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 트리거 소설 3화] 바람이 천 년을 건너는 동안

처음에는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몸 아래에 아무것도 없고, 발끝으로 짚을 수 있는 방향도 없었다. 그러나 바람은 아래에서 위로 불지 않았다. 앞과 뒤, 머리 위와 등 뒤에서 동시에 밀려왔다. 크로노는 어느 쪽으로 떨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몸을 웅크리면 어깨가 늘어났고, 팔을 뻗으면 손끝이 멀어지는 듯했다.

빛은 선이 아니라 조각이었다.

푸른 파편들 사이로 알 수 없는 풍경이 번쩍였다. 눈 덮인 산맥이 한순간 나타났다가 거대한 불길에 삼켜졌고, 검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이 뒤집혀 사라졌다. 철로 만든 높은 벽과 무너진 도시, 별빛 아래 서 있는 낯선 사람의 그림자도 보였다. 어느 것도 붙잡을 만큼 오래 머물지 않았다.

크로노는 펜던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보석의 열기가 손바닥 안에서 점점 식어 갔다. 그 감각만이 자신의 몸이 아직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마르의 이름을 떠올렸다. 입 밖으로 부르려 했지만 목소리는 소리가 되기 전에 길게 찢어졌다.

그러다 모든 빛이 갑자기 한 점으로 모였다.

몸이 앞으로 내던져졌다.

등이 단단한 흙바닥에 부딪쳤다. 폐에서 숨이 빠져나갔고, 머리 위로 마른 나뭇잎이 쏟아졌다. 크로노는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몸 곳곳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듯 손가락과 발끝을 천천히 움직였다.

축축한 냄새가 났다.

천년제의 구운 고기와 설탕 냄새가 아니라, 비를 머금은 흙과 오래된 나무껍질, 이끼 냄새였다. 바람이 얼굴 위를 지나갈 때마다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가 눈을 뜨자 회색빛 하늘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광장은 없었다.

시간의 문을 지나 도착한 서기 600년의 숲에 홀로 선 크로노
시간의 문을 지나 도착한 서기 600년의 숲 - PANDA Chronicle Plus

주변에는 키 큰 침엽수와 검은 바위가 가득했다. 바위 표면에는 젖은 이끼가 두껍게 붙어 있었고, 경사진 길 아래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수백 명의 목소리로 가득했던 세상은 새 울음조차 드물 만큼 조용했다.

크로노는 상체를 일으켰다.

등과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뼈가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허리춤의 검집도 그대로였다. 축제에 갈 때 굳이 검을 차고 나온 것을 어머니가 보았다면 한마디 했을 테지만, 루카의 시연이 끝난 뒤 연습장에 들를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 평범한 칼 한 자루가 집에서 가져온 유일한 물건처럼 느껴졌다.

손을 펴자 펜던트가 놓여 있었다.

빛은 사라졌고 보석은 다시 차가워져 있었다.

크로노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머리 위에서 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바위 위에 작은 형체 셋이 서 있었다. 어린아이 정도의 키였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푸른 피부와 뾰족한 귀, 지나치게 긴 팔을 가진 것들이 낡은 가죽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나는 나무 몽둥이를 들었고, 다른 둘은 바위 조각을 양손에 쥐고 있었다.

가운데 있던 것이 크로노를 가리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숲에서 푸른 피부의 작은 것들과 검을 맞대는 크로노
숲에서 푸른 피부의 것들과 맞서는 크로노 - PANDA Chronicle Plus

양옆의 둘이 바위를 던졌다.

크로노는 몸을 굴렸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 돌이 부딪쳐 흙을 튀겼다. 그는 한쪽 무릎을 세우며 검을 뽑았다. 칼날이 습한 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뜩였다.

푸른 것들은 예상보다 빨랐다.

몽둥이를 든 놈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머리를 노렸다. 크로노는 검의 옆면으로 공격을 흘렸지만 충격이 손목까지 울렸다. 상대는 몸집에 비해 힘이 셌다. 뒤에서 다른 하나가 달려드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먼저 온 놈의 어깨를 밀어내고 몸을 돌렸다.

