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11화] 비가 오지 않는 하늘
시간의 문 밖에는 바닥이 없었다.
크로노는 발을 내딛는 순간 몸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르의 손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고, 세 사람은 차가운 금속 경사면을 굴러 아래로 떨어졌다. 어깨와 등이 몇 번이나 부딪친 뒤에야 찌그러진 난간이 몸을 받아 냈다.
푸른빛이 머리 위에서 오므라들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빗방울 몇 개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것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뜨거운 금속 위에서 증발했다.
크로노는 몸을 일으켰다.
공기는 낡은 동전처럼 쓰고 건조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먼지가 목구멍 안쪽에 붙었다. 그들이 나온 곳은 거대한 반구형 건물의 내부였으나, 천장은 절반이 무너져 검은 하늘을 드러내고 있었다. 벽을 따라 층층이 이어진 통로는 중간마다 끊겼고, 바닥에는 유리와 금속 조각이 모래처럼 쌓여 있었다.
“다들 괜찮아?”
루카가 먼저 가방을 확인했다. 시간의 문 열쇠 장치는 충격을 받았는지 수정판 안쪽에 가느다란 금이 생겼지만 바늘은 움직였다.
마르는 난간을 붙들고 일어났다. 손바닥이 까졌고 무릎의 천이 찢어져 있었다.
“아버지의 병사들이 따라오지는 못했겠지?”
루카가 닫힌 공간을 올려다보았다.
“같은 장치가 없으면 당장은 어려워. 그래도 이 문을 다시 열 수 있는지는 확인해야 해.”
그녀가 열쇠를 들어 올리자 바늘이 시간의 문이 사라진 자리를 향했다. 약한 푸른 선이 한 번 나타났다가 꺼졌다. 연결은 남아 있었지만, 조금 전 이동의 충격 때문인지 장치는 곧바로 문을 만들지 못했다.
“돌아갈 수 없는 거야?” 마르가 물었다.
“못 간다는 뜻은 아니야.”
루카는 금이 간 수정판을 엄지로 눌렀다.
“지금 함부로 다시 열었다가 연결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뜻이지.”
크로노는 주변을 살폈다.
낯선 건물의 구조에는 이상할 만큼 정교한 질서가 남아 있었다. 벽 안으로 숨은 문, 일정한 간격으로 박힌 조명, 사람 없이도 움직였을 것 같은 수송대. 그러나 어느 것도 작동하지 않았다. 문 옆의 검은 판에 손을 대자 잠깐 빛이 들어왔고,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떠올랐다가 꺼졌다.
바닥 끝에는 왕실 문장과 닮지 않은 낯선 문양이 새겨진 문이 있었다. 푸른 원과 여러 갈래의 선이 겹친 모양이었다.
루카는 틈을 따라 손을 움직이고 옆의 검은 판을 두드려 보았다. 순간 이동 장치도, 시간의 문도 아닌 방식으로 잠겨 있었다. 마르가 펜던트를 꺼내 보았지만 푸른 보석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문양은 기억해 두자.”

루카는 종이에 모양을 옮겨 그렸다.
마르는 펜던트를 다시 옷 안에 넣었다. 지금은 닫힌 문 너머보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이 먼저였다. 먼지 사이에 아주 약한 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밖으로 이어진 통로는 지면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세 사람이 무너진 벽을 넘어섰을 때, 마르는 첫걸음을 떼지 못했다.
하늘에는 해가 없었다.
두꺼운 회색 구름이 사방을 덮고 있었고, 그 아래로 거대한 도시의 잔해가 끝없이 이어졌다. 탑은 중간이 잘린 채 검은 뼈대만 세우고 있었으며, 둥근 건물들은 땅속으로 반쯤 꺼져 있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던 길은 곳곳에서 끊겨 허공에 매달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먼 곳의 철판이 울었지만 새나 벌레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이었다.
그러나 땅에는 물이 흐른 흔적이 없었다. 갈라진 흙 위로 검은 재만 얇게 움직였다.
“다른 나라일까?” 마르가 물었다.
루카는 대답 대신 무너진 탑을 바라보았다. 탑 외벽에는 가르디아 왕실 문장도, 마왕군의 표식도 없었다. 기계의 형태는 그녀가 만든 순간 이동 장치보다 훨씬 정교했지만, 세월에 깎인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다른 시대일 가능성이 더 커.”
그 말이 폐허 안으로 떨어졌다.
마르는 뒤에 남은 반구형 건물을 돌아보았다.
“과거?”
“이런 기술을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증거가 없다면…… 미래겠지.”
