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12화] 멸망이 기록된 날

아리스 돔의 사람들은 놀라는 데에도 힘을 아꼈다.

서쪽 폐허를 건너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몇 사람이 몸을 일으켰지만, 곧 다시 벽에 기대앉았다. 기대가 틀렸을 때 견뎌야 할 실망까지 계산하는 듯했다.

도안이라는 노인이 세 사람을 맞았다.

그는 한때 흰색이었을 외투를 여러 겹 기워 입고 있었다. 허리는 굽었지만 목소리만은 돔 안의 다른 사람보다 또렷했다.

“나는 이곳 정보센터 책임자의 후손이오. 그 직함이 아직 의미가 있다면 말이지.”

도안은 천장에서 물이 새는 넓은 홀을 가리켰다. 벽 아래에는 작동을 멈춘 단말기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를 침상과 화로가 채우고 있었다.

“지하에 식량 저장고가 있소. 컴퓨터도 살아 있을지 모르고. 하지만 경비 기계가 통로를 막은 뒤로 내려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소.”

아이 하나가 노인의 외투를 잡았다.

“아빠는 돌아올 거예요.”

도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의 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에는 성인에게 맞지 않는 금속 팔찌가 들려 있었다. 남편이 남긴 물건인지, 돌아왔을 때 건네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르가 아이 앞에 앉았다.

“아빠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 줄래?”

아이는 홀 뒤쪽의 닫힌 문을 가리켰다.

“밥을 찾으러요. 내가 기다리면 온다고 했어요.”

그 말은 믿음이라기보다 매일 반복해 무너지지 않게 만든 약속처럼 들렸다.

루카가 지하 통로의 단말기를 살폈다. 외부 덮개를 열자 녹슨 선 사이로 약한 전류가 남아 있었다.

“문은 열 수 있어. 아래쪽 전력도 완전히 끊긴 건 아니야.”

도안의 얼굴에 경계가 생겼다.

“정말 내려가겠다는 거요?”

“식량이 남아 있을 수도 있잖아요.” 마르가 말했다.

“그 말로 이미 많은 사람을 보냈소.”

마르는 아이와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돌아오려고요.”

크로노가 문 앞으로 걸어갔다. 도안은 그의 금이 간 검과 붕대를 본 뒤 더 말리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만 한 조명 장치 하나를 건넸다.

“빛이 세 번 깜박이면 전지가 끝난 거요. 그 전에 돌아오시오. 빈손이어도 좋으니 살아서.”

루카가 전선을 잇자 지하문이 느리게 열렸다.

아래에서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올라왔다. 트란 돔 바깥의 먼지 냄새와 달리, 이곳에는 썩은 음식과 오래된 소독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계단은 두 층 아래에서 끊겨 있었다.

세 사람은 무너진 난간을 밟고 배관 위로 내려갔다. 크로노가 먼저 몸을 낮춰 금속의 강도를 확인했고, 루카가 가방을 밧줄에 매달아 보냈다. 마르는 마지막에 내려오며 위쪽 문이 닫히지 않도록 쇠막대를 끼웠다.

“돌아올 길부터 남겨 두는 거야.”

그녀는 크로노의 시선을 알아보고 말했다.

복도 끝에는 창고로 이어지는 넓은 방이 있었다.

문 앞에 사람 키의 두 배쯤 되는 원통형 기계가 서 있었다. 양옆에는 둥근 보조 장치 두 개가 낮게 떠 있었고, 붉은 불빛이 세 사람을 차례로 훑었다. 바닥의 경고 문자가 켜지자 루카가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경비 장치야. 양옆의 작은 것들이 중앙부에 전력과 수리 기능을 공급해.”

“멈출 수 있어?” 마르가 물었다.

“가까이 가서 선을 끊으면.”

중앙 기계의 위쪽 덮개가 열렸다.

