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17화] 적의 마을

서기 1000년의 빛은 따뜻했지만, 세 사람을 맞은 것은 잠긴 벽장이었다.

크로노는 어깨로 나무문을 받친 채 뒤를 돌아보았다. 시간의 문이 닫히며 남긴 푸른 잔광 속에는 로보의 손만 잠깐 보였다. 그 손은 경계까지 따라왔다가 바깥에 남았다. 네 번째 몸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 빛이 한 번 크게 수축했고, 로보의 모습은 시간의 끝 쪽으로 밀려났다.

루카가 열쇠 장치를 내려다보았다. 수정판의 바늘이 격하게 떨리다가 멎었다.

“가스파의 말이 맞았어. 길이 셋까지만 받아들인 거야.”

마르는 닫힌 소용돌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로보는 괜찮겠지?”

“저쪽으로 되돌아갔어. 우리보다 안전한 곳에.”

루카의 대답에는 확신보다 바람이 조금 더 섞여 있었다. 그녀는 장치를 접고 벽장문을 살폈다. 문틈 너머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크로노가 손잡이를 밀자 문이 갑자기 열렸다.

그들은 낯선 집의 안방으로 쏟아졌다. 식탁 앞에 앉아 있던 푸른 피부의 부부가 숟가락을 든 채 굳었다. 벽에는 뿔 달린 검은 인물의 초상이 걸려 있었고, 화로 위의 냄비에서는 낯익지 않은 향신료 냄새가 났다.

메디나 마을의 마족 집 안에 들어선 크로노 일행 - Vorxu
메디나 마을의 마족 집 안에 들어선 크로노 일행 - Vorxu

남편 쪽이 먼저 일어섰다. 작은 뿔 아래의 눈이 세 사람을 훑었다.

“또 문에서 떨어졌군.”

그 말은 예상했던 비명도, 공격의 신호도 아니었다.

“전에 다른 사람도 왔어요?” 루카가 물었다.

“우리가 알기 전부터 저 안에 있었어. 가끔 빛이 울지만 사람이 나온 건 처음이다.”

아내가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세 사람의 둥근 귀와 피부를 보고 경계하고 있었다.

“인간을 오래 두면 마을 사람들이 알게 돼.”

마르는 한 걸음 물러났다.

“폐를 끼치려던 건 아니에요. 트루스로 가는 길만 알려 주시면 바로 나갈게요.”

남편은 잠시 망설이다가 북쪽 산을 가리켰다.

“육로는 막혀 있다. 산 아래 동굴을 통과하면 서쪽으로 갈 수 있지만, 그 안에는 헤케란이 산다. 인간은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해.”

“배는요?”

“선착장에 가 보든가. 값을 치를 수 있다면.”

그는 마지막 말을 씁쓸하게 덧붙였다.

집 밖으로 나오자 마을 중앙의 석상이 가장 먼저 보였다.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가 한 손을 치켜든 모습이었다. 받침대에는 마왕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앞에서 마족들이 작은 등불을 바치고 있었다.

서기 600년의 성당에서 칼을 들고 달려들던 얼굴들과 닮은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병사는 아니었다. 한 아이는 석상 계단을 미끄럼틀처럼 타다가 어머니에게 붙잡혔고, 빵을 나르는 노인은 세 사람을 보자 바구니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적의 후손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생활이 골목마다 이어졌다.

마르가 낮게 말했다.

“전쟁이 끝난 지 사백 년인데도 우리를 저렇게 보는구나.”

“우리 쪽도 다르지 않을 거야.” 루카가 대답했다. “가르디아에서는 마족을 보면 먼저 경비병을 부르겠지.”

크로노는 석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서기 600년에서 아직 살아 있을 마왕이 이곳에서는 패배한 영웅처럼 기억되고 있었다.

여관 주인은 방 하나에 가르디아 수도의 며칠치 숙박비를 요구했다. 물을 사려 하자 상인은 가격표를 뒤집어 원래 숫자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 붙였다. 마르가 항의하려 입을 열었으나, 크로노는 가게 안쪽에 걸린 오래된 창을 보았다. 날 끝이 부러진 창에는 가르디아 왕실 문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도 그것을 보고 말을 삼켰다.

선착장에서는 인간을 태울 배가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부두에 묶인 배가 두 척이나 있었지만 선주는 돛을 수선 중이라며 등을 돌렸다. 거짓말은 분명했으나 억지로 탈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은 마을을 벗어나 남서쪽의 외딴 집으로 향했다. 마족 부부가 알려 준, 인간 장인이 산다는 곳이었다.