루카는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추론이 맞기를 원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건물 입구의 부서진 표지판에서 숫자 일부가 남아 있었다. 문자 대부분은 벗겨졌지만 `2300`이라는 네 자리만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연도인지 시설 번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크로노는 북동쪽을 가리켰다.
회색 지평선 아래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깜박이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켠 것인지, 고장 난 기계가 반복하는 신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여기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 사람은 폐허 사이로 내려갔다.
길은 한때 돌보다 매끈한 재료로 포장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깊게 갈라져 있었다. 틈 아래에는 여러 층의 빈 공간이 보였다. 크로노가 먼저 건너가 금속판을 눌러 보고, 마르가 뒤따랐다. 루카는 가방의 무게 때문에 균형을 잃을 때마다 두 사람의 손을 빌려야 했다.
바람은 쉬지 않고 불었다.
잠시 멈추기만 해도 옷 주름과 머리카락 사이로 재가 쌓였다. 마르는 입과 코를 소매로 가렸고, 루카는 고글을 내려 눈을 보호했다. 크로노는 검집에 손을 얹었지만 칼날의 금이 떠올라 꺼내지 않았다.
한 번은 무너진 수송대 아래에서 금속성 울음이 들렸다.
크로노가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잔해 사이로 둥근 눈을 가진 작은 생물이 기어 나왔다. 쥐와 닮았지만 등에는 단단한 껍질이 있었고, 앞니 사이로 푸른 침이 흘렀다. 놈은 사람을 보자 달려들지 않고 루카의 가방만 노려보았다.
루카가 돌을 집어 던지자 생물은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잔해 속으로 사라졌다.
“먹을 걸 맡은 것 같아.”
그녀는 가방 안에서 천에 싼 빵 두 덩이를 꺼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 타반의 작업장에서 챙긴 것이었다.
마르는 빵을 보다가 폐허를 둘러보았다.
“저걸 세 명이 나눠 먹으면 얼마나 버틸까?”
“돌아갈 문을 고치기에는 충분해야 해.”
루카의 대답은 계산이 아니라 바람에 가까웠다.
불빛이 나온 건물에는 `트란 돔`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었다.

입구 안쪽에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녹슨 철문이 급히 닫혔다. 작은 관찰 구멍 너머로 움푹 꺼진 눈이 그들을 살폈다.
“무기 내려놔.”
남자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크로노가 금이 간 검을 바닥에 놓았다. 루카도 발사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마르가 빈손을 들어 보이자 잠금쇠가 하나씩 풀렸다.
문 안에는 사람 스무 명 남짓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살아 있다기보다 움직임을 아껴 죽음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옷은 여러 겹의 천과 비닐을 꿰매 만들었고, 얼굴에는 나이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이들도 울지 않았다. 울면 더 배고파진다는 사실을 배운 듯 입술만 깨물었다.

마르는 무의식적으로 펜던트를 옷 안쪽으로 감췄다.
“여기가 트루스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보았다.
“트루스?” 문을 연 남자가 되물었다. “여긴 트란 돔이야.”
“가르디아 왕국은요?”
이번에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루카가 건물 벽의 단말기를 확인했다. 죽어 있던 화면에 보조 전선을 연결하자 흐릿한 지도와 날짜가 떠올랐다. 숫자는 아까 표지판에서 본 것과 같았다.
서기 2300년.
마르가 화면에 손을 대었다.
“천삼백 년 뒤…….”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크로노는 돔 안의 사람들을 다시 보았다. 가르디아가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빵 냄새를 맡고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루카가 가져온 빵을 꺼냈다.
“이거, 나눠 드세요.”
남자는 받지 않았다.
“너희 몫이잖아.”
“우리는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어요.”
루카는 그렇게 말했지만 열쇠 장치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르는 빵 한 덩이를 아이들 곁의 천 위에 놓았다. 가장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올려다보았고,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손을 뻗었다. 빵은 얇게 잘려 사람들 사이로 돌았다. 누구도 자신의 조각을 한입에 먹지 않았다.
돔 안쪽에는 사람 키만 한 유리 상자가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에너트론이라고 불렀다. 문을 닫고 버튼을 누르면 몸의 피로와 상처가 줄어든다고 했다.
크로노가 먼저 들어갔다.
희미한 빛이 몸을 훑자 옆구리의 통증과 손바닥의 열감이 가라앉았다. 사흘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무게도 사라졌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 순간 속이 더 선명하게 비었다.
“잠은 대신 자 주지만 밥은 못 줘.” 남자가 말했다. “우리가 아직 사람이라는 걸 알려 주는 기계지.”