돌칼이 옷자락을 스쳤다. 크로노는 팔을 당겨 상대의 손목을 검자루로 쳤다. 돌칼이 떨어지자 발로 밀어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세 번째 놈이 이미 옆에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피할 공간이 좁았다.

등 뒤에는 젖은 바위가 있었고, 아래쪽은 경사가 급했다. 크로노는 바위 쪽으로 몸을 붙이는 대신 앞으로 파고들었다. 몽둥이가 어깨 위를 지나가게 두고, 칼등으로 놈의 옆구리를 힘껏 밀쳤다. 푸른 몸이 다른 하나와 부딪쳐 함께 넘어졌다.

처음 공격했던 놈이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다.

크로노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 칼끝으로 위협해 물러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버렸다. 그는 낮게 몸을 돌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칼날이 몽둥이를 쳐내고, 회전의 남은 힘이 놈의 가슴을 베었다.

푸른 피가 튀었다.

상대는 놀란 얼굴로 상처를 내려다보다가 뒤로 쓰러졌다.

남은 둘이 움직임을 멈췄다. 쓰러진 동료와 크로노를 번갈아 보던 것들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경사 위로 달아났다. 쫓을 생각은 없었다. 크로노는 검을 든 채 그들이 나무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숲이 다시 조용해졌다.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이 거칠게 움직였다. 축제의 놀이판에서 나무 인형을 상대하거나 마을 밖에서 들짐승을 쫓아낸 적은 있었지만, 자신의 칼이 살아 있는 것을 가른 감각은 달랐다. 손바닥에 남은 진동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크로노는 쓰러진 생물 곁에 다가갔다.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입가에 작은 송곳니가 드러나 있었고, 목에는 짐승 뼈를 꿰어 만든 장식이 걸려 있었다. 단순한 야생동물은 아니었다. 도구를 만들고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존재였다.

그는 검에 묻은 피를 젖은 풀에 닦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도 없었다. 칼을 검집에 넣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멀리서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광장의 종소리가 아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 잠시 멈춘 뒤 다시 두 번. 경고나 신호에 가까웠다.

크로노는 경사 아래로 내려갔다.

길은 바위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졌다. 나무뿌리가 젖은 흙을 붙들고 있었고, 곳곳에는 오래전에 사람이 다듬은 듯한 돌계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계단의 모서리는 닳고 깨져 있었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이라고 보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조금 더 내려가자 두 명의 병사가 보였다.

둘 다 철제 투구와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창끝에는 검은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한 명은 바위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팔에 난 상처를 천으로 감고 있었다.

크로노는 나무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복장은 천년제 역사 전시관에 세워 둔 병사 모형과 비슷했다. 그러나 갑옷에는 진짜 흙과 피가 묻어 있었고, 얼굴에는 며칠씩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의 피로가 남아 있었다.

“마왕군 정찰대가 협곡 안까지 들어오다니.”

상처를 감던 병사가 말했다.

“왕비님을 찾느라 병력이 빠졌잖아.”

“찾았으니 이제 돌아오겠지.”

“그게 더 이상해. 실종되신 곳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혼자 나타나셨다잖아.”

다른 병사는 주변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

“살아 돌아오셨으면 된 거야. 이런 때 왕실에까지 불길한 소문이 돌면 끝장이야.”

마왕군.

왕비.

크로노는 두 단어를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축제의 역사극에서나 들을 법한 말이었다. 가르디아가 마왕의 군대와 싸운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정확한 연도까지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천년제가 왕국 건국 천 년을 기념하는 행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손 안의 펜던트를 내려다보았다.

루카의 장치가 거리를 잘못 잰 것이 아니라면, 자신은 장소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건넌 셈이었다.

병사들이 떠난 뒤 크로노는 반대쪽 길로 내려갔다.

협곡을 빠져나오자 낮은 언덕 너머로 마을이 보였다. 지붕은 짚이나 검게 그을린 나무판으로 덮여 있었고, 집들을 둘러싼 울타리에는 날카롭게 깎은 말뚝이 박혀 있었다. 마을 바깥의 밭은 군데군데 짓밟혀 있었다. 축제 깃발 대신 경계용 종과 횃불대가 길목마다 세워져 있었다.

