수밖에.”
“그게 몇 년인데요?”
“숫자를 좋아하는구먼.”
“시간여행하는 사람한테는 꽤 중요한 취향이에요.”
가스파가 웃었다.
그는 광장 가장자리의 기둥 하나를 지팡이 끝으로 가리켰다. 다른 기둥보다 빛이 거칠었다. 안에서는 짙은 녹색과 붉은색이 번갈아 번쩍였고, 가까이 다가가면 바람이 아니라 수많은 벌레 날갯짓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내가 본 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은 저기일세.”
루카가 수정판을 갖다 댔다.
바늘이 한 바퀴를 돌고 멎었다. 숫자로 시간을 표시하는 기능은 없었지만 파동의 폭은 지금까지 본 어떤 문보다 컸다.
“대략이라도.”
가스파가 한쪽 눈을 감았다.
“육천오백만 년쯤 전.”
마르는 처음에 잘못 들은 듯했다.
“육천…… 오백만?”
“년.”
루카의 얼굴에서 질문이 사라졌다.
대신 계산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사백 년을 두고 보슈의 나이를 의심하던 사람이 갑자기 육천오백만 년 앞에 서자, 그 차이는 너무 커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어졌다.
크로노는 기둥 안의 풍경을 보았다.
나무로 보이는 것들이 있었지만 자신이 아는 숲과 달랐다. 잎은 사람의 몸보다 넓었고 줄기는 비틀린 기둥처럼 굵었다. 하늘은 짙은 푸른색인데 지평선 가까이는 붉게 빛났다.
로보가 세 사람 뒤로 다가왔지만 루카는 수리한 지 얼마 안 된 그의 가슴 덮개를 가리켰다.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다녀올게.”
마르는 금속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드림스톤만 찾고 올게.”
크로노가 기둥 앞으로 걸어가자 둘의 말이 멈췄다.
가스파가 뒤에서 말했다.
“한 가지는 기억하게. 아주 오래된 시대라고 해서 단순한 시대는 아니야.”
크로노가 돌아보았다.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만나면 오래된 것일수록 덜 복잡할 거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지.”
가스파는 화로의 불을 바라보았다.
“그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무지일 뿐이네.”
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빛 속으로 들어갔다.
시간의 문 안에서는 바다와 숲, 얼음과 붉은 하늘이 순서 없이 스쳤다. 크로노가 마르의 손목과 루카의 가방끈을 붙잡고 거리를 지키는 동안 빛이 갑자기 끊겼다.
발밑에 땅이 없었다.
“또야?”
세 사람은 검은 바위와 거대한 잎 사이로 떨어졌다. 나뭇가지를 연달아 부러뜨린 뒤 비탈진 흙바닥을 굴렀고, 크로노의 등이 나무뿌리에 부딪쳤다.
“살아 있어?”
그가 손을 들자 위쪽에서 마르가 모습을 보였다. 루카는 가방끈이 덩굴에 걸린 덕분에 한 사람 키쯤 위에 매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안경 안 깨졌어.”
“그게 첫 확인이야?”
“안 보여야 다른 걸 확인하지.”
크로노가 그녀를 내려 주었다.
땅에 발을 디딘 순간, 세 사람 모두 말이 없어졌다.
공기가 달랐다.
덥고 무거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젖은 흙과 짓이긴 잎, 짐승의 체취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어딘가에서는 꽃 냄새가 났지만 너무 진해 썩은 과일처럼 느껴졌다. 머리 위의 나무들은 높이가 아니라 부피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잎 하나가 지붕만 했고, 나무껍질의 홈에는 작은 개울처럼 물이 고였다.
멀리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새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낮고,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길었다. 이어서 다른 방향에서 둔한 포효가 답했다.
마르는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 인간이 있긴 한 거야?”
루카가 열쇠 장치를 펼쳤다.
수정판은 살아 있었지만 바늘이 계속 흔들렸다.
“시간의 문은 위쪽이야. 우리가 떨어진 절벽 어딘가.”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들이 나온 푸른 소용돌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바위 사이에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돌아갈 수는 있어?”
“좌표는 잡혀. 여기서 잃지만 않으면.”
마르가 열쇠 장치를 가리켰다.
“그럼 그건 가방 안쪽에 넣어.”
루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그래서 하는 말이야.”
크로노는 주변을 살폈다.