노란 빛이 안에 모였다. 크로노는 두 사람을 밀어내며 옆으로 몸을 던졌다. 빛줄기가 방을 가르고 지나가 뒤쪽 문을 검게 그을렸다.

루카가 발사기를 쐈다.

탄환은 왼쪽 보조 장치의 겉면을 찌그러뜨렸지만, 중앙부에서 뻗은 가느다란 팔이 곧바로 손상 부위를 덮었다. 금속이 스스로 펴지며 붉은 불빛이 다시 켜졌다.

“떨어뜨려도 되살릴 거야!”

크로노는 검을 뽑았다. 금이 간 칼날이 조명 아래에서 불안하게 빛났다. 정면의 장갑을 벨 수는 없었다. 그는 중앙부가 다시 빛을 모으는 간격과, 두 보조 장치가 수리를 위해 가까워지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두 번째 빛줄기가 바닥을 훑었다.

세 사람은 쓰러진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열기가 금속 너머까지 전해졌다. 마르는 발밑에서 느슨해진 배관 고리를 발견하고 양손으로 뽑아냈다. 한쪽이 갈고리처럼 휘어 있었다.

“내가 끌어당길게.”

“너무 가까워.” 루카가 말했다.

“가까이 가야 선을 끊는다며.”

마르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오른쪽으로 달렸다. 중앙 기계의 붉은 눈이 그녀를 따라 회전했다. 보조 장치 하나가 사격 방향을 확보하려 옆으로 움직이는 순간, 마르가 배관 고리를 외부 틈에 걸었다.

기계의 힘이 그녀를 끌고 갔다.

장화가 바닥에서 미끄러지고 손바닥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크로노가 뒤에서 허리를 붙들었다. 두 사람이 함께 몸을 낮추자 보조 장치가 기울며 중앙부와 이어진 선이 드러났다.

루카의 탄환이 선을 끊었다.

오른쪽 장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은 빛이 꺼지고 내부 톱니가 헛돌았다.

중앙 기계가 즉시 수리 팔을 뻗었다.

크로노가 그 사이로 달려들었다. 그는 장갑판 대신 팔의 관절에 칼을 밀어 넣었다. 날을 내려치는 대신 양손으로 손잡이를 비틀어 톱니 사이에 끼웠다.

금속이 칼날을 물었다.

검에 난 금이 길어졌다.

크로노는 더 버티지 않고 손을 놓았다. 수리 팔은 칼을 끌어안은 채 멈췄다. 대신 중앙부 위쪽의 빛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크로노, 물러나!”

루카가 외쳤다.

왼쪽 보조 장치는 아직 살아 있었다. 놈이 중앙부 앞으로 이동해 사격 각도를 열었다.

마르가 바닥의 고리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보조 장치를 끌어당기지 않고, 중앙 기계의 벌어진 덮개 사이로 던졌다. 고리가 빛이 모이는 내부 축에 걸렸다.

크로노가 늘어진 배관을 잡아당겼다.

빛줄기는 정면이 아니라 왼쪽으로 꺾여 발사되었다.

남은 보조 장치를 그대로 관통했다.

폭발한 파편이 방 안을 튀었다. 루카가 마르를 기둥 뒤로 끌어당겼고, 크로노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뜨거운 금속 조각 하나가 어깨를 스쳤다.

두 보조 장치가 모두 멈추자 중앙 기계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손상 부위를 고치려던 팔은 허공을 더듬었고, 붉은 눈은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불규칙하게 떨렸다.

“이제 본체야!”

루카는 마지막 탄환을 아끼고 가까이 달려갔다. 중앙부 아래에서 열린 전력판에 공구를 밀어 넣어 두 선을 맞붙였다. 푸른 불꽃이 그녀의 팔을 타고 튀었고, 손목이 충격에 꺾였다.

크로노가 루카를 잡아 뒤로 끌었다.