마을 입구의 표지판에는 ‘트루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글자의 형태는 오래되었지만 읽을 수 있었다.

크로노가 알고 있는 마을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는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낯선 붉은 머리와 옷차림을 곁눈질했지만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전쟁 중에는 여행자나 피란민이 드물지 않은 듯했다. 한 집 앞에서는 여자가 찢어진 군복을 꿰매고 있었고, 대장간에서는 젊은 남자가 부러진 창날을 다시 달구고 있었다.

여관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와 술 냄새가 밀려왔다.

안에는 병사와 상인, 여행객 몇 명이 모여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왕국 문장이 새겨진 방패가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실종된 왕비를 찾는다는 오래된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종이 한쪽에는 누군가 붉은 글씨로 ‘귀환’이라고 덧썼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주인이 크로노 앞에 나무잔을 내려놓았다.

“북쪽에서 왔나?”

크로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남쪽? 요즘 제난 다리를 건너오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가 대답하지 않자 주인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잔에 물을 채워 밀어 주었다.

“돈은 됐어. 얼굴을 보니 협곡에서 한바탕 겪은 모양이군.”

크로노는 물을 한 번에 마셨다. 차갑고 약간 쇠 맛이 났지만 목 안의 마른 감각이 가라앉았다.

근처 탁자에서는 병사 둘이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왕비님이 돌아오셨으니 전하도 다시 전쟁에 집중하시겠지.”

“기사단장은 아직 믿지 못하는 눈치더군. 수색대를 너무 빨리 거둬들였다고.”

“왕비님이 성에 계시는데 누구를 더 찾겠다는 거야?”

다른 병사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성에서 일하는 사촌 말로는 왕비님이 이상한 옷을 입고 계셨대. 왕실 예법도 잠시 잊은 것처럼 행동하셨다더군.”

“납치당했다 돌아온 분에게 예법을 따질 건가?”

“그게 아니라…….”

병사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크로노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이상한 옷과 낯선 행동이라는 말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르일 가능성이 충분했다.

크로노는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관 주인이 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북서쪽 숲을 통과하면 된다고 했다. 다만 마왕군의 짐승들이 숨어 있을 수 있으니 해가 지기 전에 움직이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크로노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마을 북쪽 길은 숲으로 이어졌다. 낮이었지만 나무들이 빽빽해 안쪽은 어두웠다. 비에 젖은 낙엽이 장화 밑에서 눌렸고, 멀리서는 까마귀가 울었다. 곳곳에 병사들이 쉬어 간 흔적이 있었다. 꺼진 모닥불, 부러진 화살, 나무에 묶어 둔 붕대 조각이 길을 따라 이어졌다.

크로노는 사람의 발자국과 짐승의 흔적을 구분하며 걸었다.

협곡에서 만난 생물과 비슷한 발자국이 수풀 안으로 나 있었지만 이번에는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덤불 뒤에서 둥근 몸집의 짐승 하나가 튀어나왔다. 갑옷처럼 단단한 껍질을 두른 놈은 몸을 말아 바퀴처럼 굴러왔다.

가르디아 숲에서 짐승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크로노
가르디아 숲에서 짐승들과 싸우는 크로노 - PANDA Chronicle Plus

크로노는 옆으로 피한 뒤 나무에 부딪쳐 멈춘 놈의 틈을 노렸다. 첫 공격은 껍질에 튕겨 나갔다. 그는 칼에 힘을 더 싣기보다 상대가 몸을 펴는 순간을 기다렸다. 짧은 다리가 드러났을 때 칼끝으로 땅을 찍듯 공격하자 놈은 날카로운 울음을 내며 도망쳤다.

그 뒤로는 숲이 길을 내주었다.

나무 사이로 높은 돌벽이 나타났다.

가르디아 성이었다.