흙바닥에는 사람 발자국이 없었다. 대신 세 갈래로 벌어진 큰 발자국이 군데군데 찍혀 있었다. 한 자국마다 그의 장화 두 개가 들어갈 만큼 컸다.
그는 발자국과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루카가 허리춤의 발사기를 꺼냈다.
“인간을 먼저 찾자.”
“드림스톤보다?” 마르가 물었다.
“돌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을 찾는 게 돌을 뒤지는 것보다 빠르니까.”
세 사람은 비탈 아래로 내려갔다.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풀은 허리까지 올라왔고, 덩굴은 움직이지 않는 뱀처럼 발목에 감겼다. 크로노가 앞에서 검으로 덩굴을 잘랐지만 몇 걸음 지나면 다시 같은 벽이 나타났다.
보슈에게 받은 검은 데나도로 산에서 여러 번 부딪쳤는데도 날이 크게 상하지 않았다. 크로노는 장인이 남긴 표식을 떠올렸다. 사백 년을 건너온 그랜드리온과 지금 손에 든 칼이 같은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르가 갑자기 그의 등을 잡았다.
“잠깐.”
앞쪽 풀 사이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작은 머리가 하나 올라왔다.
초록빛 비늘과 길쭉한 주둥이, 노란 눈을 가진 생물이었다. 크기는 아이 정도였지만 서기 600년의 임프와는 전혀 달랐다. 놈은 두 발로 서 있었고 손에는 날을 갈아 만든 검은 돌조각을 들고 있었다.
한 마리만이 아니었다.
왼쪽에서 둘, 오른쪽에서 셋이 더 일어났다. 그 뒤로 더 큰 형체들이 움직였다.
루카가 속삭였다.
“저건…….”
“공룡?” 마르가 물었다.
“공룡이 돌칼을 들고 다니지는 않아.”
가장 앞의 생물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무리 전체가 대답했다.
크로노는 검을 뽑았다.
돌창 두 개가 동시에 날아왔다. 크로노가 하나를 쳐냈고, 마르는 공기 중의 물기를 모아 다른 하나의 속도를 꺾었다. 루카는 숲에 불이 번질까 큰 화염을 쓰지 않고 돌칼 끝에만 불씨를 붙였다.
크로노가 그 틈으로 파고들어 손목과 무릎을 쳤지만, 물러난 생물들의 울음에 숲이 답했다. 더 큰 개체들이 몰려오며 세 사람의 퇴로까지 막았다.

“너무 많아.”
마르가 발밑의 물을 일으켜 앞줄을 밀어냈지만 큰 개체는 버텼다. 루카가 주변의 마른 잎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숲 안 태우고 저 숫자를 막을 방법은—”
그때 오른쪽의 큰 개체가 갑자기 옆으로 날아갔다.
무언가가 몸통을 들이받은 것이다.
초록빛 몸이 나무줄기에 부딪쳐 미끄러졌다.
붉은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로질렀다.
한 여자가 맨손으로 두 번째 생물의 팔을 잡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상대가 돌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허리를 돌려 다른 한 마리 쪽으로 던졌다. 둘이 부딪쳐 풀밭을 굴렀다.
그녀는 갑옷을 입지 않았다. 짐승 가죽을 어깨와 허리에 두르고, 팔과 다리에는 뼈와 이빨로 만든 장식이 묶여 있었다. 맨발은 진흙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가장 큰 생물이 창을 찔렀다.
여자는 옆으로 피하지 않았다.
창대를 한 손으로 잡았다.
상대가 밀어붙였지만 그녀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창을 당겨 생물을 앞으로 끌어낸 뒤, 이마로 주둥이를 들이받았다.
둔한 소리가 났다.
루카가 입을 벌렸다.
“저건…… 마법 아니지?”
마르가 대답했다.
“아닌 것 같은데.”
여자는 웃었다.
“약해!”
그녀는 창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지고,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한 번 두드렸다.
남은 생물들이 서로를 보았다.
몇 마리가 더 달려들었지만 여자는 발목을 걸고 어깨를 밀어 차례로 쓰러뜨렸다. 가장 큰 개체가 후퇴 신호를 내자 무리 전체가 숲 너머로 사라졌다.

정적이 돌아왔다.
여자는 숨도 고르지 않고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나이는 크로노 일행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보였다. 눈빛은 짐승처럼 사납다기보다, 처음 보는 것을 숨기지 않고 보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크로노에게 다가갔다.
검을 보더니 손을 뻗어 칼날을 만지려 했다.