문을 연 노인은 크로노의 가방 옆에서 흔들리는 천 뭉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무기를 그렇게 둘둘 싸서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백발 아래의 눈이 웃었지만 손은 벌써 천을 풀고 있었다. 금이 길게 간 칼날이 햇빛을 받자 어두운 선이 등뼈처럼 드러났다.

“한 번 더 세게 부딪쳤으면 자네 손 쪽으로 부러졌을 거야.”

“고칠 수 있나요?” 마르가 물었다.

노인은 칼날을 가볍게 튕겨 울림을 들었다.

“고치는 흉내는 낼 수 있지. 하지만 부러질 시간을 늦추는 것과 다시 믿을 수 있는 칼을 만드는 건 다른 일일세.”

그는 자신을 보슈라고 소개했다. 작업대 아래에서 장식 없는 짧은 검을 꺼내 크로노에게 건넸다. 칼은 이전 것보다 가벼웠고, 손잡이의 중심이 손바닥 가까이에 모여 있었다. 크로노가 한 번 휘둘러 보자 끝이 먼저 달려가지 않고 손의 움직임을 고르게 따라왔다.

“좋은 칼은 힘을 대신 내 주지 않네. 실수했을 때 손목을 한 번쯤 살려 줄 뿐이지.”

크로노는 가진 돈을 꺼냈다. 보슈는 절반만 받고 나머지를 밀어 돌려보냈다.

“동굴을 지나가려는 얼굴이군. 돌아오면 그때 받겠네.”

루카가 벽에 세워 둔 기묘한 금속 조각들을 살피다가 물었다.

“마왕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

망치질할 자리를 정리하던 손이 잠깐 멈췄다.

“이 마을에서 그 질문은 집마다 다른 답을 얻을 걸세. 누군가에게는 인간과 싸운 지도자고, 누군가에게는 패전을 남긴 이름이지.”

“라보스는요?”

보슈는 이번에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 반응에는 꾸민 기색이 없었다. 루카는 더 묻지 않고 동굴의 위치를 확인했다.

헤케란 동굴 입구에서는 따뜻하고 젖은 공기가 흘러나왔다. 바깥의 늦은 오후와 달리 내부 암벽에는 푸른 이끼가 빛났고,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여러 갈래의 홈을 따라 흘렀다. 깊은 곳에서는 물살이 바위를 울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헤케란 동굴 입구에 선 크로노 일행 - Vorxu
헤케란 동굴 입구에 선 크로노 일행 - Vorxu

처음 나타난 마족들은 창과 돌도끼를 들고 길을 막았다. 크로노가 새 검으로 가장 앞선 창대를 밀어냈지만, 옆에서 휘어진 발톱이 날아들었다. 그는 몸을 낮추며 칼등으로 궤도를 흘렸다. 충격은 견딜 만했으나 상대의 가죽에는 얕은 흔적만 남았다.

루카가 손바닥을 폈다.

시간의 끝에서 피어났던 불꽃은 이번에는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축축한 공기와 달려드는 적, 타인의 숨소리가 집중을 흔들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 사이의 열을 한 점으로 모았다. 작은 불씨가 상대의 젖은 어깨에 닿자 꺼지는 대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마족이 놀라 몸을 비틀며 뒤로 물러났다.

“칼보다 잘 들어.”

루카는 성공을 기뻐할 틈 없이 손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은 타지 않았지만 부은 손목 안쪽에서 맥박이 세게 뛰었다.

마르는 물길을 끌어 올려 크로노의 발목을 잡으려던 작은 괴물을 밀어냈다. 물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녀가 방향을 바꾸자 벽에 부딪친 물살이 둘로 갈라져 자기 무릎까지 덮쳤다.

“아직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네.”

“스페키오가 그것까지 알려 주진 않았으니까.”

세 사람은 힘을 아껴 가며 동굴 안쪽으로 내려갔다. 마법은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었다. 집중이 흐트러지면 사라졌고, 두 번 연달아 쓰면 숨이 가빠졌다. 크로노의 번개도 넓게 퍼지려 하면 바닥의 물을 타고 세 사람 모두에게 돌아왔다. 그는 물이 끊긴 바위 위에서만 힘을 불러냈다.

가장 깊은 공동은 둥근 우물처럼 생겨 있었다. 중앙의 바위섬을 검은 물이 에워싸고, 반대편 절벽 아래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내려앉고 있었다.

바위섬 위에서 푸른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팔과 굽은 뿔, 등 전체를 덮은 단단한 돌비늘이 먼저 보였다. 헤케란은 인간 셋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걷어 올렸다.