숲을 빠져나온 뒤 멀리 보이는 서기 600년 가르디아 성
숲을 지나 시야에 들어온 서기 600년의 가르디아 성 - ArrPeeGeeZ

크로노가 알고 있는 성과 기본 형태는 같았지만, 천 년 뒤의 성보다 거칠고 새로웠다. 성벽의 돌은 아직 밝은 색을 띠었고, 탑마다 전쟁용 깃발이 걸려 있었다. 성문 앞에는 목책과 모래주머니가 쌓여 있었으며,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들어오는 사람을 하나씩 확인했다.

크로노가 가까이 가자 창 두 자루가 교차하며 길을 막았다.

“멈춰라.”

왼쪽 병사가 그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어느 부대 소속이지?”

크로노는 대답 대신 펜던트를 꺼내 보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왕실 물건이라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내리고 성 안쪽을 가리켰다.

“왕비님을 만나러 왔다고?”

병사가 비웃듯 말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군. 왕비님이 돌아오셨다는 소식이 퍼지자 별별 사람이 친분을 주장하고 있어.”

다른 병사는 크로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잠깐.”

그가 동료의 팔을 내렸다.

“붉은 머리의 젊은이를 들이면 된다는 전갈이 있었어.”

“누가 보냈는데?”

“왕비님께서 직접.”

두 병사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름이 크로노인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서로를 바라본 뒤 창을 거두었다. 조금 전까지 의심하던 얼굴에 당혹감이 섞였다. 왕비가 낯선 소년을 이름으로 기다린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라. 폐하께서도 왕비님의 은인을 보고 싶어 하신다.”

성문이 열렸다.

안쪽에서는 병사들의 발소리와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부상자들이 벽을 따라 앉아 있었고, 시종들은 물과 붕대를 날랐다. 전쟁의 냄새가 성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크로노가 중앙 계단에 다다르자 왕실 복장을 한 남자가 위에서 내려왔다. 길고 뾰족한 얼굴에, 지나치게 단정한 수염을 기른 사람이었다. 그는 크로노를 보고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대가 왕비님께서 말씀하신 젊은이인가.”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군. 왕비님께서는 자신을 구한 기사들보다 그대를 먼저 찾으셨으니.”

크로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오른쪽 탑을 가리켰다.

“위층의 방에 계신다. 전하께서는 피로하신 왕비님을 쉬게 하라 명하셨지만, 그대라면 만나실 것이다.”

그가 곁을 지나갈 때 옷자락에서 희미한 향 냄새가 났다. 성 안의 피와 쇠 냄새를 덮으려 한 것처럼 지나치게 달았다.

크로노는 계단을 올랐다.

탑 안은 아래층보다 조용했다. 좁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나선형 계단을 따라 끊어져 있었다. 층마다 시녀와 경비병이 서 있었지만, 왕비의 방에 가까워질수록 사람 수가 줄었다.

마지막 계단 위에서 젊은 시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로노 님이십니까?”

그녀는 문을 열며 미소 지었다.

“왕비님께서 계속 기다리셨습니다.”

방 안에서는 불이 타고 있었다.

높은 침대와 무거운 커튼, 은으로 만든 촛대가 먼저 보였다. 창가에는 왕국의 문장이 수놓인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방 한가운데 선 사람은 그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붉은 조끼와 흰옷, 금빛 머리카락.

마르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문 닫히는 소리에 돌아본 그녀의 얼굴에서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크로노.”

그녀는 왕비도, 귀족도 아닌 광장에서 만난 소녀의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몇 걸음 만에 방을 가로질러 다가온 마르는 손을 내밀다가 멈췄다. 펜던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듯 크로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석을 꺼내 보이자 그녀는 안도하며 웃었다.

“찾아왔구나.”

크로노는 펜던트가 아니라 그녀를 보았다.

마르는 그 시선을 이해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녀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여기는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니야.”

창밖에서 전쟁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렸다.

마르는 어깨 너머로 성벽과 숲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나를 왕비라고 불러.”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은 가르디아력 600년이래.”

크로노의 손 안에서 펜던트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들이 떠나온 축제는 천년을 기념하고 있었다.

창밖의 바람은 그 천 년을 아무렇지 않게 건너와, 오래된 성의 깃발을 거칠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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