기계 안쪽에서 서로 다른 회전음이 겹쳤다. 멈춰야 할 톱니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이빨을 부러뜨렸다. 원통형 몸이 한쪽으로 기울더니 바닥에 무겁게 쓰러졌다.

마지막 붉은 불빛이 꺼졌다.

아리스 돔 지하의 가디언과 두 보조 장치 - ArrPeeGe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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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루카는 부은 손목을 움켜쥐었고, 마르는 피가 밴 손바닥에 천을 감았다. 크로노는 기계 팔 사이에 끼인 검을 꺼냈다. 칼날의 금은 손잡이 가까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더는 휘두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검집에 넣지 않고 천으로 감싸 가방 옆에 묶었다.

“저 문 너머가 저장고야.”

루카의 목소리에는 승리의 기쁨이 없었다.

문을 열자 냄새가 먼저 나왔다.

마르는 입을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 거대한 저장실의 선반마다 검게 녹은 덩어리와 터진 용기가 쌓여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의 썩은 액체와 섞여 천천히 흘렀다. 냉각 장치는 오래전에 멈췄고, 남은 식량은 손댈 수 없는 상태였다.

“전부…….”

마르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선반 사이를 끝까지 확인했다. 밀봉된 통 하나라도 남아 있기를 바랐지만, 손가락으로 누르면 용기가 부서질 만큼 삭아 있었다.

가장 안쪽 벽에 사람이 기대앉아 있었다.

옷과 피부는 말라붙어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 손에는 작은 주머니를 품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얼룩진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라는 표식은 없었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리스 돔 식량 저장고에서 발견된 쓰러진 남자 - ArrPeeGeeZ
아리스 돔 식량 저장고에서 발견된 쓰러진 남자 - ArrPeeGeeZ

마르가 무릎을 꿇었다.

주머니 안에는 마른 씨앗 몇 알이 들어 있었다.

“먹을 것은 못 가져갔어도…… 자랄 수 있는 건 찾았네.”

그녀는 씨앗을 두 손으로 감쌌다.

루카는 얼룩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정보센터의 잠긴 구역을 여는 방법이 적혀 있었지만 일부가 지워져 있었다. 남은 문장에는 돔 안을 돌아다니는 쥐 모양 장치가 비밀을 알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때 선반 아래에서 금속 긁는 소리가 났다.

작은 쥐가 빛을 피해 달아났다. 메마른 털 사이에는 금속 조각들이 붙어 있었고, 움직임은 16호 폐허에서 본 생물들보다 훨씬 영리했다.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어.” 루카가 속삭였다.

세 사람은 출구를 나누어 막았다. 마르가 일부러 빈 용기를 굴리자 쥐는 반대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크로노는 달려들지 않고 통로 끝에 무릎을 꿇어 외투를 펼쳤다. 쥐가 천 아래로 파고드는 순간 양끝을 모아 가두었다.

쥐는 천 안에서 몸부림치다 갑자기 사람 말을 흉내 내듯 쉰 소리를 냈다. 놓아 주면 문을 여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는 뜻이었다. 루카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천을 조금 풀어 주자, 놈은 앞발로 허공을 누르는 동작을 세 번 반복했다.

“입력 순서를 알고 있어.”

루카는 벽의 조작판에서 같은 위치를 찾아냈다. 크로노가 천을 놓자 쥐는 약속을 확인할 틈도 주지 않고 선반 아래로 사라졌다.

아리스 돔 통로의 기계와 쥐 사이를 지나는 일행 - ArrPeeGeeZ
아리스 돔 통로의 기계와 쥐 사이를 지나는 일행 - ArrPeeGeeZ

정보센터는 저장고 반대쪽에 있었다.

잠긴 단말기에 순서대로 손을 대자 벽이 옆으로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화면이 한꺼번에 켜졌다. 푸른 지도가 방 중앙에 떠올랐고, 폐허의 돔들이 별자리처럼 연결되었다.