마르는 그 말을 듣고 에너트론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루카가 무릎 상처를 가리키자 그제야 고집을 꺾었다.
쉬는 동안 사람들은 북동쪽의 아리스 돔에 식량 저장고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문제는 그 사이의 16호 폐허였다. 변이한 생물과 고장 난 기계들이 길을 차지했고, 칼이나 탄환으로 쫓아내기도 어려웠다.
“거기 식량이 남아 있다면 왜 가지 않죠?” 마르가 물었다.
한 여자가 자신의 마른 손을 보여 주었다.
“갔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크로노는 마지막 남은 빵과 루카의 가방을 보았다. 여기서 시간의 문을 고치려면 물과 식량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리스 돔에 먹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 사람만의 귀환 준비가 아니었다.
그가 바닥의 검을 집어 들자 마르가 먼저 일어났다.
“같이 가.”
루카는 한숨을 쉬며 탄환 수를 확인했다.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내가 제일 신중한 사람처럼 느껴지잖아.”
트란 돔의 남자는 세 사람에게 낡은 물통과 얼굴을 가릴 천을 내주었다. 고맙다는 말 대신 16호 폐허에서는 뛰지 말라고 했다. 빠른 것들이 소지품부터 낚아채며, 쫓아가면 더 깊은 곳으로 유인한다고 했다.
폐허 입구는 무너진 두 탑 사이에 벌어진 검은 골짜기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바람이 줄고, 대신 어딘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축축한 냄새는 물이 아니라 오래된 기름과 썩은 천에서 나왔다. 바닥에는 자동차와 기계의 잔해가 층층이 쌓여 길을 만들었다.
둥근 등껍질의 생물들이 그림자 속에서 움직였다.
크로노는 검을 뽑지 않고 돌조각을 반대편으로 던졌다. 소리가 나자 생물 셋이 한꺼번에 달려갔다. 그 사이 마르가 먼저 낮은 통로를 통과했고 루카가 뒤따랐다.
두 번째 무리는 속지 않았다.
한 마리가 루카의 어깨를 타고 가방 끈을 물었다. 그녀가 몸을 돌리는 동안 다른 놈이 아래에서 달려들어 작은 주머니를 뜯어 갔다.
“내 공구!”
루카가 본능적으로 쫓으려 하자 크로노가 팔을 잡았다.
그 앞의 바닥은 어둠 속에서 완전히 끊겨 있었다. 한 발만 더 디뎠다면 아래층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마르가 금속 조각을 들어 벽을 두드렸다. 날카로운 울림이 폐허 전체로 퍼지자 생물들이 공구 주머니를 버리고 구멍 속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기다렸다가 돌아가 주머니를 발끝으로 끌어왔다.
“뛰지 말랬잖아.”
“알아. 몸이 먼저 움직였어.”
루카는 주머니를 품에 넣으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발명품이 사람을 삼킨 순간에도 원인을 찾으려 장치부터 붙들었던 사람의 습관이었다.
폐허의 동쪽 끝에서는 거대한 변이 생물이 통로를 막고 있었다. 팔처럼 긴 앞다리가 두 개였고, 눈은 살 속에 묻힌 채 빛에만 반응했다. 총성과 검으로 쓰러뜨리기 어렵다는 경고가 떠올랐다.
세 사람은 싸우지 않았다.
루카가 고장 난 수송대의 전지를 연결해 반대편 조명을 켰다. 생물이 빛을 향해 머리를 돌리는 동안 마르가 바닥의 쇠사슬을 끌어 길 한쪽에 걸었다. 크로노가 가까이 다가가 잔해를 차자 놈이 소리를 쫓아 돌진했다.
앞다리가 쇠사슬에 걸리고 거대한 몸이 무너졌다.

세 사람은 놈이 일어나기 전에 좁은 틈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오래 이어졌지만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폐허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여전히 같은 회색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해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북동쪽에 아리스 돔이 서 있었다. 다른 건물보다 온전했지만 지붕 한쪽은 깊게 꺼져 있었고, 입구의 불빛은 숨이 끊어질 듯 약하게 떨렸다.
세 사람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여러 개의 눈이 나타났다.
“서쪽 폐허를 건너왔다고?”
늙은 남자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마르는 대답하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지나온 16호 폐허 너머로 트란 돔의 작은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저쪽에도 사람들이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모두 배가 고파요.”
문이 조금 더 열렸다.
안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빈손과 가방으로 향했다. 먹을 것을 가져왔는지 확인하는 눈이었다.
크로노는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아이 하나를 보았다.
아이는 희망을 모르는 얼굴로 낯선 사람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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