헤케란과 마주 선 크로노 일행 - Vorxu
헤케란과 마주 선 크로노 일행 - Vorxu

“마왕님의 땅에 제 발로 들어온 인간이라.”

그가 팔을 휘두르자 물기둥이 바위섬을 가로질렀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피했다. 크로노가 옆구리를 스친 물살에 균형을 잃는 동안, 헤케란은 몸을 웅크렸다가 돌진했다.

마르는 크로노 앞의 물을 끌어당겼다. 얇은 막은 거인을 멈추지 못했지만 발밑의 마찰을 빼앗았다. 헤케란의 오른발이 미끄러지며 어깨가 벽에 부딪쳤다.

루카의 불꽃이 드러난 옆구리를 때렸다. 불길은 젖은 피부에서 잠시 흔들리다가 비늘 틈으로 번졌다. 거인이 포효하며 팔을 휘둘렀고, 루카는 몸을 숙였지만 손등이 발톱 끝에 긁혔다.

크로노는 낮아진 어깨를 밟고 등 위로 올라갔다. 검을 비늘 사이에 찔러 넣으려는 순간 헤케란이 움직임을 멈췄다. 거인의 몸 주위에 푸른 막이 둥글게 부풀었다.

“해 봐라. 인간의 칼이 닿는지.”

크로노는 팔을 거두었다.

막의 표면이 안쪽으로 당겨지고 있었다. 공격을 받아 되돌려 보내려는 준비였다. 그는 검을 꽂는 대신 손잡이로 비늘을 짚어 몸을 밀어냈다. 곧 헤케란이 양팔을 벌리며 막을 터뜨렸다. 공기가 밀려나 바위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루카는 크로노가 물 위로 떨어지기 전에 그의 외투를 붙잡았다. 두 사람의 무게에 그녀의 손목이 꺾였고, 마르가 반대쪽 팔을 잡아 당겼다.

“기다리는 동안은 건드리면 안 돼.” 루카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 움직일 때만.”

마르는 헤케란의 발 아래로 흐르는 물을 보았다. 거인이 방어막을 거두고 다시 달려드는 순간, 그녀는 두 손을 모아 물길을 한쪽 발목에 감았다. 완전히 붙잡지는 못했지만 보폭이 짧아졌다.

크로노는 바위섬의 가장 높은 돌 위로 올라갔다. 손끝에서 피어난 푸른 전류를 칼날에 억지로 머물게 하지 않고, 금속을 따라 앞쪽으로 흘려보냈다. 빛은 검 끝에서 떨어져 헤케란의 뿔 사이를 때렸다.

거인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그 틈을 향해 루카의 불꽃이 날아갔다. 두 힘은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지만 시간은 정확히 맞았다. 번개에 굳은 몸이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헤케란은 몇 걸음 물러나다가 바위섬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사백 년 전…… 마왕님이 라보스를 불러냈을 때 인간은 끝났어야 했다.”

루카의 얼굴에서 승리의 기색이 사라졌다.

“마왕이 라보스를 불러냈다고?”

헤케란은 대답 대신 마지막 힘으로 팔을 휘둘렀다. 크로노가 옆으로 흘리고 마르는 물을 밀어 그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거대한 몸이 검은 웅덩이로 떨어졌다. 물결이 공동 벽까지 치솟았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세 사람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헤케란이 남긴 말만 물소리 사이에서 반복되었다.

루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라보스가 서기 1999년에 나타나는 걸 봤어. 하지만 그게 처음 나타난 때라는 증거는 없었어.”

마르는 젖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마왕이 사백 년 전에 불렀고, 땅속에 남아 있다가 미래를 파괴한 거라면.”

“서기 600년에서 막을 수 있어.”

루카는 그렇게 말했지만 곧 덧붙였다.

“아직은 가설이야. 적이 죽기 전에 한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어.”

크로노는 소용돌이 너머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보았다. 물길은 산 아래를 지나 서쪽 바다 가까이 이어지는 듯했다. 돌아갈 길이 열린 동시에, 다시 과거로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헤케란 동굴 깊은 곳의 소용돌이 앞에 선 일행 - Vorxu
헤케란 동굴 깊은 곳의 소용돌이 앞에 선 일행 - Vorxu

세 사람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흐름이 몸을 잡아당겼다. 동굴의 어둠이 머리 위로 닫혔다가, 잠시 뒤 저녁 햇빛과 바닷바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멀리 익숙한 풍차와 트루스의 지붕이 보였다.

크로노는 해안의 젖은 모래를 짚고 일어났다.

그들이 돌아온 곳은 집이 있는 시대였다. 그러나 세 사람의 시선은 이미 사백 년 전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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