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18화] 다리 위의 식량
루카의 집 창문에는 왕실의 수배문이 붙어 있었다.
종이는 밤이슬에 젖어 가장자리가 말려 있었지만, 가운데 그려진 붉은 머리 소년의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림 아래에는 공주 납치와 탈옥, 왕실 병사 공격이라는 죄목이 줄지어 적혀 있었다.
마르가 종이를 떼려 하자 루카가 손을 막았다.
“지금 없애면 우리가 왔다는 걸 알려 주는 셈이야.”
“저 내용은 전부 거꾸로잖아.”
“그래서 종이가 더 위험해. 거짓말이어도 제복 입은 사람이 붙이면 사람들은 먼저 피하니까.”
집 안에서는 타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딸의 젖은 옷과 부은 손목, 크로노의 새 검, 마르의 피 묻은 붕대를 차례로 보았지만 질문부터 하지 않았다. 난로에 불을 붙이고 수건 세 장을 꺼낸 뒤 문과 덧창을 단단히 잠갔다.
루카가 서기 2300년의 폐허와 라보스의 날, 시간의 끝에서 만난 사람들, 헤케란이 남긴 말을 압축해 설명하는 동안 타반은 망가진 열쇠 장치의 외피를 고쳤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의 손은 멈춰 있었다.
“마왕이 라보스를 불렀다는 말 하나로 과거에 가겠다고?”
“하나뿐이라서 확인하러 가는 거야.” 루카가 말했다. “사실이면 서기 600년이 파국을 막을 가장 이른 지점이고, 거짓이면 누가 왜 그렇게 믿는지 알아야 해.”
타반은 딸의 고집이 이미 결정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숨을 쉬고 작업대 아래에서 탄환과 작은 축전지 몇 개를 꺼냈다.
“그럼 적어도 빈 발사기로 싸우지는 마라.”
크로노에게는 가죽 칼집을 건넸다. 보슈에게 받은 검이 꼭 맞게 들어갔다.
마르는 난로 앞에 앉아 젖은 장갑을 말리다가 물었다.
“성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왕은 공주가 납치범에게 홀렸다고 발표했어. 재상은 경비대를 항구와 광장에 나눠 보냈고.” 타반이 그녀를 보았다. “네가 돌아가도 네 말보다 그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가 먼저 기다릴 거다.”
마르는 장갑을 뒤집었다. 안쪽에서는 아직 물이 떨어졌다.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가야 해요.”
“언젠가와 오늘은 다른 말이지.”
그날 밤 세 사람은 사람이 끊긴 리네 광장으로 올라갔다. 축제 깃발은 여전히 걸려 있었지만 가판대는 천으로 덮였고, 시연장 주변에는 왕실 봉인이 둘러져 있었다. 크로노가 고양이를 찾아 주었던 아이의 빈 의자가 바람에 조금씩 흔들렸다.
루카는 봉인 아래로 들어가 순간 이동 장치의 전원을 연결했다. 마르의 펜던트가 빛을 머금자 공기가 안쪽으로 접혔다. 그들이 천년제 아침 처음 열었던 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경비병의 등불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가.”
타반이 장치 옆에 남아 말했다.
루카는 아버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서기 600년 트루스 협곡을 거쳐 시간의 끝으로 들어갔다. 화로 옆에는 로보가 앉아 있었다. 가스파가 알려 준 대로 세 사람만 메디나의 문을 건넜으며, 자신은 경계에서 밀려났다고 그는 보고했다.
“고장 난 곳은?” 루카가 곧바로 물었다.
“없습니다. 대기하는 동안 오른손의 반응 지연을 보정했습니다.”
그는 손가락을 펴 보였다. 늦게 움직이던 한 마디가 이제 다른 손가락과 거의 동시에 접혔다.
마르는 로보 옆에 앉아 헤케란의 말을 전했다. 로보는 한동안 계산하듯 눈의 밝기를 바꾸었다.
“서기 2300년의 기록은 라보스가 지하에서 출현했다고 표시합니다. 소환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기 600년으로 가 보려 해.”
로보가 일어섰지만 가슴 안쪽에서 거친 마찰음이 났다. 루카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쉬어. 공장에서 받은 충격이 아직 남아 있어.”
“전투 기능은 사용 가능합니다.”
“가능한 것과 해도 되는 건 달라.”
로보는 크로노를 보았다. 크로노는 말 대신 수리 자국이 남은 가슴 덮개를 가리켰다.
“돌아올게.”
“귀환 조건으로 기록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가스파가 가리킨 서기 600년의 기둥으로 들어갔다.
도착한 가르디아 숲에는 지난번과 다른 냄새가 났다. 비에 젖은 흙 아래로 연기와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성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수레바퀴 자국이 깊게 패였고, 다친 병사들을 실은 마차가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는 크로노를 알아보았다.