루카는 피로도 잊은 채 조작대 앞으로 갔다.

“시간의 문과 비슷한 파동을 찾을 수 있어.”

그녀는 열쇠 장치의 기록을 컴퓨터에 연결했다. 지도 위를 빛이 훑고 지나간 뒤 아리스 돔 동쪽에서 한 점이 깜박였다.

“프로메테 돔.”

루카가 오래된 표기를 읽었다.

“저곳에 같은 공간 왜곡이 있어. 돌아갈 길일 수도 있어.”

마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씨앗을 가슴에 안은 손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그녀가 조작대 옆에 기대려다 손바닥으로 다른 판을 눌렀다.

화면의 지도가 사라졌다.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서기 1999년 — 라보스의 날 영상 기록.`

“라보스?”

마르가 처음 듣는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방 안의 불빛이 꺼지고 중앙 화면이 살아났다.

처음에는 도시가 보였다. 하늘을 찌르는 탑과 빛나는 도로, 구름 사이를 움직이는 비행체들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걸어온 폐허가 무너지기 전의 모습이었다.

땅이 흔들렸다.

화면 속 사람들이 멈춰 섰다. 도시 아래에서 원형의 균열이 퍼지고, 대륙을 가르는 붉은 빛이 솟았다. 산보다 거대한 검은 형체가 지표를 뚫고 올라왔다. 등에는 수없이 많은 가시가 있었고, 벌어진 껍질 사이로 불이 맥박쳤다.

그것이 울자 기록 장치의 소리마저 찢어졌다.

빛의 기둥들이 하늘로 솟았다가 세계 곳곳으로 떨어졌다. 탑이 녹아내리고, 바다가 들끓었으며, 구름이 검게 말려 올라갔다. 화면은 여러 도시의 영상을 차례로 보여 주었지만 어디에서도 피할 곳은 없었다.

마르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안고 있던 씨앗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크로노가 몸을 숙여 주웠지만 시선은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영상에는 지평선 전체를 덮은 불과, 그 위로 내려앉는 검은 재가 보였다.

기록이 끝났다.

서기 1999년 지표를 뚫고 솟아오른 라보스의 기록 영상 - Coldrun Gaming
서기 1999년 지표를 뚫고 솟아오른 라보스의 기록 영상 - Coldrun Gaming

방 안에는 기계의 낮은 울림만 남았다.

루카는 조작대에 두 손을 짚었다. 사라진 왕국도, 무너진 도시도 누군가의 먼 전설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바닥과 머리 위의 회색 하늘이 그날의 결과였다.

“우리가 본 건…… 삼백 년 전의 기록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우리 시대에서는 구백구십구 년 뒤고.”

마르는 크로노가 든 씨앗을 바라보았다.

“리네 왕비를 구했을 때, 내가 돌아왔어.”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골랐다.

“이미 일어난 일도 바뀔 수 있었어. 그렇다면 이것도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루카가 화면을 보았다.

“원인도 모르고, 저게 무엇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알아내는 거지.”

마르는 씨앗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조금 전보다 손이 덜 떨렸다.

“우리가 봤잖아. 모른 척하고 돌아가면 이곳의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

크로노는 꺼진 화면에 비친 세 사람을 보았다.

축제 아침에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시간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 선택은 눈앞의 손 하나만큼 가까웠다. 이제 화면이 보여 준 것은 도시와 바다와 하늘의 죽음이었다. 너무 커서 무엇부터 붙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마르에게서 씨앗 한 알을 받아 손바닥에 올렸다.

작고 가벼웠다.

그러나 완전히 죽은 저장고에서 발견한 것 가운데, 그것만이 아직 미래를 품고 있었다.

크로노는 씨앗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동쪽에서 깜박이는 프로메테 돔의 표식을 가리켰다.

돌아갈 길을 찾는 일과 라보스를 알아내는 일은 이제 같은 방향에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시대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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