크로노가 반사적으로 검을 뒤로 빼자 여자는 웃었다.
“좋아. 자기 이빨 지켜.”
그다음에는 루카에게 갔다.
고글과 발사기, 가방에 매달린 금속 공구를 하나씩 살폈다. 루카가 몸을 조금 뒤로 빼도 거리 감각을 조정하지 않았다.
“너, 불 냄새.”
“나는 루카야.”
“루카.”
이름을 한 번 따라 한 여자가 마르를 보았다.
마르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마르.”
여자는 손을 보다가 마르의 손바닥을 잡았다. 악수라기보다 힘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마르의 팔이 아래로 내려갔다.
“세다.”
“그 말 내가 하려던 건데.”
여자는 다시 웃었다.
마지막으로 크로노 앞에 섰다.
“너 이름?”
“크로노.”
“크로노.”
그녀는 발음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라.”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에이라, 아이오카 족장.”
루카가 잠시 멈췄다.
“족장?”
에이라는 그 질문이 왜 이상한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에이라 제일 세다. 그래서 족장.”
마르가 웃었다.
“설명은 확실하네.”
에이라는 세 사람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옷, 장화, 칼집, 마르의 펜던트를 차례로 보았다.
“너희 어디서 왔어?”
세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루카가 가장 안전한 답을 찾았다.
“아주 먼 곳.”
에이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방금 세 사람이 떨어진 방향이었다.
마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 정도는.”
에이라는 더 캐묻지 않았다.
“멀리서 왔으면 배고프다.”
그녀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몸을 돌렸다.
“아이오카 가자. 먹고, 마시고, 이야기.”
루카가 크로노에게 속삭였다.
“이 시대 사람을 찾는 데는 성공했네.”
마르가 에이라의 목에 걸린 붉은 돌조각을 보았다.
햇빛이 잎 사이로 떨어질 때마다 돌 안쪽에서 진한 붉은빛이 살아났다. 보슈가 보여 준 가짜 조각과 색은 닮았지만 깊이가 달랐다. 불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돌 자체가 오래된 불씨를 품은 것 같았다.
마르의 시선이 멎는 것을 에이라가 알아차렸다.
그녀는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이거 예뻐?”
루카가 가까이 다가갔다.
“잠깐만 보여 줄 수 있어?”
에이라는 돌을 손에 올려놓았다.
루카는 만지지 않고 얼굴만 가까이했다. 빛의 결, 표면의 미세한 층, 안쪽에서 번지는 색을 확인하는 동안 숨이 느려졌다.
“보슈가 말한 것과 비슷해.”
마르가 물었다.
“드림스톤?”
그 이름을 들은 에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드림?”
“붉은 돌. 아주 오래된 돌.”
에이라는 크게 웃었다.
“오래된 거 아니야. 여기 많아.”
이번에는 루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이라는 목걸이를 다시 걸고 숲길을 걸어갔다.
“원하면 아이오카 와. 붉은 돌도 보고, 고기도 먹어.”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강한 사람은 손님. 약한 사람도 손님. 하지만 많이 먹으면 더 좋은 손님.”
마르가 크로노의 팔을 쳤다.
“들었지?”
크로노는 에이라와 자신의 배를 번갈아 보았다.
루카가 한숨을 쉬었다.
“드림스톤을 얻는 조건이 식사량은 아니겠지.”
세 사람은 에이라를 따라갔다.

숲을 벗어나자 세계가 갑자기 넓어졌다.

끝없이 이어진 평원 위로 거대한 초식동물들이 느리게 움직였고, 멀리 화산에서는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강은 지금 시대의 어느 강보다 넓었으며, 물가에는 날개를 펼친 파충류들이 떼 지어 앉아 있었다.
하늘은 낮고 뜨거웠다.
그 아래를 걷는 에이라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크게 흔들렸다.
크로노는 문득 가스파의 말을 떠올렸다.
오래되었다고 단순한 것은 아니다.
조금 전 돌칼을 든 파충류들은 무리를 이루고 신호를 주고받았다. 에이라는 그들을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적의 이름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보슈가 전설처럼 말한 드림스톤은 이곳에서 한 사람의 목에 아무렇지 않게 걸려 있었다.
그들이 찾던 역사의 가장 먼 과거는 텅 빈 시작점이 아니었다.
이미 누군가가 살고, 싸우고, 이름 붙이며 자기들의 현재를 만들고 있는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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