“왕비 전하를 구한 검사!”
그 호칭은 크로노를 멈춰 세웠다. 서기 1000년에서는 죄수였던 이름이 이곳에서는 환대를 받았다. 두 시대의 판단이 겨우 숲 하나를 사이에 둔 듯 가까웠다.
병사는 기뻐할 틈도 없이 남쪽을 돌아보았다.
“마왕군이 제난 다리를 밀고 있습니다. 다리가 무너지면 남쪽 마을들과 길이 끊깁니다.”
“왕실군은요?” 마르가 물었다.
“병력은 있지만 먹을 것이 없습니다. 보급 수레가 습격당했습니다. 주방에서도 성을 비울 수 없다고 하고…….”
성 안은 전쟁터보다 조용해서 더 어수선했다. 부상병의 신음이 복도마다 들렸고, 갑옷을 입다 만 젊은 병사들이 서로의 끈을 매 주었다. 왕과 왕비는 남쪽 전황을 보고받는 중이었다.
마르는 왕비에게 다가가려다 멈췄다. 서기 1000년의 왕실에서 뛰쳐나온 공주가 이곳에서는 먼 후손에 불과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는 대신, 그녀는 식량이 쌓인 안쪽 주방을 보았다.
주방장은 큰 칼로 고기를 자르며 부하들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성 안의 환자 몫도 모자라! 다리까지 보낼 수레가 어디 있어?”
루카가 창고를 살폈다. 밀가루 자루는 바닥을 보였지만, 천장 가까운 선반에는 소금에 절인 고기 꾸러미가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저건요?”
주방장의 칼이 도마에 박혔다.
“왕실 비상식량이다. 명령 없이는 손댈 수 없어.”
마르는 빈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병사를 가리켰다.
“다리가 무너지면 저 식량을 먹을 사람도 더 줄어들겠죠.”
“말은 쉽지. 누가 운반할 건데?”
크로노가 선반 아래의 수레 손잡이를 잡았다.
주방장은 세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칼을 뽑아 소금고기의 끈을 잘랐다. 그는 가장 큰 꾸러미를 수레에 올리고, 양파와 마른 빵을 그 위에 던졌다.

“대장에게 전해. 이건 병사들 배를 채우라고 주는 거지, 영웅 흉내 내는 놈 제삿상에 올리라고 주는 게 아니라고.”
제난 다리 북쪽에는 병사 스무 명 남짓이 방패를 세워 놓고 있었다. 강 위로 부는 바람이 갑옷 틈을 파고들었고, 다리 중간에는 부서진 수레와 사람의 뼈가 뒤엉켜 있었다. 남쪽 끝에서는 마왕군의 깃발이 안개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대장은 식량 꾸러미를 받자 잠깐 눈을 감았다. 배고픔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얼굴이 오히려 더 수척해 보였다.
“고맙소. 하지만 민간인을 싸움에 끌어들일 수는 없소.”
크로노는 다리 건너편을 보았다. 검은 망토를 두른 마족 하나가 긴 낫을 들고 병사들의 시체 사이를 걷고 있었다. 그 뒤에서 작은 괴물들이 뼛조각을 모아 한곳에 쌓았다.

루카가 말했다.
“우리는 마왕을 찾고 있어요. 저 길을 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막겠소. 지금 다리에 들어가면 길이 아니라 무덤뿐이오.”
마르는 빵 한 덩이를 잘라 가장 어린 병사에게 건넸다. 손이 떨려 빵을 제대로 잡지 못하자 그녀가 방패 위에 내려놓았다.
“먹고 나서 결정하세요. 배고픈 사람의 판단을 명령이라고 부르면 안 돼요.”
병사들은 처음에는 눈치를 보았지만,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빵과 고기를 나누었다. 씹는 소리가 바람 사이로 작게 퍼졌다. 누구도 배부르게 먹지 않았다. 자기 몫 절반을 갑옷 안에 넣는 이들이 많았다. 돌아오지 못할 동료에게 남겨 두려는 듯했다.
식사가 끝나기 전에 남쪽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낫을 든 마족이 팔을 들어 올리자 뼛더미가 흔들렸다. 서로 다른 몸에서 떨어져 나온 갈비뼈와 팔, 턱뼈가 검은 기운에 이끌려 맞물렸다. 다리 폭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해골이 상체를 일으켰고, 골반 아래에는 또 하나의 얼굴이 거꾸로 달려 있었다.

대장이 방패를 들었다.
“전열을 세워!”
첫 충돌로 병사 셋이 뒤로 밀려났다. 해골의 팔이 방패 위를 훑자 금속 테두리가 종잇장처럼 휘었다. 크로노는 빈틈을 따라 전열 앞으로 나갔다. 칼로 뼈를 자르려 하지 않고 관절이 맞물린 부분을 쳐 방향을 틀었다.
루카의 불꽃이 해골의 어깨에 붙었다. 검은 기운이 걷히며 상체의 뼈가 벌어졌다. 그러나 불길이 아래쪽으로 번지자 골반의 얼굴이 입을 벌려 열을 삼켰다. 꺼진 불이 검은 연기로 되돌아와 루카를 덮쳤다.
마르가 물을 둥글게 펼쳐 연기를 밀어냈다.
“위와 아래가 달라!”
그녀는 곧바로 물줄기를 아래쪽 얼굴로 보냈다. 이번에는 뼈 사이의 검은 막이 얼어붙듯 굳었다. 거대한 다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상체는 불, 아래는 물이야.” 루카가 외쳤다.
적은 둘로 나뉘어 있으면서 한 몸처럼 움직였다. 위쪽 팔이 크로노를 잡으려 할 때 아래쪽 다리는 마르를 향해 뼛조각을 걷어찼다. 세 사람이 각자 싸우면 다리 폭이 너무 좁아 서로의 퇴로를 막았다.
크로노는 병사들의 방패선을 보았다. 그는 대장에게 손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킨 뒤 자신은 왼쪽 난간으로 붙었다. 대장이 뜻을 알아차리고 병사들을 한 걸음 전진시켰다. 방패 여섯 개가 아래쪽 몸을 밀어 다리 중앙에 묶어 두었다.
마르는 방패 틈으로 물을 흘려보냈다. 물은 바닥 돌 위에서 얇게 얼어 해골의 발을 붙잡았다. 그녀의 입술이 창백해졌지만 흐름을 놓지 않았다.
루카는 상체가 팔을 들어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 갈비뼈 사이의 검은 심장이 드러난 순간, 손 안의 불을 넓히지 않고 송곳처럼 가늘게 밀어 넣었다. 불꽃이 내부에서 터지며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크로노는 난간을 밟고 뛰어올랐다. 검 끝에 푸른 빛이 잠깐 맺혔다. 그는 힘을 한꺼번에 방출하지 않고, 갈비뼈를 묶은 검은 결을 따라 칼날을 그었다. 번개가 마디마다 옮겨붙자 해골의 팔이 제각기 풀려 다리 위로 떨어졌다.
상체가 무너지며 아래쪽 몸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병사들의 방패선이 깨졌고 대장이 바닥을 굴렀다. 거꾸로 달린 얼굴이 입을 벌리자 차가운 기운이 다리 전체에서 피어올랐다.
마르는 얼어붙은 손가락을 펴지 못했다. 크로노가 그녀 앞을 막았지만 검에는 더 이상 빛이 남지 않았다.
루카가 마지막 축전지를 발사기에 끼웠다.
그녀는 얼굴을 노리지 않았다. 해골이 서 있는 다리의 금 간 돌판을 쏘았다. 폭발은 작았으나 이미 얼고 녹기를 반복한 틈이 벌어졌다. 크로노가 그 자리를 발뒤꿈치로 내리쳤고, 대장이 남은 병사들과 함께 방패를 밀었다.
돌판 한쪽이 무너졌다.
해골의 아래쪽 몸이 강 쪽으로 기울었다. 마르는 남은 힘으로 난간 아래의 물을 끌어 올렸다. 무거운 물기둥이 골반을 때리자 거대한 뼈들이 다리 밖으로 넘어갔다. 검은 기운이 끊기며 낱개의 뼈로 흩어져 물속에 가라앉았다.
낫을 든 마족은 남쪽 안개 속으로 물러났다. 병사들은 뒤쫓지 않았다. 승리한 사람들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고 다친 팔을 붙잡았다.
대장은 부러진 방패를 내려놓았다.
“다리를 건너면 도리노 마을이오. 그곳 사람들은 새로 나타난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릴 거라고 믿고 있소.”
“용사?” 마르가 물었다.
“영웅의 증표를 가진 소년이 나타났답니다. 데나도로 산에서 전설의 검을 찾고 있다더군.”
루카는 크로노를 보았다. 헤케란이 남긴 말, 마왕, 라보스, 그리고 마왕을 쓰러뜨릴 검이 하나의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리 위에는 아직 식량 꾸러미가 남아 있었다. 마르는 그것을 집어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돌려주었다.
세 사람은 환호를 받지 않고 남쪽으로 걸었다. 뒤에서는 병사들이 다시 방패를 세웠고, 앞에서는 전쟁의 안개 속에 산맥이 검은 등처럼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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